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이 이야기
제니 에르펜베크 지음, 안문영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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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니 에르펜베크가 발표한 첫 소설작품. 표지에는 장편소설이라 했으나, 노벨라Novella, 중편소설로 보는 것이 좋겠다. 작가의 작품으로 세 번째 읽는 소설인데, 에르펜베크는 참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카이로스>를 소환해야 하나보다. 패전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히틀러 소년단 출신인 기성세대 한스 들에 의하여 운영되는 사회 시스템. 그것이 청년기에 들어가는 카타리나 세대를 억압하고 관리하는 시대를 비평한다면, <늙은 아이 이야기>의 늙은 아이는 성인처럼 큰 체격을 했으나 2차성징의 발현도 거의 보이지 않고, (자본주의 또는 통일 독일) 사회에서 적응하지도 못해 늘 서열의 마지막에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동독 출신 주민의 처지를 은유했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일찍이 독일 소설에서는 소년 시절에 더 이상 나이 먹기를 포기한 남자가 몇 명 등장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오스카, 하인리히 뵐이 쓴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의 주인공 한스. 이 두 소년들은 파시스트들의 사회, 파시즘의 광기어린 악행 속에서 성장을 스스로 멈추기로 결정해 그들이 저지른 죄를 비판하려고 한다.

  예니 에르펜베크가 만든 ‘늙은 아이’는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늙은 아이’가 조로증 같은 현상으로 몸은 성인의 것을 하고 있으되 나이가 얼마 되지 않은 소녀일 수도 있고, 애초 나이가 많지만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성인일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일종의 조로증세가 있는 열네 살 소녀로 생각했다가, 점점 읽어가면서 정신과 성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성인, 갑자기 한 순간에 개방되어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동독 사람을 비유한다고 읽게 되었다.


  독일 역사에는 이 소녀 같은 인물이 정말 존재했다고 역자후기에 쓰여 있다. 1828년에 뉘른베르크 시내 한복판에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당시 16세 소년 카스파 하우저. 그동안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격리당해 아무런 사회적 성장을 하지 못한 카스파는 기초적인 말과 숫자를 배우며 사회 적응 훈련을 받다가 길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이로써 카스파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 채 다시 한번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늙은 아이 이야기>의 등장인물 ‘소녀’의 첫 구절을 읽으면 역자해설에서 소개하는 카스파 하우저하고 별로 틀린 것이 없다. 시내 한복판에, 한밤중에, 이 소녀가 빈 휴지통을 손에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경찰이 소녀를 발견해 말을 시켜봐도, 이름이 뭐니? 어디서 살아? 부모가 누구야? 몇 살이니? 물어봐도, 열네 살, 이라는 대답만 할 뿐이다. 완전히 고아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큰 몸집에 어울리는 뚱뚱한 소녀. 예니 에르펜베크는 본문 겨우 두번째 페이지에 소녀를 ‘잉여존재’라고 판정한다. 경찰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들은 소녀가 쥐고 있는 쓰레기통을 빼앗고 통통한 손을 잡은 채 아동 복지원으로 데려간다.

  복지원에 들어간 후에 소녀는 그나마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작가가 소녀를 잉여존재라고 하는 바람에 독자는 지적발달장애를 염두에 두었는데, 지적발달장애가 있는 소녀라고 보기에는 그나마 복잡한 생각을 하기 시작해서 조금 이상하다, 발달장애인의 마음 속 생각, 뇌의 화학작용을 에르펜베크, 작가의 시선으로 좇아가 해석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고, 조금 더 읽으면, 그러니까 소녀는 애초에 돌봄과 교육에서 완전히 소외되지 않아,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깡통급 복지원 학생들보다는 조금 나은 지식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다만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여 큰 덩치와 피하지방과 내장지방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무척 많이 타는 데다가 만성 비염증세가 있어 늙은이처럼 맑은 콧물이 코에 방울방울 달려 있을 때가 많은데, 이를 닦기 위한 작고 얇은 손수건을 남한테 보이기 창피해한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희로애락을 다 느끼는 보통 사람이다. 바이러스에 취약하여 독감, 감기에 쉽게 걸리고, 회복하는데 오랜 요양을 해야 한다. 소녀는 따뜻한 복지원 양호실의 깨끗한 침대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빨리 걷기도 힘들고, 뛰는 건 거의 하지 못하지만, 쉬는 시간이 있으면 철봉대에 올라 그 위에 앉아있기를 좋아하는 소녀.

  2차 성징이라고는 언제부터 했는 지 모르겠지만 생리를 하는 것 말고 없다. 가슴은 전혀 발달하지 않아 남성형 가슴에 남자 것보다 큰 젖꼭지만 달려 있다. 엉덩이도 발달하지 않아 그저 가운데가 불룩한 항아리형 원통처럼 생겼다. 소녀의 생존방식은 서열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러면 아무도 소녀를 경계하지도 않고, 문제가 터져도 원인제공자로 지목 받지 않으며 해결자 혹은 해결방법을 생각해낼 멤버로 여기지 않는 자유로운 자리가 바로 가장 낮은 서열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아서.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문제가 한 사람을 건너뛰지는 않는다. 8학년 동급생 다섯 명이 3학년 남자 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장면을 소녀가 본 적이 있다. 아이들도 소녀가 자기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는 걸 앍고 전전긍긍한다. 소녀가 교무실에 가서 고발을 하기만 하면 다섯 명 전원은 규율상 퇴소를 당하게 되고 퇴소 후에 이들 역시 단 한 곳도 갈 데가 없다. 그러나 소녀는 결코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어느 하루, 다섯 명 가운데 하나인 뵈른이 어떤 식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생의 적지 않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뒤에서는 선생이 쫓아오고. 뵈른이 도망가는 길에 그저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소녀. 뵈른이 소녀와 꽈당 부딪히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소녀에게 쥐여주고 꽁무니를 뺀다. 소녀는 주머니에 얼른 돈을 집어넣고 완전하게 표정 없이 그냥 다시 서 있다. 결코 누구에게도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뵈른은 잡혔지만 돈을 훔친 적이 없다고 했고, 선생은 돈을 도둑 맞았으며, 소녀의 주머니에 있던 건 뵈른에게 돌아갔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보육원에서 소녀의 사회생활은 전기를 맞는다. 이제 보육원의 주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

  그러면 좋을 것 같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후 소녀는 서열의 가장 아래 자리에만 머물 수 없다. 알고 보니 글씨도 예쁘게 쓰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 보다는 아는 것이 있어서 그들의 시험지를 대신 메꾸어 주기도 한다. 이 단계가 되면 독자는 이 소설이 단순하게 외모가 늙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카이로스>처럼 일종의 정치소설일 수도 있고, 좀 개성있는 독자라면 정치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크게 재미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한 번 휙 읽고 던져버릴 작품도 아니다. 개방시대를 맞은 폐쇄사회에 있던 사람들의 곤란함을 콕 집어 쓴 작품으로 읽히는데, 이런 부류의 작품이 많기는 하지만 독특한 문법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노벨라, 중편소설이다. 예니 에르펜베크는 처음으로 쓴 소설부터 현상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비유하는 소재를 사용했다. 그래서 불편함을 주기도 하겠지만 하여튼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인 건 틀림없는 듯. 눈에 힘주고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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