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영혼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9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정찬. 한국전쟁 휴전서류에 서명도 하지 않았던 1953년,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그나마 모든 전쟁물자와 구호물품이 쏟아져 들어오던 항구도시 부산에서 출생해 부산고등학교, 서울대 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해 월간지 기자로 활동하면서 소설을 쓴다. 1983년에 등단한 후 계속 정진해 1992년 소설집 《완전한 영혼》을 내니 그의 나이 서른아홉.

  우여곡절의 시기를 살았다. 유소년기 시절의 부패하고 무능했던 이승만을 거쳐 1992년까지 한 시절도 빠짐없이 정치군인이 지배하던 오오 대한민국, 우리 대한민국을 관통했다. 꼬박 40년을. 대학시절에는 유신반대를 외치며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도피하고, 검거되어 고문 끝에 동지들의 이름과 숨은 곳을 발설한 후 제법 길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을 것이고, 작가보다 선배들의 경우에 1970년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에 큰 빚을 진 것처럼, 정찬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 피해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산다는 부채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시절 이후 30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정치군인에 의한 군부독재 속에서 호흡하던 작가는 월간 “신동아”를 발간하는 신문사 기자로 자신의 젊은 시절에 독재정권의 정보, 수사기관이 민간인 운동가들을 어떻게 탄압하고 고문했는지, 이에 대한 넓고 자세한 자료를 확보하고 열람하는 데 유리했을 것이다.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소년이었다는 배고픔의 기억과, 부패한 사회 속에서도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경제규모가 점점 천민자본주의를 향해 맹렬하게 발진하는 모습도 목격하였을 것이니, 다른 건 몰라도, 고생은 했겠지만, 작가로의 소위 “문학적 재산”은 다른 세대보다 제법 빵빵했으리라.


  이 시대를 산 사람들은 비교적 편했다. 무조건 정부를 비판하면 곧바로 정의를 편드는 쪽에 선 것 같은 기분을 가질 수 있었으니. 사실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긴급조치 9호에 의하여 정부나 대통령을 비난하는 말을 딱 한 번 했다는 죄목으로 무거운 벌을 받아 감옥에 갇힐 수 있었으니. 몇 번 말한 적 있듯이 나 또한 교사 한 명이 수업시간에 붙들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런 세월이었다.

  정찬 앞에 드디어 변화의 시기가 왔다. 1987년 선거. 시민저항으로 얻은 전두환 정권의 백기는 6.29 선언으로 이어져 오랜 세월을 거쳐 드디어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 기회가 온 것. 기억난다. 나는 선거권이 있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투표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을 때까지 모든 선거를 보이콧하고 있었던 거다. 정찬처럼 나 역시 1987년 선거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유력 후보는 여당에서 노태우 후보, 갈라진 야당에서 김대중, 김영삼 후보. 나는 절망했다. 둘 중에 한 명만 나와라, 누가 됐든 찍겠다, 했는데 둘 다 나왔다. 그래서 이번 선거 역시 또다시 보이콧해버리고 말았다. 이건 내 경우이고 정찬은 당연한 선거 결과에 깊이 절망했던 거 같다.

  그래서 이이의 작품 속에는 민주화 운동 당시 정권에 의해 당한 고문, 고문이 인간성에 얼마나 심각한 상흔을 남기는지에 관한 이야기, 광주민주운동 당시 살아남은 피해자의 삶과, 관동지진 당시 현장에 있었던 1909년생 소년이 무정부주의자에서 일본 고문 기술자의 유일한 제자가 되는 과정과 이후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을 썼다.

  그리하여 인상깊었던 작품은 미친 20세기를 관통해 지나온 늙고 은퇴한 고문기술자가 그의 일본인 고문 스승의 죽음을 맞아 과거를 회상하고 장례식에 참가하고, 다시 돌아와 소회를 밝히는 중편소설 <얼음의 집>이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얼음의 집>에 비하면 소품이랄 수 있는 <패랭이 꽃>.

  <패랭이 꽃>에서는 어린 아들과 용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을 거쳐 당시 우리나라 유일의 협궤열차인 수인선을 타고 가다가 다시 버스로 바닷길을 달려 갈 수 있었던 오이도로 향하는 이야기이다.

  수인선 타 보셨나? 수원에서 아침 열차를 타면 왼쪽으로 끝도 없는 염전과 작은 포구가 줄지어 늘어서고, 생물 생선과 해산물, 해초 등이 든 세피아 색 다라를 들고 멀지 않은 시장으로 향하는 아주머니들. 어전, 야목, 고잔, 사리, 군자역을 지나 한 시간 너머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역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인천 송도역에 닿는다. 40년도 넘었다. 멀리 놀러 갔다가 후배들을 데리고 수원에 들러 이름을 잊은 극장에서 심야영화, 실비아 크리스텔이 타이틀 롤을 한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단체관람한 후 수원역으로 걸어가 해장국 한 그릇씩 먹인 다음 수인선 경험도 시켜주던 나. 이만하면 괜찮은 휴학생 선배였던 것도 같은데….

  책을 읽는 것도 책 속에 독자의 경험이 들어 있으면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패랭이 꽃>이 제일 좋았다. 하지만 작가의 기억과 기대와는 달리 이미 다 개발해 갯가라고 해도 건조한 먼지와 플라스틱 폐품과 문짝 떨어진 쓰레기 냉장고만 나뒹구는 오이도. 그리고 보태지는 화자 ‘나’의 어린 시절 기억. 그 속에 단 하나 남은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는 아마도 전후 산으로 도피한 파르티잔. 살면서 계속된 경찰의 방문과, 누에 물레를 돌려 생활을 꾸리던 어머니, 그리고 기타 등등.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