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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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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베 코보. 이 책은 <모래의 여자>, <불타버린 지도>와 더불어 아베 코보의 실종 3부작으로 불린다고 한다. 나도 아베 코보, 하면 당연히 <모래의 여자>와 <불타버린 지도>를 들 만큼 둘 다 재미있게 읽었다. 언젠가 실종 3부작 운운하는 이야기를 듣고 <타인의 얼굴>도 틀림없이 읽어보리라, 눈에만 띄어라, 하고 있던 중에 나 다니는 동네 도서관이 아니라 다른 지역 도서관에서 발견해 상호대차서비스 신청해 읽었다.
이번 달 초에 아베 코보의 초기 단편집 《벽》을 읽고 사실 좀 놀랐다. 《벽》은 주로 1950년대에 쓴 작품을 모은 것으로, 1951년 작품 <S. 카르마 씨의 범죄>로 아쿠타카와 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한 대표작을 필두로 작품들이 초현실주의적 아방가르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들 것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책을 직접 읽어봐야 안다니까. <불타버린 지도>를 읽을 때 이영미의 역자해설을 통해 아베 코보가 전위문학에 힘을 쏟았다는 것을 알았어도 설마 <S. 카르마…> 정도인 줄은 몰랐으니.
그러나 책을 읽는 재미에 관해서 말하자면 초기 아방가르드 보다는 1960년대의 실종 3부작이 한 길 위로 읽혔다. 뭐 나만 그런 건 아닐 듯. 일단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일관된 스토리가 존재하니 훨씬 쉽게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독특한 사건 이야기라 흥미롭기도 하다.
<타인의 얼굴>은 한 고분자 화합물 과학자가 실험 도중에 액체 질소가 폭발하는 사고를 당한다. 액체 질소의 폭발? 책에서는 그렇게 말한다. 액체 질소. 영하 2백도에 육박하는 극저온 상태의 물질이 폭발했으니 그걸 뒤집어쓴 인간은 피부에 닿는 순간 급속 냉각에 의해 동상에 걸리게 된다. 이 상태를 화상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리 큰 차이는 없다. 완전히 얼어버리거나 불탄 피부를 빨리 제거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그래서 표피, 진피, 지방층이라 부르는 피부의 3개 층 모두를 제거하면 이 자리에 붉거나 분홍색의 보기 흉한 새 살이 돋는데, 이걸 켈로이드라 부른다. 켈로이드는 유전, 나이, 호르몬에 따라 발생 상태에 차별이 있다고 우리나라 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 포털에 쓰여 있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 ‘나’는 삼십대 남자이며, 액체 질소가 얼굴 바로 앞에서 폭발해 얼굴 전체의 피부가 전부 망가졌다. 근시가 있어 안경을 쓰는 바람에 눈과 눈꺼풀에 그나마 영향을 덜 받았고, 기적적으로 입술은 무사했지만, 유전적으로 켈로이드가 심한 체질이라는 불행이 덮쳐 ‘나’의 말에 의하면 눈과 입술을 제외한 모든 얼굴 부위에 마치 거머리 덩어리가 기어 나온 듯한 켈로이드가 서로 뒤엉겨 검붉게 부풀어 올랐고, 거기서 끊임없이 진물도 나오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직장인 K 고분자 화학 연구소에서 일할 때를 비롯해 어떤 형태로든지 외출할 때는 마치 허버트 조지 웰스의 작품에 나오는 투명인간처럼 머리에 붕대를 세 겹으로 둘둘 싸맨 상태이어야 하지만 일본의 여름은 덥고 습도가 매우 높아 진물과 땀이 섞이면 누구보다 당사자인 ‘나’가 제일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적어도 집에 있을 때면 붕대 없이 맨 얼굴로 있었을 터. 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사고 후에 ‘나’ 앞에서 극도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조신한 아내. 반면에 ‘나’는 얼굴에서 악취가 나는 듯한 강박과 바퀴벌레가 기어 나오는 얼굴 구멍에 대한 연상으로 점차 피폐해져 성격이 갈수록 까칠해진다. 아, 앞에서 비유하느라 데려온 허버트 조지 웰스의 투명인간이 그러했듯이.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터이지만 어느 밤에 자리를 보아주고 방을 나서는 아내에게 달려들어 한 손으로 아내를 제압하고 다른 손으로 아내의 몸을 만지려는 순간, 아내는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한다. 순간 피식, 하고 욕망이 사라지자 아내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고. ‘나’는 당연히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자기 맨얼굴에 촘촘하게 박힌 켈로이드, 검붉은 거머리 떼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지내던 하루. ‘나’는 학술지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공 기관에 관한 논문을 읽는다. 전쟁 직후이기 때문에 전쟁 중에는 생명의 유지가 최선의 목표이지 흉터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다가 막상 종전이 되자, 삶의 현장에서 상대적으로 흉측하게 보이는 절단 부위나 상처를 플라스틱 인공 기관으로 진짜 신체와 거의 유사하게 재현할 수 있는 신기술을, 고분자를 연구하는 일본의 의과학자가 발명한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에게 전화를 먼저 하고 그를 찾아 나선다.
의사의 진료실에는 놀랄만한 손가락 하나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지문까지 섬세하게 만들어진 손가락. 의사는 ‘나’의 상태를 듣더니, 얼굴에 땀샘이 살아 있어 무엇보다 통기성이 없는 소재로 얼굴을 덮을 수 없다는 것과, 얼굴은 정신위생학적으로도 매우 큰 문제라고 설명한 뒤, ‘나’를 위한 가면을, 적어도 지금 착용하고 있는 붕대보다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줄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얼굴은 그저 신체의 한 부위가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통로라고 주장하면서.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영혼의 통로가 없는 독방에 갇힌 것이라는 뜻이고, 박사의 지나친 얼굴과 통로에 대한 주장에 화가 나, 엉뚱하게도 책상 위의 손가락만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진료실을 나선다.
이후 ‘나’는 스스로도 고분자 화학 연구소의 소장 대리로 근무하고 있어서 박사의 논문과 제작 방식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있다. 그래서 직접 ‘나’의 방을 작은 실험실로 꾸며 가면 제작에 심혈을 기울여 성공적으로 가면 하나를 만들어낸다. 그러다 새로 신축 아파트에 방을 얻어 아지트로 삼아 본격적으로 가면인간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아내에게는 1주일 예정으로 칸사이 지방으로 출장 간다고 말해놓고. 이 아지트에 입주하는 날, 관리인의 약간 지능이 모자라보이는 어린 딸은 얼굴에 붕대를 두텁게 두른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이 여자 아이는 며칠 후 가면을 쓰고 외출할 때 가면을 쓴 ‘나’가 붕대인간임을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나’는 손길을 거부한 아내가 불만스럽다. 그리하여 백화점에서 실공예를 배우는 아내의 동선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30대 초반 나이의 가면을 쓴 ‘나’는 아내를 유혹한다. 놀랍게도 평생 조신하고 점잖고, 행실 바른 아내는 가면인간의 유혹에 굴복하여 그날로 호텔에 들어 동침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남편이 지금 출장 중이라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아내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높은 수준의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에 호텔을 나온 가면 속 나는, 가면을 벗은 후에, 어처구니없게도 가면인간을 질투하기에 이른다. ‘나’를 거부한 아내가 망설임 없이 ‘나’의 부재를 말하면서 유혹에 굴복하던 잘 생긴 모습의 젊은 얼굴을 한 가면인간.
‘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모두 세 권의 공책에 기록했다. 검정, 흰색, 회색 공책에. 모든 기록을 끝마치고 ‘나’는 아내에게 아지트의 주소를 가르쳐 주고 아지트에 찾아가, 공책 세 권을 모두 읽게 만드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의 발표시기가 1964년. 이미 발표하고 60년 이상이 지났다. 그러니 독자는 결론을 읽기도 전에 어떻게 작품이 끝날 것인지 짐작할 수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독특한 작가로 한 세월 살다 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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