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1 - 신의 시대 그리스 신화 1
로버트 그레이브스 지음, 안우현 옮김, 김진성 감수 / 알렙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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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것은 주책 심하고 질투도 많은 그리스의 숱한 신들에 관해 새삼스러운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로버트 그레이브스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레이브스Graves, 이 음산한 이름을 가진 작가의 작품을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꼴랑 하나만 읽었음에도 독특한 인물을 독특한 시선으로 조망한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한 방에 반해버렸다. 그때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후 그레이브스의 다른 책을 구할 수 없어 아예 잊고 살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옌이 깊게 영향을 받은 선배 작가로 윌리엄 포크너와 더불어 로버트 그레이브스를 거론하는 것에 기꺼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이를 검색해보니 2년 전에 <그리스 신화>를, 올해에 <호메로스의 딸>을 번역 출판했다는 걸 알고 득달같이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이제 막 첫 권 <그리스 신화1 – 신의 시대>를 끝마쳤다. <그리스 신화2 – 영웅의 시대>와 <호메로스의 딸>은 이달 말이나 다음 달이 되어야 읽을 것 같다.

  나는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직업을 그냥 작가로만 알았다. 알고 보니 시인, (역사)소설가, 비평가, 고전학자, 신화학자를 겸했다. 살면서 장교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고 전쟁 말기에는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독감에 걸려 스틱스 강변까지 다녀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면서도 쉬지 않고 150편에 육박하는 집필활동을 펼쳤다. 같은 그리스 신화를 썼다고 하더라도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쓴 소설가의 그리스 신화는 당연히 <…클라우디우스>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리스 신화1 – 신의 시대>는 소설가가 아니라 신화학자 로버트 그레이브스가 쓴 신화 해설서이다.

  책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문명을 만든 그리스 사람들이 에게해와 섬에 도착하기 전부터 살고 있던 신석기 시대 선주민을 일컫는 펠레스고이족族의 창조 신화부터, 올륌포스 신들의 탄생과 이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 신과 인간의 교류를 거쳐 크레테의 왕 미노스와 그의 일가, 그리고 아테나이의 왕 테세우스까지 다룬다. 구성은 먼저 해당 신화를 소개하고, 이 신화가 등장하는 고전 작품 등의 출처, 이어서 진지한 신화학자로서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신화 해석으로 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이런 구성이다. 신화의 내용은 일목요연하게 주제별로 나열되어 있다. 사실 이 신화 가운데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거의 없다. 다만 꽉 짜인 규격 속에서 그리스 신화를 체계적으로 읽을 수 있는 첫 독서였다는 것이지 유럽과 아메리카 문학, 음악, 미술 작품을 읽고, 듣고, 보며 조각조각 알게 된 내용이었다. 그런 작품을 겪으며 호기심을 느껴 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거의) 다 한 번 이상은 자세하게 읽어본 내용들. 다만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이 새로웠다.


  예컨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기러기로 몸을 바꾸어 도망가는 네메시스를 겁간하여 두 개의 알을 낳아 그것을 레다가 가져다 부화시켰다거나, 다른 버전으로는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직접 레다와 어울려 알을 낳았는데 거기서 헬레네, 카스토르, 폴뤼데우케스 그리고 버전에 따라 클뤼타임네스트라가 나왔다는 이야기. 그레이브스는 제우스 등 올륌포스에서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먹고 마시는 신들은 헬레니즘 문명을 만든 그리스인들,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일군 헬레네스를 상징한다. 당시 그리스는 씨족, 부족, 그리고 후에 도시국가 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신화 속에 숱하게 등장하는 신들에 의한 겁간이 헬레네스들이 다른 씨족, 부족, 도시국가를 점령한 것을 신화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산들에 의하여 강제로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거의 빠짐없이 세 명의 후손을 생산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초기 그리스는 가모장제 사회였단다. 그레이브스가 자주 인용하는 작품으로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명저 <황금가지>가 있다. <황금가지>의 부족장/왕들은 대개 제사장을 겸했으며 특히 비와 바람 등의 천기를 관장하는데 이들의 능력이 한계를 보이면 부족장/왕을 살해하고 후계자로 자리를 잇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레이브스는 그리스 시대도 마찬가지였다고 단정한다. 그러면 그리스의 왕들은 얼마나 오래 왕좌에 앉을 수 있었을까? 즉 시간을 측정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태양력을 한 단위로 하려면 단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365일과 1/4일이 필요하다. 반면에 달의 공전을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으로 측정하려면 30일이면 충분하다. 훨씬 쉽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 시대에는 달이 차오르는 시기(처녀)와 꽉 찬 만월 시기(뮤즈), 그리고 지는 시기(노파)로 구분했다 하며, 배란에 따른 여성 몸의 변화와 일치하는 등을 근거로 가모장제가 상당한 기간동안 지켜져 왔다고 주장한다. 문명이 조금 발달함에 따라 열두번과 열세번 달이 변하는 사이에 1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을 발견했고, 그래서 열세번의 달이 변하면 왕을 살해하는 일종의 제의식을 벌일 수 있었다고.

  이렇게 유지하다가 왕의 권력이 점점 강화되면서 소위 큰 1년이 등장한다. 태음력과 태양력이 맞는 시기로 약 100번의 월이 지나는 기간, 8년에서 9년을 큰 1년이라 하여 왕의 임기로 삼았다가, 그것도 나중에는 왕이 직접 죽는 것이 아니라 미소년을 골라 딱 하루 동안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해서 다음날 진짜 왕 대신 제물로 죽음을 맞게 하고 진짜 왕은 다시 큰 1년 동안 새로운 임기를 맞았다. 이상한 방식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수긍이 간다. 한 사람에 의한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리스 사람들. 일찍이 도편추방이라 해서 인기투표를 해 1등을 먹은 정치가를 아예 도시에서 추방해 버리기도 한 이들인데 한 왕을 오래 자리에 두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리스 신화, 즉 그리스 역사에 기반한 신화가 <황금가지>식 인류학과 매우 유사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 신화1 – 신의 시대>가 다루는 시기가 기원전 3천년부터로 <황금가지>의 중요한 무대인 신∙구석기 수준의 미문명 지역과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고대 이전, 그러니까 태고의 그리스 종교에는 남자 신이나 남자 사제는 없었고 오직 우주적 여신과 여사제만 있었단다. 여성이 단연 지배적인 성이었으며 남성은 두려움에 떠는 희생자에 불과 했단다. 아직 생명의 기원에 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나운 서풍이나 북풍에 엉덩이가 노출되면, 콩을 먹거나 벌레를 삼키면, 심지어 제우스와 다나에의 교합에서 보듯이 새는 지붕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물에 아랫도리가 닿기만 해도 아이가 생기는 줄 알았기에 전쟁이나 희생을 제외하면 남성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족보는 모계를 기준으로 했고, 아버지 또는 남근을 나타내는 뱀은, 훗날 신성을 가진 동물로 격상하기는 하지만 죽은 이의 화신으로 여겼다. 이 가운데 ‘에우뤼노메’는 달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여신에 대한 호칭으로 수메르 식으로 ‘이아우’였으며 나중에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가 천지 창조자인 ‘여호와’가 되었단다. 즉 기독교의 여호와도 남성신보다 여신에 더 가까웠다는 그레이브스의 주장. 1955년에 영국인이 이렇게 발언할 때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리아드네, 미노스의 미궁에서 소대가리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때려 죽인 테세우스를 도와 미궁에서 탈출시키고 함께 낙소스 섬에 도착했으나 테세우스한테 바람맞고 디오뉘소스한테 시집간 아리아드네의 뒷 이야기. 포도주의 신이자 광란의 축제를 즐기는 디오뉘소스의 아내인 아리아드네는 크레테의 달의 여신으로 추앙받으며 포도알처럼 줄줄이 오에노피온, 토아스, 스타퓔로스, 타우로풀로스, 라트로미스, 에우안테스 등을 낳아, 키오스 섬, 렘노스 섬, 트라케 반도 등지에 헬라스 부족을 퍼뜨리게 하고 자신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목 매달아 죽었다. 뭐 인생이 다 그렇지. 특히 신화 속이라면 더.

  신석기 시대 수준의 문명에서 청동기까지 왔고, 아직 철기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쇠를 사용해 특히 왕가의 무기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에 철을 채취하지는 못했다. 어디서 구했느냐 하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석 덩어리. 당연히 무지하게 귀한 것이기도 했다. 가공하지 않은 철광석 덩어리가 크레테 섬 고대 도시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태라코타 여신상, 조개껍데기, 제물을 담는 그릇 옆에서 발견되었단다. 초기 이집트 철은 모두 운석에서 뽑은 것이라서 니켈 함량이 높아 거의 녹이 슬지도 않았다. 여기까지는 알겠는데 이어서 난데없이 “켈미스가 레아를 모욕한 일로 인해 가운뎃손가락에는 디기타 임푸디카digita impudica라는 이름이 붙었다.”라는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왔을까? 레아가 대장장이의 후원자 여신이라서? 근데 가공하지 않은 철광석 덩어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하여간 역자 안우현은 각주를 달아 친절하게 “현대의 가운뎃손가락 욕은 그 연원이 그리스까지 올라가는 셈이다.”라고 설명해주었다. 흠. 그렇군.

  소개한 것 말고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들어 있다. 533쪽에는 보름달 아래 물개 가죽을 뒤집어쓴 여자들이 가죽을 벗고 나와서 알몸으로 모래사장에서 춤을 추는데, 한 영웅이 바위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물개 가죽 하나를 숨겨 이것의 주인인 여자를 아내로 삼고 아이도 낳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식 셋을 나을 때까지 참았어야 했건만 둘을 나았을 때 부부싸움을 거하게 하던 중, 여자가 물개 가죽을 우연히 발견해 얼른 뒤집어쓰더니 헤엄쳐 달아나 버렸다는 이야기.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과 거의 똑같다.


  하나만 더 소개하자.

  쌍둥이 아들인 아가메데스와 트로포니오스는 아폴론이 델포이 자기 신전에 몸소 놓은 주춧돌 위에 돌로 문지방을 쌓았다. 아폴론이 기특하게 여겨 신탁을 내렸다.

  “엿새 동안 즐겁게 살고, 세상 모든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거라. 그리고 일곱 번째 날이 되면 너희 들 심장이 바라는 것을 얻을 것이다.”

  일곱 번째 날, 둘은 침대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단다.

  “신들이 사랑하는 이들은 요절한다.”

  잘 죽는 거, 웰 다이잉well dying은 지극한 복이다. 그리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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