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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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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서울에서 나, 인천외국어고등학교 다니다가 때려 치우고 검정고시로 고졸학력 취득한 다음에 예술종합학교에서 문예창작으로 공부했다. 2005년에 창비 신인상을 통해 소설가 말석에 자기 방석을 깔았으니 이때 나이 약관 스물한 살. 떡잎부터 알아보는 빛나는 재능이었다는 말이지. 예전에야 고등학교 다니다가 수업시간에 얻어 터지면서 소설 끼적인 것이 신춘문예 당선하고 뭐 그런 일이 있었지 21세기 들어오면서는 이런 일이 굉장히 드문 것 같다. 하긴 전에도 무척 드물어서 이런 작가가 등장하면 신문에도 나오고 그랬겠다. 그래,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지 그동안 뭐 중대가리에 뿔날 일 있었겠어?
김사과. 이름 들어본 건 오래 전이다. 당연히 본명은 아닐 터. 이이는 예명으로 하필이면 사과를 택했을까? 어떤 사과일까? 아담의 목에 걸린 사과? 트로이의 파리스한테 건넨 아프로디테의 사과? 아니면 하필이면 뉴턴이 낮잠에서 깰 때 바로 앞에 떨어진 사과? 홍옥? 국광? 부사? 골드? 루비에스? 아니다. 어쩌면 왕실에 들어온 두번째 왕비가 전처소생인 공주에게 내민 독약 묻힌 사과일지도 모른다. 앗, 말하고 보니까 독 바른 사과에 더 가까울 거 같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맛있니? 그래서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사람 하나 낼름 잡아먹는 이야기 전문가. 사람을 먹는 행위. 이거, 섹스에 관한 은유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사람의 피부와 지방과 근육과 혈액을 요리해서 입에 넣고 씹으며 차례로 조금씩 혀로 이동시켜 식도 쪽으로 밀어 삼키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세상에. 처음 읽는 김사과의 작품인데 처음부터 이러시면 우짜라고? 하긴 이름이 새큼해서 언젠가는 읽었겠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시면 끝날까지 김사과를 읽지 않고 조신할 수 있었을 텐데.
작품의 주인공 정지용은 주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보드라운 살갗을 만질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아이고, 그럼. 말하면 뭐해. 세상사람 다 같은 기분이지. 하지만 아니다. 나는 틀림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보드라운 살갗을 만지면 기분 좋다. 그냥 좋다. 이유가 있을 필요도 없다. 근데 정지용은 그것도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찢어 놓는 데 아주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카니발리즘에 환장을 한 주인공의 이름이 정지용. 나는 순간 휘까닥 돌았다.
정지용? 鄭芝溶?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전집1』 1988.7. 증보판. 민음사 p.46~47)
이런 노래를 부른 정지용. 주인공 이름을 지어도 참.
근데 정지용의 아빠는 또 정대철. 이이 이름도 입에 익숙하지? 직업은 오손그룹 회장이다. 1980년대 중반에 오손그룹 창업자이자 정지용의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놓는 바람에 크고 작은 아버지, 고모들과 질퍽하게 그룹 계승전쟁을 치뤄 최종적으로 승리한 정대철 씨는, 그냥 신비주의적 도라이 회장이라고 생각하면 맞다. 계승전쟁 이후 정대철은 점점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존재로 변신한 직후 소박한 교육자 집안의 이십대 중반 참한 처녀 은미라와 14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재혼했다. 정대철의 전처는 호주로 이민을 갔다, 모로코 부자와 재혼했다, 하는 불확실한 소문만 창궐했다.
정지용은 소련 붕괴를 이틀 앞둔 199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버지 정대철이 오손그룹 신입 남자 직원과 바람이 나 열흘째 소식이 두절된 가운데 엄마와 이모, 외할머니, 산부인과 여의사, 여자 간호사들, 온통 여자로 둘러 싸인 포스트 모던한 세상 밖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아들 정지용을 출산한 교육자 집안의 참한 규수 은미라는 이후 남편처럼 사람들이 점점 두려워하는 존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나라의 상류 부르주아 계층을 지배하는 장치로 삼은 것은 매달 첫째 주 금요일 저녁 집 안뜰에서 연 자선 파티였다. 인기영화를 테마로 해당 영화에 걸맞은 상상 속의 부르주아로 변신, 계산된 인공적인 태도로 관계를 맺는 허위의 인종들.
어떠셔? 이 정도까지는 즐겁게 읽었다. 엽기발랄한 상상력과 이에 맞춤한 문장들이 착착 감기는 맛이 상당했다. 등장인물의 성격도 적절하게 파국적이다. 신입 남자사원과 바람이 나서 열흘 넘게 세상에서 사라진 거대 그룹회사의 총수 정대철이 정말 호모섹슈얼? 만일 누가 정대철에게 직접 묻는다면 아마 그냥 껄껄 웃고 말 걸?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에서 뭐라고 하건 진실은 정대철의 입 밖으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오손그룹은 이렇게 사이코패스 성향이 조금은 있는 회장의 드라이브로 무섭다는 1990년대 IMF의 고공폭격도 무사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모든 회사는 위기를 한 번은 겪는 법. 2002년, 오손그룹이 부도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들고, 당연히 주가가 곤두박질치면서 그룹이 급격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정확히 2005년에 그룹의 회장부인 은미라가 자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인은 심장마비. 은미라의 시신은 이상하게도 5년 동안 왕래가 전혀 없던 여동생이 발견했다.
엄마가 집에서 죽었을 때 주인공 정지용은 스위스 로잔의 숲 속에 있는 무진장 비싼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지용은 기숙사에서 탈출하지만 지가 가면 어디까지 가느냐고, 달랑 잡혀와 한국으로 송환해 버렸다. 이후 정지용은 강남의 공립 중학교를 다니다가 당연히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를 해서 억지로 검정고시를 마친 후 LA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를 거쳐 뉴욕대를, 전혀 학업적 성취의욕 없이 돈으로 강사를 구해 리포트를 대리로 작성시켜가며 억지로 졸업을 하기는 한다. 이럭저럭 뉴욕에서 10년 정도 지내는 동안 오손그룹은 기적적으로 생존하더니 제2의 성공시대를 열고 있었다. 이제 수출 중심의 제조업을 때려치우고 교육, 부동산, 추자 중심의 서비스업 회사로 거듭난 거였다.
정회장은 미국의 사설 감옥, 유럽의 축구 리그, 그리고 아이비리그의 교육 산업을 깊게 연구해 이 모델을 사람에게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뉴욕 월가 직장인의 수학실력, 죄수의 야만성, 축구 선수의 체력을 갖춘 인간을 생산하여 세심하게 몸값을 매기고, 부풀리고, 다시 깎고, 또다시 부풀리는 무한경쟁의 인간시장을 만든다는 원대한 계획. 21세기는 진정한 인재 싸움의 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정회장은 L시와 손을 잡고 산업공단 부지 전부를 얻어 아시아신청년인재양성 센터를 건립하고 주위에 뉴타운을 개발하는데, 가장 중요한 거주 건물을 짓고 이름을 “레종드레브”라 했다.
아들 정지용이 귀국하고 정대철 회장은 아들을 결혼시킨다. 상대는 교수 부모를 둔 역시 20대 처녀 최영주. 이젠 21세기를 맞아 지용의 엄마 은미라처럼 육체적 처녀라는 뜻과 같은 의미는 아니고 그저 젊은 여성을 그렇게 이를뿐이다. 최영주는 사랑은커녕 몇 번 만나지도 않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헷갈려 하고 있는데, 유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엄마의 적극적 조언으로 그래, 결혼해버리고 말지 뭐. 근사한 결혼식으로 하고,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와 아쉽게도 서울이 아니라 L시에 있는 아시아신청년인재양성센터 부지의 화려한 고층 주거 건물 레종드레브의 꼭대기 통합층 2백평 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린다.
이때부터 나는 책읽기가 지겨워졌다. 신혼부부가 하는 짓은 뭐? 당신이 생각하는 거 아니다. 이들은 서로 극존칭 비슷한 화법을 구사하며, 세상에서 할 일이 가장 없는 족속이며, 결혼 조건은 둘 사이에 아이 하나는 만들어야 하는 것. 그거 말고 뭐가 있을까? 뭐 별로 없다. 서로 사랑할 필요도 없다. 살면서 정이 들고, 그게 사랑으로 바뀌면 좋은 거고, 아니라도 뭐 그렇게 아쉬울 거 없는 사이. 그러니 할 거라고는 아내는 쇼핑, 남편은 바람. 이렇게 정식 코스를 밟아가는 정지용 앞에는 같은 아파트의 다섯 평짜리 단칸방, 그래도 월세가 150만원에 달하는 전망 좋은 방에 사는 독신녀이자 VJ 이하니. 이하니 자신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고급스럽고 세련된 복장으로 차려 입고 건물 로비에 나섰건만, 정지용의 눈에는 어떻게 그리도 촌스러운 매치로 괜찮은 몸매를 둘렀는지, 한 눈에 봐도 사모님이 입다가 준 옷을 걸치고 외출한 가정부였다. 그런데 이 촌스러움에 끌리는 정지용.
부르주아가 아주 가난하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자신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인물에게 호감을 느끼면? 당연하지, 선물하고, 생전 먹어보지 못한 비싼 밥을 사주고, 드럽게 무거운 병에 든 겁나게 비싼 위스키를 퍼먹이고, 한 번 하고, 정지용 정도의 최고급 부르주아가 이하나라는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면 다시 보고싶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는 서울시 강남구 도산공원 앞에 널찍한 아파트를 이하나의 이름으로 전세 얻어주고, 자신의 신용카드 한 장을 주어 기쁨이 넘쳐나는 사치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고, 암만해도 투자에 비해 효용이 너무 작다고 생각되는 날이 오면, 먹어 버린다. 정말? 정말 카니발리즘, 먹어 버린다고? 에이, 내가 그걸 어떻게 확정해. 읽어 보셔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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