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봇 동화 - 설재인의 로봇 동화 다시 쓰기 ㅣ FoP Classic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알마 / 2023년 4월
평점 :
.
《로봇 동화》까지 읽고 스타니스와프 렘은 당분간 쉬자고 마음먹었는데 정말 그렇게 될 듯. 《사이버리아드》에 이어 완전 로봇나라 이야기이다. 게다가 《사이버리아드》에서는 제일 앞에 실린 개발자 트루를 이야기 가운데 세 편이 《로봇 동화》의 제일 뒤에 또다시 실렸다. 이제 보니 《사이버리아드》에서는 “사이버네틱스의 노래”라는 소제목으로 따로 묶인 세 편이다. 에잇 뭐, 그럴 수 있지. “사이버네틱스의 노래” 앞에 실린 단편 <무르다스 왕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햄릿> 페러디. 그렇다는 얘기지 그래서 후지다는 말 아니다. 오히려 생각하기에 따라서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
로봇의 나라라는 설정은 상관없다. 불만은 이 로봇 나라가 하나같이 왕정을 하고 있다는 점. 왜 로봇 나라에는 대통령이나 수상, 총리가 없고 전부 왕들이 군림할까? 비록 전제정치를 하지 못하고 앞에서 말한대로 삼촌 대신 큰아빠가 내 아빠를 시해하고 왕이 되려 했던 햄릿 비슷한 이야기도 있고, 수시로 왕의 자리를 탐내는 역심을 품은 로봇도 숱하게 등장하지만 하필이면 왕정, 당시 공산주의를 선택한 폴란드의 과학 픽션 작가가 봉건시대에나 걸맞은 왕정을 기계와 인공지능과 자체 진화가 가능한 로봇시대에 가져다 맞추었을까?
둘째. 몸은 금속으로 이루어진 로봇이지만 지극한 인공지능으로 하는 짓과 생각은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로봇끼리 서로를 부르는 것도 ‘사람’이며 굳이 인간을 묘사하려면 ‘유기물’이나 이 비슷한 단어를 구사한다. 로봇의 눈으로 보기에 인간이나 다른 포유류, 기타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 같은 것들도 로봇이라는 무기물 생명체를 말살할 수 있는 종자로 본다. 심지어 균류, 흰 곰팡이나 이끼 같은 것들까지. 흰 곰팡이가 돋은 공간 안으로 침투한 로봇. 이들은 얼른 흰 곰팡이 또는 이끼가 낀 거대 우주선을 폭파하고 귀대하지만 균류는 로봇의 틈새, 빈 공간에 포자를 뿌렸고 그곳에서 성장해 급속도로 번식, 금속을 부식해 이들을 멸종시켜 버린다. 인간종은 로봇과 달리 거짓 약속을 밥 먹는 것보다 쉽게 해 로봇 국가의 왕 이하 모든 신민들을 대상으로 사기 치고 잠적하기도 한다. 로봇에게 가장 큰 천적이 바로 유기물. 아예 극약 수준이다.
셋째. 무한대의 우주와 극소 지역인 원자 간의 대위법. 이를테면 지난 달에 쓴 《절대 진공 & 상상된 위대함》 독후감에서 이야기했듯 10의 600제곱. 이 정도 되면 단위는 아무 소용없는데, 10의 600제곱 미터를 반지름으로 하는 공, 구 형태를 우주의 총 부피라고 하자. 반면에 그러면 10의 600제곱 분의 1미터를 지름으로 하는 구도 있을 것 아닌가 말이지. 이 정도면 원자, 소립자. 기타 어떻게 부를지 아직 인류가 발명하거나 합의하지도 못한 단위로 작은 ‘수학적 점’보다도 미세한 공간이다. 큰 구를 무한대 우주라고 하면 반대로 작은 구를 극미세 원자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면 다음 문제. 만일 이 두 구 가운데 중요한 정도가 있다면 무엇이 더 중요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허무하다. 우주도 허무하고 극미세 원자도 허무하고, 그 속의 인간도 허무하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까, 하늘의 별이라는 존재.
그건 그냥 새까만 우주에 떠 있는 불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짝반짝 작은 별 주변만 조금 뜨끈하고 나머지 캄캄한 공간, 드문드문 식어서 가루가 된 미세 모래와 먼지로 껍데기가 덥힌 행성, 위성, 그냥 떠 있는 금속과 암석과 간혹 얼음 덩어리들은 절대온도 0도 섭씨 영하 273도 근처의 차고 얼어붙은 것이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이 놓인 빈 공간. 그게 우주이다. 위에서 말한 절대 허무 그 자체. 아무것도 없음. 그리하여 내가 읽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모든 작품 속에는 이 허무와 아무것도 없음의 주제가 알게 모르게 넘실거린다.
제목이 《로봇 동화》, 동화라니까 그냥 재미있고, 교훈적이고, 아이들 잠자리에서 읽어주면 좋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동화는 동화인데 인간이 아니라 로봇을 대상으로 쓴 동화이다. 근데 로봇은 어떻게 태어날까? 인간이 만든 로봇 말고 로봇이 만든 로봇 말이지. 로봇도 진화를 하는 시대니까 그들 역시 섹스를 통한 번식을 할까? 아닐 걸? 로봇은 천성적으로, 신체 구조적으로 습식접촉, B급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말한 것처럼 액체교환법으로 아이를 만들지 않고, 책에서 예를 든 대로 왕명에 의하여 왕자를 생산하고자 하면 관련 프로그래머 장관들이 모여 마치 교황, 나는 어째 ‘교황’이란 단어가 입에 붙지 않아서 그냥 ‘교왕’이라고만 하자, 교왕이 죽으면 다음 번 교왕을 뽑기 위해 콘클라베를 여는 것처럼 그들끼리 실험실 또는 왕자 제작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왕이 주문한 외모와 성격을 프로그래밍해서 만든다. 이 로봇 왕자가 인간 왕자와 다른 점은 낳는 즉시 모든 학습이 완료된 상태라서 즉각 왕의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거.
이런 로봇 어린이가 읽는 동화가 이 책에 든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이다. 그러니 말은 동화라고 해도 죽고 죽이고, 반역하고, 사기치고, 무한과 제로 상태와 허무가 등장할 수 있다.
내가 서양의 동화를 많이 읽지 않아서 이 작품들이 어떤 것을 패러디했는지 <햄릿> 하나만 생각할 수 있어 아쉬웠다. 서양 사람은 다 많이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재미있는 작가이고 혹시 몰라, 몇 번이나 다시 말하지만, 스타니스와프 렘이야말로 정말 외계인이었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