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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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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1943년생인데, 이 또래 가운데, 특히 여성 중에서 소비에트 연방 치하에는 꼭꼭 펜을 숨겼다가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에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제법 있다. 옛 소련 같은 체제, 지금의 북한 같은 곳에서 글을 쓰고, 음악을 작곡하고, 미술행위를 하는 건 정말 재미없을 거 같다. 그러느니 차라리 그냥 보통 생활인으로 살았다가 해빙이 오자 봇물이 터지듯 자신의 예술혼을 만개한 사람들. 울리츠카야는 소련 시절에 결혼해 아들 둘 낳은 후에 유대인 극장에 들어가 문학 감독을 하며 각본, 평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희곡이라고 하지 않고 각본으로 표기한 것을 보니까 드라마투르그 비슷한 일을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전적으로 추측이다. 연표를 보면 훗날 희곡을 썼다고 해 이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영화 시나리오일 수도 있다.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연표 상으로는, 1992년 마흔아홉 살 때 중편소설 <소네치카>가 처음 발표한 작품이다. <소네치카>로 러시아 부커 상 최종후보에 오르고, 96년에 프랑스 메디치 상, 98년에 이탈리아 주세페 아체르비 상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2012년에 작품집 《소네치카》로 비채 출판사에서 출간해 표제작과 <스페이드의 여왕>,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을 합해 한 권으로 팔았던 것을 2023년에 문학동네에서 공역자 두 명으로 구분해 두 권으로 개정판을 냈다. 이게 미워서 책 읽기를 미루었다가 이번에 읽어봤는데, 아이 씨, 진작 읽을 것을. 평점을 줘도 그게 얄미워 별 한 개 정도는 까려고 생각했어도, 특히 <소네치카> 문장이 얼마나 예쁜지 도무지 깔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어서 <부하라의 뜰>을 빼고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울리츠카야는 죄다 읽는 셈이다. <소네치카>는 처음 발표한 작품이라서 그런지 나름대로 유명세를 탄 21세기 책들과는, 글쎄 아마추어가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표현, 즉 이야기하는 방법이 다르다. 그렇게 느꼈다.
책에는 표제작과 단편 <스페이드의 여왕>이 실렸다. <소네치카>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소네치카는 ‘소냐’의 애칭이다. 러시아 소설 읽으려면 한 이름 갖고 무수하게 다른 애칭으로, 또 자주 무지하게 긴 이름으로 쓰는 걸 참아야 한다. 이 각오 없이 러시아 소설 읽으려면 뇌에 땀날 수도 있고, 읽다가 때려치우기 십상이다.
소네치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독서광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아이들은 문자를 누가 가르쳐주어 배우는 게 아니다. 아무리 복잡하게 생긴 문자를 사용하는 나라에 살아도 “아주” 어린 아이가 책을 읽는 경우가 제법 있다. 내가 말하는 건 “아주” 어린 아이. 그냥 아이들은 많으니까 혹시 내 아이가 영재 아닐까, 이런 생각하기 없기. “아주” 어렸을 때 글자를 저절로 익힌 아이들이 그렇다고 천재는 아니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고, 아마도 평생 따라다닌다. 공부 머리가 그렇다는 거다. 공부머리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
어려서부터 책만 팠으니 그러면 체형이 어떻게 됐을까? 게다가 소네치카가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서양배pear 모양으로 부푼 코, 넓은 어깨, 길고 가느다란 체격, 마른 다리, 납작한 엉덩이, 이런 모든 것과 달리 일찍 성숙한 큰 여인네의 가슴. 한 마디로 생긴 건 별볼일 없다는 거. 아, 못생긴 건 아니다. 그냥 보통 수준이겠지.
일곱 살때부터 스물일곱 살까지 쉼 없이 책을 읽었다. 마치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소냐는 인쇄된 글자에 너무 매료되고 공감해 실제 사람 사는 것보다 활자 속의 인생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것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러시아 내전 시기 때 시계공방을 그만둔 아버지와 함께 저 멀리, 스베르틀롭스크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싱어 재봉틀로 빈궁한 시절에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 팔아 살아서 세상에 가장 무서운 인간이 세무조사원이었단다.
도서정보 전문학교를 졸업한 소냐는 스베르들롭스크의 오랜 도서관 지하 보관실에서 일 하기 시작해 몇 년 후에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부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냐한테는 도서관 지하실이 유일한 희망의 공간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 이날은 1층 대출과에 직원이 휴가를 낸 바람에 소냐가 대신 앉아 있었다. 운명은 그렇게 온다. 우연히. 소냐 앞에 나타난 남자. 로베르트 빅토르비치. 역시 유대인이다. 비쩍 마르고 키가 작은 남자. 그가 프랑스어로 된 도서목록이 없느냐고 묻는다. 없다. 있었는데 찾는 이가 없어서 흐지부지 망실됐다. 대신 소냐는 로베르트를 데리고 서유럽 서고로 가고, 그곳에서 프랑스 장서를 발견한 로베르트는 경탄을 하며 전율한다.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소냐가 조금 반한 것도 같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이날 남자는 소냐에게 세 권을 대출해달라고 하고, 대출증을 만들려 했지만 그의 거주지가 이곳으로 되어 있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로베르트는 며칠 안에 반드시 가져오겠다고 맹세를 하고, 소냐는 아무 이유도 없이 맹세를 믿고 책을 빌려준다.
이틀 후, 신문지에 싼 책을 반납하러 온 로베르트. 신문지 포장을 벗기고 소냐가 발견한 것은 거친 종이에 부드러운 갈색과 세피아 색 물감으로 그린 소냐의 초상화였다. 소냐가 보기에는 자기 같지 않다. 하지만 누가 그림을 본다면 틀림없이 소냐를 그렸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로베르트 빅토르비치는 이제 마흔일곱 살 더하기 3일. 1930년대 초에 프랑스에서 귀국한 전설의 사나이다. 전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전설이 아니라 파리의 전설이라는 뜻이다. 갑자기 사라진 구 러시아 시대의 화가. “불행한 이들 속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불렸던 그의 작품에 대하여 훗날 미국의 평론가들은 각종 매체에 멀쩡하게 살아있는 로베르트더러 이제 죽어 사라진 한 세월의 대가로 극찬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의 그림 값은 천장을 뚫어버린다. 그러니 대단한 화가인 모양이다. 전쟁 당시에 그는 실제 삶과 상관없이 점령된 파리의 죽어가는 갤러리들 속에서 비방과 망각을 다 견디고 죽음과 부활을 겪게 되는, 이상한 그림들과 함께 구전적인 삶으로만 살고 있었다. 소련에 입국하자마자 스탈린 시대가 줄창 그러했듯이 교화 수용소에서 5년형을 마치고 보호관찰하에 변방 중의 변방, 스베르틀롭스크의 공장관리부에서 화가로 일하고 있었다. 당연히 생산전투를 독려하는 그림 같은 걸 그렸겠지.
그가 소냐에게 초상화를 건네며 말한다.
“이건 제 결혼 선물입니다. 사실 당신에게 청혼하러 왔어요.”
이미 열네 살에 짝사랑했던 동급생 비티카 스타로스틴, 잔인한 오네긴에게 독한 거절의 말을 들어 소냐로부터 사랑의 불꽃이 떠나버린 것으로 여기고 살았기 때문에 소냐의 대답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뭐예요, 지금 농담하시는 거예요?”
스타로스틴의 유령이 찾아왔던 거였다. 하지만 노쇠한 로베르트 빅토르비치와 태생적으로 허약한 소네치카는 피란 생활의 지극한 곤궁 속에서 새 삶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바로 두 주일 후에.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임신도 하고, 그것도 산달을 꽉 채웠을 때, 로베르트는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소냐도 함께 갔다. 위험한 상태이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혼자 보낼 수 없고 남편과 따로 살 수도 없어서 남편과 함께 의자가 다 뜯어진 열차에 올랐다. 딸 타냐, 2킬로그램의 타네치카를 낳아 튼튼하고, 키도 크고 비쩍 말랐지만 별로 아프지도 않게 잘 키웠다. 타냐는 책을 읽지 않았다. 공부도 하지 않았다. 다른 것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 그런 거지. 부모가 바라는대로 되는 자식이 몇이나 되랴?
이렇게 세월이 갔다. 타네치카에게 친구가 생기고, 불쌍한 고아로 성장한 친구 야샤에게 자기 집에 와서 머물라 권하는 소네치카. 애초에 정조관념이 없고, 고아로 홀로 성장하기 위하여 생존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을 잘 알고 있던 야샤는 이 가족에게 휘청거리는 충격파를 몰고 오지만, 우리의 소네치카는 이것도 다 사는 것이라고, 그냥 그냥 넘어간다. 어쩌면 그것,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더 지혜로웠던 것일 수도 있을까? 모르겠다.
정작 내가 넘어간 건 스토리가 아니라 문장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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