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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 ㅣ 창비시선 343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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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같은 생각하면서 시집을 골랐다. 문태준. 아마 이이가 나보다 많이 위일 거야. 이름이 태준, 이태준을 생각해서 그랬나? 아니면 박태준? 이 시집이 세번째 읽는 문태준의 시집인데 처음엔 그랬을지언정 두번째, 세번째는 아니다. 정말로 한참 꼰대 시인인 걸로 기억해서, 이제 이이 시를 읽으면 얼마나 더 읽을꼬, 하는 심정으로 골랐을 수도 있다. 전에 쓴 독후감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렇게 말했더군.
“1950년에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고, 시집을 다 읽을 때까지 잘못 알았다. (중략) 난 문태준의 생년이 1950년 범띠인 줄 알았다. 그렇게 알고도 시를 읽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데 1, 2년이 아니고 20년을 잘못 읽었다. 1970년생이다.”
하, 이것 참. 처음엔 몰라서 그랬다 치고, 난 두 번째 미쳤던 거였다. 여전히 나보다 꼰대인 줄 알았다.
얼마나 꼰대 같길래 그러느냐고? 한 번 읽어보실텨?
빈집
주인도
내각(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집 (전문. p.13)
그렇지? 요즘 시를 누가 이렇게 써? 이이 말고. 70년 개띠가 쓴 시라고 읽기 힘들겠지? 나도 서가 앞에서 시집을 훑어보고, 거 참 꼰대 시군. 종알거리고 나서 골랐다는 거 아냐. 시의 스타일도 좀 보시라고. 사람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시골 폐가 비슷한 빈집에 그래도 햇살도 들고, 고양이도 여행객처럼 드나드는 모습을 스케치한 정물화. 2012년 2월에 낸 시집이니 시는 2011년, 문태준이 41세 때 썼으렸다? 그래, 그래. 스타일에 관해서는 이쯤에서 그만 두자. 그냥 이런 스타일을 유지하는 드문 시인이라고만 여기면 되겠다.
요즘에는 만 89세, 즉 구순을 넘겨 사는 노인이 적지 않은데 21세기 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찬 염주를 돌리며>를 감안해보면 이 시에 등장하는 구순 넘은 할머니가 시인의 외할머니로 보인다. 이미 영혼은 반쯤 천국에 가 있는 살아 있는 보살. 자연 가까운 상태의 할머니도 스케치했다.
구순의 입과 입술에는
내 옆집 구순(九旬)의 입과 입술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느릿느릿 움직여갔습니다
구붓하게 걸어갈 때 큰 귀가 풀잎처럼 떠 있었습니다
숨이 가쁘고 지난해 풀벌레 소리가 났습니다
가끔 어떤 속말에는 잔물결처럼 웃고 이내 허물어지듯 손을 내저었습니다
앉아도 꽤 여럿이 앉을 긴 의자에 혼자 앉았습니다
흐릿한 빛이 지나가는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두어번 물어도 그렇지, 그렇지,라고만 나직이 말했습니다
구순의 입과 입술에는 저 먼 계곡처럼 무른 구름더미가 가득하였습니다. (전문. p.14)
뭐 이렇게 사는 거지. 다음 시에서 구순의 할머니는 드디어 명명(明明)한 겨울 하늘로 올라가 명명(冥冥)한 저승으로 가면 그걸로 끝이지. 아무리 명명明明하게 올라가봐라, 그곳은 단위가 어떻게 됐든 10의 600제곱 공간의 영하 273도 차디차고 명명冥冥한 어둠 속일 터이다. 그걸 모르거나 의례상 “사슴벌레, 작은 새, 여덟살 아이와 구순의 할머니, 마른 풀, 양떼와 초원, 사나운 이빨을 가진 짐승들이 모두 다 알아온 가장 단순한 노래를 읊조릴” 수 있는 것이겠지. 인생 뭐 별 거냐,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게 대빵이다.
누구나 몸에 돌을 하나 이상 담고 다닌다. 치사하게 담석, 신장석, 췌장석 같은 질환을 이야기하는 거 아니다. 예컨대 <돌과의 사귐>에 나오는 이런 것들. 어제보다 조금 더 닳아진 돌, (몸의)아래로 안쪽으로 내려서는 돌. 눈을 감겨놓고 귀를 닫아놓은 돌, 후일 물속 깊이 잠길 돌. 소낙비 내리고 눈보라 치는 날 발아래서 주워올려 가만히 꼭 쥐고만 있을 돌들. 이런 걸 흔히 “맺힘”이라고도 하고, 기억이라고도 하고 드물게는 지독한 사랑병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하여간 뭐가 됐든 당신 가슴, 당신의 대뇌, 아니면 당신의 생식기에도 이런 돌 하나 들어있는 줄 누가 알아? 그런데 이게 생각지도 못하게 다른 모습으로 새겨질 수도 있었네?
주먹밥
찔레나무에 막 새순이 돋아나면 풋풋한 산의 냄새가 울라오면 주먹밥 두어 덩이를 들고 산나물을 뜯으며 봄 산에 살았네 산등성이 넘고 넘어 갔네
허기가 지면 빙빙 틀어앉을 줄도 모르는 봄뱀 독사의 새끼처럼 덤불 아래 퍼지르고 앉아 간도 안 친 주먹밥을 먹었네 송글송글 뚫린 몸으로 그 큰 주먹밥이 다 들어갔네
반그늘을 툭툭 털고 일어나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봄 산을 그녀는 넘고 넘었네 (전문. p.47)
뭐가 돌이냐고? 나물 캐러 산을 둘 넘어 간 처자한테는 주먹밥이 돌이고, 이 처자를 앙가슴에 담고 사는 총각한테는 처자가 돌이겠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한테 돌이 될 수 있는 법이니까. 내 돌은 누구냐고? 안 알려줌. 세종임금, 전봉준, 신채호? 그래, 그렇게 알고 있으면 편하겠다.
불만 때다 왔다
앓는 병 나으라고
그 집 가서 마당에 솥을 걸고 불만 때다 왔다
오고 온 병에 대해 물어 무엇하리,
지금 감나무 밑에 감꽃 떨어지는 이유를
마른 씨앗처럼 누운 사람에게
버들 같은 새살은 돋으라고
한 계절을 꾸어다 불만 때다 왔다 (전문. p.67)
앓는 병을 결국 고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진짜 병일 수도 있고, 마음 속 갈증일 수도 있겠다. 다른 시 몇 수 읽어보면 진짜 병인 것도 같은데 시인들이 시에 쓴 걸 도무지 믿을 수 있어야지.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 확률이 95퍼센트는 넘을 거고. 담배가게 아가씨한테 사랑 고백하러 갔다가 괜히 담배 한 갑도 아니고 (그땐 “까치담배”라고 불렀지) 담배 두 개비하고 성냥 한 통 사가지고 온 거구의 막내 외삼촌 생각이 나네. 결국 말 한 마디 못하고 산악회에서 만난 은행원하고 결혼해 딸 둘 낳고 살다가 일흔 살, 만 69세에 눈 감았다. 잔뜩 술에 취해 지하철 1호선 타면 가죽 손잡이를 비틀어 가볍게 툭, 끊어버리던 기운 센 천하장사. 그래도 오래 살지 못하는 게 인생인 걸 뭐.
다음에 또 서가에서 문태준 만나면, 50년 범띠가 아니라 70년 개띠 시인이란 걸 꼭 기억해야지,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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