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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ㅣ 페이지터너스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이광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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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아킹 마샤드 지 아시스의 장편소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을 읽은 것이 벌써 11년 전이다. 세월이 무섭다. 다른 건 거의 기억나지 않고 이미 죽은 브라스 꾸바스가 살아생전 겪은 연애 이야기를 중심으로 지난 시절의 회상한 작품이란 것만 어렴풋하다. 책꽂이에서 제목도 독특한 <… 회고록>을 꺼내 갈피를 넘기니 탁 눈에 들어오는 ‘헌사’. 맞아, 이거였어. 지독하게 인상적이어서 늘 머리에 삼삼했던 헌사.
“나의 차가운 시신을 가장 먼저 갉아먹은 벌레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기념품으로 이 사후 회고록을 헌정한다.”
이 <… 회고록>이 당시에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한 유일한 아시스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경우, 아시스가 1839년생이라는 것을 알고, 에이 설마, 1939년생이겠지, 이렇게 지레짐작했는데, 1939년생은 아니더라도 생년의 숫자가 “아마도 오타”일 거라고 엉뚱하게 믿어버릴 만큼 그럴 듯했었다. 근데 1839년생 맞고, 게다가 해방노예 아버지와 포르투갈 청소부 엄마 사이에서 나온 소위 파르도pardos 출신이면서 어떻게 시와 소설, 희곡까지 썼다는 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르도는 남미에서 유럽,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흑인의 피가 모두 섞인 사람을 일컫는다. 그래서 예일대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헤럴드 블룸(현대 미국의 4대 소설가로, 토마스 핀천, 돈 드릴로, 필립 로스와 더불어 ‘코맥 매카시를 꼽아서 내게 미운 털이 박힌’ 인물)은 주아킹 마샤드 지 아시스를 가장 위대한 흑인 작가라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신과 의사》는 단편 넷, 중편 하나를 실은 작품집이며, 중편 <정신과 의사>를 제목으로 땄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세번째 순서로 실린 단편 <자정 미사>가 제일 그럴듯했다. 크리스마스날 밤, 자정미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시간을 기다리는 열일곱 살 청년과, 그의 방에 들어온 서른 살 가량의 콘세이상 부인과의 대화를 그렸다. 화자 ‘나’가 머물고 있는 곳은 공증인 메네지스 씨의 집이었는데, 이이는 ‘나’의 사촌 누이와 결혼을 했었다. 사촌 누이가 죽고 다시 결혼한 부인이 바로 콘세이상이며 집에 부부와 부인의 늙어서 귀 밝은 어머니가 살고 있다. 메네지스 씨는 저녁을 먹고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면 19세기 돈 많은 공증인답게 집을 나서서 온갖 사교활동을 하느라 영화관, 극장, 콘서트홀, 클럽하우스 등등을 활보하는데, 이게 정말 공증인의 업무상 비즈니스 때문인지, 아니면 기타 등등의 사유, 예컨데 혼외 연애 같은 은밀하고 유혹적이며 동시에 추잡한 문제 때문인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판단해야 하건만, 아무튼 콘세이상 여사와 비슷하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터. 콘세이상 여사도 처음에는 부처님도 돌아 앉을 만큼 질투도 하고, 사립탐정도 붙여보고 별 짓을 다 해봤는데 그래도 눈 하나 껌벅하지 않는 남편 메네지스한테 학을 떼 이제는 그러거니 할 정도의 보살이 된 거다.
다 좋다. 19세기 중후반이니 다른 문제만 없다면 까짓것, 눈 한 번 질끈 감아줄 수 있는 것이지. 둘 사이에 자식도 하나 생기지 않은 터수에. 그런데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이 크리스마스, 어째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느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콘세이상은 사람도 아니다. 속으로는 열불이 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해야겠지. 가슴 속에 불이 활활 붙어 ‘나’의 방에 쳐들어온 부인은, 이야기하는 내내 옆방에서 자고 있는 늙어서 귀만 밝은 어머니가 남녀가 유별한데 한 방에 들어 소곤거리는 걸 알아챌까봐, “목소리 좀 낮추세요. 엄마가 깨겠어요.”를 연발하면서도 정작 대화를 그만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 자정 가까이 왔고, 애초에 ‘나’가 친구 집에 가서 그를 깨워 함께 성당에 가려 했으나 거꾸로 친구가 집 밖 창문에서 ‘나’를 부르고, 여사는 ‘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컷.
그러나, 정작 내가 독후감을 쓰기 위하여 메모를 한 작품은 표제작 <정신과 의사>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걸 먼저 읽었거든. 제일 마지막에 실렸지만 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편이라서 책을 앞에서부터 읽으면 도서관 퇴근시간에 중편을 읽다가 도중에 뚝 끊어야 할 시간이 된다. 그래서 제일 긴 <정신과 의사>를 읽고, 남은 시간에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기 시작. 앞의 두 작품까지 마치고 퇴근해서, 놀라지 마시라, 장장 “닷새”를 쉬고 쐬주 한 병 깠다. 하여간 하고 싶은 말은, <정신과 의사>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제일 좋은 작품을 고르라면 <자정 미사>를 선택하겠다는 정도.
주인공은 시망 바카마르치 박사. 아주 오래전의 귀족 집안 자제이며, 브라질, 포르투갈, 스페인을 통틀어 최고 의사였던 사람이다.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수학해 의학박사 학위를 딴 실력자로, 일찍이 포르투갈의 국왕이 직접 코임브라에 머물며 의과대학을 이끌거나 리스본에서 왕실 의학업무를 처리해달라 요청했음에도 서른네 살 때 물리기 어려운 국왕의 청을 극구사양하고 브라질로 귀국한 진짜배기 애국자이기도 하다. 바카마르치 박사가 이때 포르투갈 국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폐하, 과학이야말로 저의 유일한 소망이며 이타구아이는 저에게 우주와 같은 곳입니다.”
과학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건 아시겠지? 그럼 이타구아이는? 동네 이름이다. 박사의 고향. 이타구아이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서쪽으로 거의 붙어있는 도시이다. 근데 이건 교통이 무지막지하게 발달한 지금 이야기고, 19세기 말에도 ‘아주 오래전’이라 했던 당시엔 비록 기차는 다녔지만 그곳 태생이면서도 리우데자네이루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심지어 훗날 바카마르치 박사의 아내가 될 에바리스타도 박사와 혼인하고 한참 후에야 겨우 수도에 한 번 다녀올 정도였다. 브라질, 포르투갈,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의사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 작은 도시 이타구아이에서 의사 개업을 하겠다는 거였다.
정말로 고향에 돌아와서 5년간 의사로 지내다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지역판사의 아내였던 스물다섯 살 먹은 과부 에바리스타 다 코스타 이 마스카레냐스와 결혼했다. 예쁘지도 않고 매력도 없는 그냥 그런 여자.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에바리스타냐고 물으면, 박사는 아내가 1등급의 생리학적, 해부학적 조건을 가졌으며, 좋은 소화력과 규칙적인 수면습관, 좋은 맥박과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어서 튼튼하고 건강한 2세를 생산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 근데 사실 에바리스타는 그리 건강하지 못해서 임신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박사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동안 쉰두 살이 되어버렸다.
이 동안 박사는 새로운 장르인 정신분석과 뇌 병리검사에 특별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전혀 개척되지 않은 분야에 용맹정진하겠다는 학자적 탐험심이 없으면 시도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는 “정신의 건강이야말로 의사의 가장 고귀한 책무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불멸의 금자탑을 세우기 위하여 시의회에 강력하게 정신병원 건립을 요구했다. 이때까지 이타구아이 시의 중증 미치광이는 집에서 거의 감금한 상태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았으며, 경증의 조현병 환자들은 별로 구애받지 않고 시내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말이 그렇지 엄연히 방치하는 수준이었던 거다.
그리하여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바가街에 50개의 창문이 있고 수많은 작은 방이 달린 흰 집이 들어섰다. 브라질 각지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병원 개원 축하 파티를 일주일에 걸쳐 성대하게 치룬 다음 본격적으로 환자를 받기 시작했는데, 환자들 역시 이타구아이 시에서뿐만 아니라 브라질 전국에서 쏟아져 몰려들어 병원은 개원하자마자 다시 증축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병원의 이름은 “카자 베르치” 녹색의 집이라는 뜻이다.
바카마르치 박사는 병원의 행정업무를 약제사 크리스핑 소아리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연구에 매진해, 환자를 심한 광기와 유순한 환자로 나누고, 하위 분류로 편집, 망상, 다양한 환각 증세로 구분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는데, 정신이 이상한 상태를 누가 판정하느냐, 하는 것. 누가 하기는 누가 하나? 당연히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바카마르치 박사가 하는 것이지. 이제 그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와 관찰을 했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정상이 아니면 즉각 그를 강제로 카자 베르치에 입원을 시켜버리는 권한을 저절로 갖게 된다. 상대가 누가 됐든 상관없다. 하다못해 시 의회 의원이라도. 바카마르치 박사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제 최고 권력자가 되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전부 조현병 환자로 만들어버리는 절대 권력을 쥐게 되고, 언제나 내가 부르짖듯이, 권력이 문제가 아니었던 적은 인류사에 한 번도 없어서, 박사는 점점 공포의 대상이 되어간다. 독재가 따로 있나? 뭐 그게 인생이다. 근데 독재의 끝이 뭐야? 폭동이고, 반란이고, 혁명.
그렇다고 주아킨 마샤드 이 아시스를 혁명가 비슷하게 생각하지 마시라. 이이는 가난한 유색인 출신의 반동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브라질의 오히려 알아주는 군주제, 즉 왕정주의자라서 작품 속의 저항을 체제 전복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도 없고 그렇게 봐도 안 될 것 같다. 작품은 재미있다. 이이의 반동적 사상 때문에 작품까지 멀리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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