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
내 일찍이 옥타비아 버틀러 <킨>의 유명세를 알았건만 이제야 이 책을 읽은 것은, 책방 광고문에 과학소설, SF라는 문구가 자꾸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SF 장르를 무조건 경원하는 건 아니다, 라고 믿는다. 읽기는 읽는데 즐기지 않는 독자의 수준으로 말하자면 브래드버리, 스트루가츠키 형제, 스타니스와프 렘 등 지구 대표선수들의 작품은 즐겁게 읽었고, 지금도 열심히 읽으려고 (나름대로) 애쓴다. 근데 <킨>은 독자들이 워낙 열광을 해서 그랬는지 영 손에 잡히지는 않더라는 것. 그리하여 도서관의 관심도서 목록에만 올려진 채 몇 년을 기다리다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 5백 페이지를 훌쩍 넘어가는 장편소설임에도 손에 잡자마자 후딱 읽히는 흡인력이 있었으니, 이야기가 그만큼 재미있고, 책의 편집 역시 눈이 피곤하지 않게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1947년에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구두닦이 아버지와 백인가정 가정부 사이에서 무한정 수줍음을 타는 외동딸로 태어났다. 초년에 빈곤했지만 말년에 작가로 팔자가 피는 사람들의 소년시절 공통점을 그대로 빼다 박아서, 옥타비아 역시 어려서부터 시립 도서관을 열심히 들락거리며 책읽기에 몰두했는데, 이때부터 SF 작품에 집중했던 모양이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교 마지막 2년과 이후 2년을 보태 4년 학력으로 셈해주는 패서디나 시립 단과대학을 마쳐 준학사 학위를 얻었다. 옥타비아가 열두 살 때부터 과부생활을 유지하던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비서로 일했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있어서, 아마도 속기를 공부했었던 것 같다. 작품 속 주인공 다나도 패서디나에서 살았고 훗날 비서가 되기 위하여 타자와 속기를 배운 적이 있어서 나중에 잘 써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여간 옥타비아 버틀러도, 작품 속 다나도 여러가지 잡일을 하면서 창작에 힘을 써 드디어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린다. 다만 <킨>의 다나는 어려서 부모가 일찍 죽어 자식이 없는 외삼촌의 집에 살면서 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백인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거의 인연을 끝내는 게 차이가 난다.
주인공 에드나, 애칭으로 다나가 1976년 6월 9일, 스물여섯 번째 생일에 사건이 일어났다.
다나는 주로 인력소개소를 통해 부품가게나 창고 같은 곳에서 재고 조사 등의 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며 적은 돈을 벌어 호구지책으로 삼으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일을 하다 우연히 백인 남자 케빈과 알고 지내다가, 서로 문학에 뜻이 있음을 알고 점점 친해지기 시작, 급기야 가족 또는 친척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급속결혼의 메카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서에 인감도장을 찍었다. 케빈의 가족이라고는 누나 한 명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누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자학하는 흑인 소녀와 뗄 수 없는 짝궁으로 지냈으나 키 작고 나이 많고 쪼잔한 매형의 영향 때문인지 동생이 흑인 여성과 혼인한다는 얘기를 듣고 정 그렇다면 의절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부모처럼 의지하고 살던 외삼촌이, 몇 채의 작은 아파트를 소유한 나름대로 좀 사는 남자였는데, 반대할 수는 없지만 정말 백인 남자와 결혼하면 자기 재산을 몽땅 침례 교회에 기부하고 죽겠다고 했다. 이런 편견과 어려움을 뚫고 결혼에 이르렀으니 둘이 정말 사랑했던 것 맞겠지? 맞다. 적어도 이 소설의 에필로그가 끝날 때까지는.
둘은 각자의 아파트에서 살았었지만 이제 혼인을 했으니 살림을 합쳐야 할 판. 그래서 작가 지망생 답게 산처럼 쌓여 있던 책을 어느정도 정리한 다음에 케빈의 아파트로 다나가 들어간 것이 1976년 6월 8일. 이제 번듯하게 합법적 부부로서 한 지붕 살림을 시작한 다음 날, 다나가 싸가지고 온 책을 책꽂이에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오더니 휘리릭, 책도, 책꽂이도, 집도, 심지어 케빈도 단방에 사라져버리고 다나 혼자 숲 가장자리 녹지로 순간이동을 해버린 거였다.
다나가 정신을 차리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아이 하나가 강 한가운데 빠져 열심히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어떻게 보이는 줄 아시나? 마치 수영을 할 줄 아는듯 전력을 다해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이러는 바람에 사람 많은 수영장에서도 아이가 물에 빠져 버둥거려도 숱한 어른들은 그걸 보면서 어린 아이가 헤엄을 치고 있다고 생각해 그냥 내버려두다가 죽게 만드는 거다. 다나가 보기에 아이는 벌써 이런 단계를 넘어서 거의 움직임을 멈춘 상태. 수영을 할 줄 아는 다나는 얼른 강으로 뛰어들어가 엎어진 아이의 고개를 물 밖으로 향하게 하고 강둑으로 끌고 나온다. 강둑에서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정색 긴 드레스를 입은 빨간 머리의 예쁘게 생긴 아이 엄마가 온몸을 떨며 어쩔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터. 아이를 내오니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채 숨도 쉬지 않고 맥박도 이미 멈춘 상태였다. 다나는 1970년대에 학교에서 배운 구급법인 인공호흡을 하기 위해 빨간 머리 아이의 입에 자기 입을 대고 숨을 훅, 불어넣었다. 와중에 이 모습을 본 작은 체구의 아이 엄마는 남부 말투로 다나한테 뭐라 욕을 하는 거 같았는데, 다나는 대꾸할 새도 없이 연신 인공호흡을 계속할 뿐이었다. 지성이면 감천? 빨간 머리 아이가 드디어 숨을 훅 내쉬고, 울컥울컥 물을 토하더니 흐릿하게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아이 엄마는 뭔가에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이 때 다나는 관자놀이에 찬 금속의 감촉이 닿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큰 키에 마른 체격의 남자가 자기 머리통에 은빛 나는 길고 무서운 총을 겨누고 있었던 거였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나타나 총을 들이대는 순간, 다나는 곧 자신이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본능적 상태에 이르러 몸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풍풍 분비되고, 그러자마자 다나는 이 장신의 남자와 빨간 머리 아이와 엄마의 눈 앞에서 갑자기 훅, 사라져 버리고 다시 1976년, 케빈의 아파트, 책장과 책 앞으로 다시 순간이동을 했던 거였다.
이런 플롯이다. 같은 구성이니 스토리를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만 하자.
이후 다나는 1976년 6월 9일 저녁에 두번째 순간이동을 하는데, 빨간 머리 아이는 빨간 머리 소년으로 성장한 상태였고, 이 때는 서기 1815년이었으며, 화딱지가 나서 마구간에 불을 싸지른 전력이 있는 소년이 이번엔 손에 불붙은 나무 막대로 방 창문 커튼에 불을 붙여 조만간 타 죽으려는 순간이었다. 즉 소년이 죽을 위험에 처하면 다나가 1976년에서 19세기 초로 순간이동 뿐만 아니라 시간이동까지 하는 것인데 이건 예쁘게 생긴 빨간 머리 소년의 의지에 의해서도, 다나의 의지에 의해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차원을 넘어서는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빨간 머리 소년 이름이 예쁘장하게 생긴 것하고는 다르게 ‘루퍼스.’ 이름이 매우 불량하다. 큰 악마 루시퍼와 하여간 비슷하다. 그래서 위험에 빠지면 사정 불문하고 20세기 후반에 사는 다나를 확 끌어당기는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고. 아이가 사는 곳이 메릴랜드의 와일린 농장이란다. 아빠는 톰 와일린. 자신은 루퍼스. 흑인 소녀이지만 노예가 아닌 자유민 앨리스의 친구. 당연히 19세기 초의 백인 남자 답게 지금이야 친구지만 사춘기 넘어서 부랄 굵어지면 그때도 친구겠어 어디?
다나의 머리를 확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다. 헤이거 와일린 브레이크. 1831년에 태어나 1880년에 졸한 다나의 오랜 할머니. 이 할머니가 작성하기 시작해 나무 상자에 대를 이어 써내려간 일종의 족보에 의하면 루퍼스 와일린과 앨리스 그린우드가 결혼해 헤이거 와일린이 출생했다는 내용. 그러면 빨간 머리 소년 루퍼스가 다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사고뭉치 꼬마가 살아남아 다나의 집안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을 만하면 다나를 부르고, 또 죽을 만하면 다나를 부르는 거다. 다나와 한 번은 백인 남편 케빈도 이 차원을 넘어 여행을 해 케빈은 무려 5년 동안 있기도 하건만, 실제 1976년의 시간은 며칠 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대가 19세기 초반의 미국. 게다가 노예제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메릴랜드가 무대이니 당연히 백인에 의한 흑인 노예에 대한 온갖 악랄한 학대가 등장한다. 하지만 독자는 차원여행은 이미 클리셰의 범주 안에 들어갔고, 노예제 고발도 익숙하다. 이제는 오히려 아프리칸 미국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아시아 인에 대한 공격과 차별을 거론하는 시대가 됐으니 만시지탄이기도 하고. 그래서 누군가 내게 이 책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① 재미있다, ② 분량과 관계없이 훅훅 읽힌다, 그러나 ③ 플롯이 이미 낡았고 새로운 읽을 거리가 없어서, ④ 굳이 읽고 싶다면 이 책보다는 콜슨 화이트헤드가 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권하겠다,고 말하겠다.
조금 더 추가하자면, 1976년에서 1810년대로 떠나면서 이들이 소통하는 언어 사이에 사투리와 백인과 노예의 사용 언어 차이 말고는 별 어려움이 없는 것이 어색하다. 근 170년 가까운 격차. 우리나라면 순조 임금 시절인데 당시 사람이 쓰던 언어를 지금 사람이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다? 믿지 못하겠다.
하나 더 말하자면, 다나의 백인 남편 케빈은 1810년대 미국에서 무려 5년 이상을 살다가 탈출한다. 근데 19세기에 루퍼스 와일린은 댕기열로 추정되는 열병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케빈이 일종의 토착병에 제대로 된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지금은 사라진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고, 위생 관념이 거의 없었던 거친 시절에 복닥이느라 얼굴에 외과적 상처는 얻었을지라도 질병 한 번 경험하지 않은 것은 가히 기적적이다. 뭐 그렇다는 거다. 심각하게 시비하는 건 아니고 이런 것도 좀 신경썼으면 어땠을까 싶은 정도.
대신 다나와 케빈은 현대과학이라는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서로 퉁치면 된다. 실제로 책 속에 다나의 일반상식적 의학 지식은 당시 의사보다 훨씬 우월한 의료지식으로 무장한 상태이다. 이것 말고도 다양하게 150년 전 사람보다 탁월한 조건을 가지고 있을 터, 이 지식의 적절한 사용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