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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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계 어머니와 중국계 파나마인 아버지의 딸로 뉴욕에서 출생한 미국의 소설가, 단편소설 작가이자 에세이스트, 숱한 대학의 객원교수 기타 등등. 1951년 토끼띠 여사님은 눈치로 봐서 독신으로 평생 살고 있는 모양이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위키피디아에 가족 이야기가 없고, 작품 속에서도 주인공 시그리드 누네즈 역시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독신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지 않겠느냐 하는 것. 이 작품을 쓸 때 누네즈의 나이 예순아홉. 원래 제목은 <취약자들The Vulnerables>인데 우리나라 출판사 열린책들이 작가의 양해를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해 봄의 불확실성>이라고 바꾼 것 같다. 제목이 폼 나지? 책 속에서도 나온다. 우리말 제목은 버지니아 울프의 1937년 작품 <세월>의 첫 문장 “변덕스러운 봄이었다.”를 조금 바꿔서 가져왔다. 역자 해설에서 민승남은 이 문장을 “불확실한 봄이었다.”라고 번역했고, “취약자들”보다는 어감이 좋았는지 제목으로 뽑았다.

  소설책 읽으면서 책 제일 뒤에 몇 페이지 보탠 “역자 해설”을 먼저 읽는 독자는 몇 명 없는 거, 있기는 있겠지만 지극히 드물다는 내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지? 표지에 영어 단어 The Vulnerables가 쓰여 있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의학 전공자 말고 이과생 가운데 아는 사람들 몇 명이나 돼? 그렇다고 사전 찾아보기도 귀찮아 그냥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리말 제목 “봄의 불확실성”에 집중할 수밖에. 개뿔이나.

  아예 처음부터 The Vulnerables, 취약자들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훨씬 좋았을 듯. 그렇다고 별 셋짜리가 다섯 개로 올라가진 않겠지만.


  작품의 공간은 2020년 뉴욕. 화자 ‘나’의 이름은 시그리드 누네즈. 작가 본인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이름만 가져왔지만 픽션 인물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편하다. 하여간 화자 ‘나’가 2020년에는 예순아홉 살.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골통 대통령의 이름이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는 훗날 자기도 COVID-19에 걸렸지만, COVID 마저 트럼프 표 공갈포만 때리면 그깟 마스크와 거리두기 같은 하찮은 짓 없이도 알아서 꼬랑지 내리고 스르륵 사라질 줄 알았다. 기억 나시지? 우리나라도 이화여대 석좌교수 최재천이 TV에 나와서 COVID 박테리아는 생명체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핵산 덩어리일 뿐이라서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말한 적 있다. 물론 심각해지기 전이었던 초기 발병시기에 시민들이 과도한 공포에 휩쓸리지 말라는 취지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그래도 이후 마스크 공급과 거리두기, 감염자에 대한 적극 격리 등의 조치를 적극적으로 펼쳐 다른 나라에 비해서 양호하게 위기를 넘겼지만 미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월 참. 몇 년이나 지났다고 벌써 거의 생각나지 않네 그려. 하여간 이런 비상사태가 생기면 죽어나는 건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이다. 뉴욕에서도 고급 주택가나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유층들은 산 좋고 물 좋고 공기도 좋고 인적도 드문 2nd 혹은 3rd 하우스로 피난길에 올라, 고층 아파트에도 한 두 가구만을 위하여 정장차림의 제복을 입었지만 가난한 관리인, 주차요원 등 전원이 근무를 해야 했다. 책에 나온다. 뉴욕 다운타운에도 이제 한 발짝만 더 디디면 일흔 고개를 넘는 화자 ‘나’가 한가롭게 산보를 즐길 수 있었다고 하니 어떤 수준이었는지 딱 접수가 된다.

  시그리드 누네즈가 책에서 말하는 취약자들The Vulnerables의 범위 안에 빈곤층, 유색인이라기보다 비백인들도 포함하지만, 작가와 비슷한 처지인 나이 든 사람들한테 더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그것도 많이 배우고, 돈도 좀 있고, 작가이거나 아마추어 수준의 시인이거나, 출판인이거나, 그들의 자식 또는 배우자도 포함해서.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COVID-19가 창궐한 시절의 텅 빈 뉴욕 안에서 가난하고 늙은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받았는 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1부에서 취약자들은? 어린시절 뉴욕의 안전하지 않은 동네에 살던 화자 ‘나’를 포함한 여성들인 듯하다. 누네즈가 인용한 아니 에르노처럼 실명을 까는 대신 로즈, 릴리, 바이올렛 같은 소녀들. 이 가운데 릴리가 제일 먼저 결혼했고, 당연히 제일 먼저 출산했으며, 여기까지면 좋은데 제일 먼저 죽었다. 어렸을 적부터 꿈이 존 바에즈와 주디 콜린스의 뒤를 잇는 가수가 되는 거였을 만큼 목소리가 좋았지만 노래는 정말 못했다. 엄마 없이 자란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비구름 같은 태도를 지녔던 릴리. 엄마가 정말 없었던 건 아니고 주기적으로 정신병이 발병해 수시로 입원을 했으며, 집에 있더라도 범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심하게 자식을 방치했다. 그리하여 저절로 삐딱한 성격을 지녔다가 대학 시절에 자기보다 두 배는 더 나이가 든 남자와 지내며 성격도 좋아지고, 공부도 잘하게 되고, 좋은 남자 만나 건강한 아이 낳고 잘 살다가 먼저 죽은 거다. 자기 가족과 평생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 다만 남편 한 명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해 숱한 남자와 관계를 맺긴 했어도.

  ‘나’는 로즈, 바이올렛 또 누구와 릴리의 장례식 다음날 식당에 모여 앉아 당연하게 페미니즘에 입각한 대화를 이어간다. 나이든 여자들의 페미니즘. 흥미롭다. 출판사 편집인으로 일하는 바이올렛이 말한다.

  “위험한 남자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문학의 중심이지. 하지만 지금처럼 남자들을 거의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멍청하며 폭력적인 존재로 가차 없이 집중 조명한 시대는 없었어. 과거엔 남자들이 여성 혐오주의자이면서도 훌륭하고 심지어 용감하기까지 할 수도 있었지. (중략) 여자들만 남자를 나쁘게 그리는 것도 아냐. 내가 읽은 대부분의 남성 작가들 원고에서도, 그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지. 백인 남성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노골적인 괴물이 아니더라도 똥 덩어리거나, 실수투성이거나, 패배자거나 비열한이지. 그리고 이제 남성 작가들은 여성 인물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매진하고 있어.” (p.66~67)

  백인 남성만? 이들의 논의는 특히 성직자 같은 특별한 도덕을 요구하는 계급의 남자들의 경우, 신부나 목사가 어린 아이와 함께 등장할 때 작품을 읽으면서 저절로 긴장하게 된다고 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60대 후반, 이제 세월을 살 만큼은 산 중년의 여사님들은 남자들 역시 여자와는 다른 방법으로 삶을 만들고 유지시키기 위해 애쓴다는 점에 동의하고 공감한다. 나 참, 살다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작가도 다 보네 그려. 별 일이네….


  하지만 이야기가 호화 맨션에 혼자 남은 ‘유레카’라는 이름의 금강앵무를 돌보는 일도 접어들면서 맥이 빠지기 시작한다. 바이러스가 침공한 뉴욕에서 누가 보나 취약자들의 일원이 아닌 ‘나’와 집에 세 채 씩이나 있는 부잣집 외동 아드님이 까다롭고, 지능 엄청 높고, 살기도 오래 산다는 금강앵무 한 마리를 돌보기 위하여 한 집에 살게 되고, 처음엔 물과 기름처럼 어색했다가 점점 의기투합해 서로 뜻을 같이 하는 큰엄마-막내조카 정도의 사이로 개선되는 이야기.

  그래, 그래. 누네즈가 말했듯이 이제 소설에서는 스토리가 증발하고 있어서, 이야기의 일관성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자서전이기도 하고 픽션이기도 한, 하고 싶은 말을 두서없이 하는 것도 엄연히 문학작품이며 소설이다.

  그렇지만 한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다양한 정보를 제시해야지. 때마침 어제 내가 브레이브스가 쓴 <그리스 신화>를 읽어 딱 말할 수 있는데:

  “격노한 제우스는 ‘아름다운 재앙’ 판도라를 창조해 낸다. 여러 신들이 부여한 매력을 지닌 판도라는 남자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로부터 여자라는 종족이 시작되며, 악을 행하는 본성을 지닌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악이다.”

  아닌데요. 제우스 이전의 그리스가 애초부터 알뜰하게 가모장제 사회였다고 신화학자이자 작가인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딱 부러지게 얘기했는데요.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사실 아무래도 별 상관없긴 하지만.

  하여간 재미있게 써서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다 2부로 넘어가는 순간 갑자기 팍, 무드 상실, 누네즈가 하도 자기 입만 털어 흥미가 뚝 떨어져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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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7 15: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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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7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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