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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일 없는 여자
오스카 와일드 지음, 오경심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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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을 살다 간 잉글랜드계 아일랜드 부르주아 댄디 보이, 오스카 핑갈 오프플레허티 윌스 와일드Oscar Fingal O’Fflahertie Wills Wilde.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 필명을 휘날린 것과 비슷한 중량으로 당시 영국에서 범죄였던 동성애와 ‘심한 외설’로 유죄판결을 받아 2년 동안 악명높은 레딩 감옥에서 복역하며 연인 알프레드 보시 더글러스에게 보낸 연애편지로도 유명한 인물. 나는 이이의 대표작, 장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희곡 <살로메>가 들어 있는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이렇게 단 두 권만 읽었을 뿐이라 말 그대로 초록색 바탕에 검정 줄이 죽죽 그어진 수박 껍데기만 핥았을 뿐인데, 그렇더라도 딱 잘라 말하면 ①나하고 안 맞아도 참 안 맞거나, ② 와일드는 얼굴이 잘 생기고 허우대 멀쩡한데다가 옷도 잘 입어 과대 평가된 대표적인 시인, (극)작가일지도 모른다는 거.
물론 언어에 특별한 영재가 있어서 불어와 독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명문 대학인 더블린 트리티니 칼리지와 옥스퍼드를 나와 눈부신 언변으로 당대 사교계의 스타로 군림한 것처럼, 오늘 읽은 <별 볼일 없는 여자>에서도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일링워스 경의 혓바닥이야말로 정말 현란하게 굴러간다. 사실 나는 (아일랜드 사람 예이츠도 마찬가지지만) 와일드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 글을 썼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여자> 속에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댄디 스타일의 등장인물인 일링워스 경과 앨런비 여사의 톡톡 튀는 대화가 참신했을 수도 있으나, 어째 나이 좀 든 사람들이 주책없이 발랑 까진 말을 주고받는 대사를 그냥 말장난 하는 것처럼 받아들였으니 와일드가 나하고 안 맞기는 정말 안 맞는 모양이다. 자꾸 강조하다가 혹시라도 만장하신 와일드 팬들한테 얻어 터지는 거 아냐 이거?
오스카 와일드의 부모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였으며, 와일드 본인도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살면서 한 번도 경제적으로 궁핍해본 적이 없다. 그런 면모가 제일 잘 드러난 작품이 이 <별 볼일 없는 여자> 아니겠나 싶다. 작품의 무대는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국식 시골 귀족 헌스탠턴 씨의 저택. 시골 귀족 커뮤니티의 파티까지는 아니고 영국 고유의 향사鄕士gentry 계급 사람들이 모여 조촐하게 정찬을 곁들인 사교 모임이다. 등장인물 역시 앞에서 말한 현대적, 현대적이라고 해봤자 19세기말의 현대적이니까 세기말 분위기도 있고, 돈지랄하는 댄디 성향도 있는 반면 20세기 전쟁 이후의 진보적 개념은 1도 없어서 그저 현실에 대한 삐딱한 시각만 유지하는 일링워스 경과 앨런비 여사. 이들과 거의 반대 성향, 즉 당대 빅토리아 시대에 충실한 완고한 신사 숙녀들인 캐럴라인 부인과 그의 찌질한 남편 존 나리, 흠, ‘존 나리’를 한 번에 붙여서 빨리 발음하니 좀 이상하기도 하군. 하여간 이 부부하고 같은 부류이자 오늘 밤의 호스티스인 헌스탠턴 부인, 스튜트필드 부인, 지역 하원의원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민중을 몇 수 아래로 깔고 바라보기를 즐기는 켈빌 씨, 부주교 도브니 박사도 있다.
위의 등장인물들은 전부 나이든 꼰대들. 이러면 연극이 재미없겠지? 역시 젊은 커플이 나와 서로 사랑을 해야 기름칠이 되니까 가난한 은행원 제럴드 아버스노트와 미국에서 영국에 다니러 온 청교도 출신 (죽은) 백만장자의 상속녀 헤스터 위슬리 양도 나온다. 서로 사랑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고백은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만리장성을 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웬만큼 진도는 나간 것 같기도 한 커플인데 드라마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한 계기가 만들어져 순식간에 화르륵 불타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은행의 평사원인 제럴드 총각이 월 100의 수입으로 백만장자 상속녀한테 청혼하기도 껄끄러운데 감히 향사들의 정찬에 초대를 받았어? 그렇다. 높은 귀족에다가 얼마 안 있어 외교관 신분으로 인도로 가기로 결정된 일링워스 경이 제럴드 총각을 개인 비서로 고용할 계획인 것이 사교계에 널리 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에 몇 번, 적어도 한 번은 확실하게 사랑에 목 매달아 야반도주한 부도덕한 경험이 있는 레이첼 아버스노트 여사의 아들을 초대한 거다. 이 정도로 일링워스 경의 재력과 정치적 위상이 대단하다는 말씀. 심지어 제럴드의 칩거중인 엄마인 아버스노트 여사마저 개별적으로 쪽지를 보내 일링워스 경의 비서로 발탁되었다고 전해 모임에 오라고 연락할 정도이니 정말 대단한 일링워스 경이지?
이제 드라마를 드라마처럼 만들어보자.
제럴드 청년의 어머니 레이첼 아버스노트 여사는 어떤 부도덕한 과거를 갖고 칩거하면서 불우한 사람을 위한 자잘한 봉사를 하고 있을까? 예전에 어떤 사랑을 하느라고 야반도주를 했을까? 상대가 혹시 유부남?
아니다. 당시 아버스노트 여사는 열여덟 살이었는데 스물두 살의 조지 하퍼드 청년을 사랑했고, 조지는 레이첼한테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교회에 가서 검은 머리 파뿌리 운운하기도 전에 먼저, 했다. 이날부터 레이첼의 배가 부르기 시작해, 초조해진 레이첼은 조지를 만날 때마다 빨리 결혼하자고, 적어도 아이가 밀고 나오기 전에는 식을 올리자 요구했지만 조지는 겁이 났던지 1주일, 2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미루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아이를 출산한 레이첼. 절망한 그녀는 아이를 들쳐 업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찌그러진 귀족의 친척인 조지 부모가 레이첼과 아이를 지원해주고 보살펴줄 것이고 조지가 정신을 차리면 결혼도 시키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아마 조지의 확실하지 않은 사랑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나 싶다.
여기까지는 팍, 이해가 가시지?
이젠 일일 드라마 또는 아침 드라마가 될 차례이다.
조지 하퍼드는 생겨 먹기를 천생 댄디 보이. 당연히 공부는 잘한 거 같고, 언어에 재능이 있어서 말주변이 기막히다. 주로 현상을 비꼬는 데 일가견이 있으며 (예쁜) 여자를 봤다 하면 일단 주둥이를 내밀어 다른 입술로부터 립스틱을 옮겨 바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 번도 결혼해보지 않은 독신. 잉글랜드 각지에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여우사냥을 즐길 수 있는 들판과 숲을 소유하고 있으며, 런던에도 몇 채의 저택이 있고 곳곳에 별장까지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 중의 부르주아. 작품의 무대인 시골 사교계에서는 당연히 하느님과 초등학교 동창 수준이다. 바다 건너 대륙에도 여기 저기 부동산과 저택을 가지고 있을 듯. 물론 이런 대규모 부동산을 자기가 열라 돈을 벌어 살 수 있을 확률은 10의 600제곱 분의 1이다. 그럼 어떻게? 유럽의 부르주아 귀족 계급이 항상 그렇듯이 상속받은 것이지 뭐.
조지의 부모가 귀족 계급의 찌그러진 친척이라며? 근데 상속을 받았다고? 그렇다. 완전히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이다. 백작이든가 공작인 친척이 자식 없이 죽었다. 혹시 모르지, 오스틴과 브론테 작품에서 자주 나왔듯이 딸만 있어서 잉글랜드의 한사상속 제도에 걸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남자 형제한테 넘겼어야 했는지도. 그래서 그게 조지의 형한테 가야 했는데, 마침 형도 죽어버려 모든 재산이 조지 하퍼드한테 왔고, 재산만 온 게 아니라 작위까지 한 방에 들이닥쳐 졸지에 조지 하퍼드 일링워스 경으로 이름까지 바뀌어 버렸다. 아, 될 놈은 된다. 만고의 진리네.
그러면 감 잡히시지? 왕년의 조지 하퍼드. 지금의 일링워스 경. 그리고 한 시절 일링워스 경의 아이를 출산하고 좌절해서 혼외자 갓난 아들과 함께 야반도주한 레이첼 아가씨. 그때 조지라는 젊은 놈은 혼외자 갓난 아들한테 이름도 지어주지 않아서, 레이첼은 자기를 한 번도 도와주지 않고 끝끝내 경멸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이름을 가져다 아들한테 주었으니 그게 뭐? 맞다, 제럴드.
사실 그리 뛰어난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제럴드를 보자마자 뭔가 끌리는 게 있어서 비서로 채용하려 했을까? 그건 아니고 아마 아버지 유전자 덕인지 똘똘한 면이 눈에 보였던 거 같다.
크. 출생의 비밀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제 제럴드 팔자가 한 번에 휘까닥 바뀔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썩어도 준치, 그래도 오스카 와일드인데 그리 쉽게 되지는 않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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