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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인 케미스트리 1 - 개정판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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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닭띠 여사님 보니 가머스는 시애틀 출생으로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에서 창작과 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직업으로 했다는데 뭐 그냥 광고업으로 돈벌이를 했다고 여기면 맞겠지? 또 아니면 어때, 다시 보지도 않을 거 같은 걸. 지금은 영국에서 그레이하운드 종으로 보이고 이름이 ‘99’인 개 엄마로 살고 있으면서 조정rowing을 한다고. 어쩐지 책 속에서 조정에 관해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설명을 하더라니까. 출연하시는 개도 대형견에다가 이름이 “6시 30분”이고.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가머스가 써놓고 아흔여덟 군데 출판사에 책 내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원고를 보내 전부 물을 먹었고, 99번째에 가서 출판 계약을 맺어, 가머스의 나이 예순넷에 작가로 데뷔하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로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면 이이의 작품은 <레슨 인 케미스트리> 딱 한 작품만 나온다. 근데 이 책이 서양권에서 대박을 친 모양이다. 영국도서상, 워터스톤 올해의 작가상, 반스앤노블 올해의 책 상, 오스트레일리아 ABIA의 올해의 국제도서상, 리더스어워드 무슨무슨 상 등을 휩쓸었다. 아멘.
책은 1961년 11월에 시작한다. 물론 첫 장면의 시간적 배경이 이때라는 말이다. 여자들이 오후마다 셔츠웨이스트 원피스 차림으로 이웃의 정원에 모여 수다 떨던 시절. 메들린, 정식 이름은 매드, 맞다, 미쳤어 글쎄, 할 때의 매드 MAD가 호적에 오른 진짜 이름이고, 이걸 그대로 썼다가는 세상의 으뜸가는 놀림감이 되리라 싶어 메들린이라고 부르기로 한 건데, 이 메들린의 엄마 엘리자베스 조트는 새롭게 또는 새삼스럽게 “내 인생은 끝났어.”라는 비관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 서른 살 먹은 여사님이었다. 리즈로 말할 것 같으면 기가 막힌 음식솜씨를 가지고 있어서 매일 메드의 도시락을 싸주며 도시락 통에 쪽지를 써 딸에게 주는데 오늘의 쪽지는 특별히 두 장이었고, 이렇게 쓰여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운동 하면서 놀아. 하지만 남자애들이 이기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돼.”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못됐어. 그렇다는 생각이 들면 네 생각이 맞아.”
문제는 매드가 무척 똑똑하다는 거. 지금 다섯 살이지만 한 살을 올려 여섯 살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여섯 살을 먹었어도 서양 아이들은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ABC도 모르는 게 정상 수준임에 반하여 매드는 이미 동몽선습은 물론이고 사서삼경을 거쳐 지금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를 반쯤 읽었을 정도다. 에이, 뭐,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구라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해 지금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대부분 독파했다. 아이가 워낙 똑똑해 학교에서는 자기도 마치 글을 읽지 못하는 것처럼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러니 위의 쪽지 같은 걸 학교에 가지고 가겠느냐고. 매드는 도시락 통에서 엄마 모르게 슬쩍 쪽지를 꺼내 읽어보고 자기 찬장 위에 놓인 신발상자에 쏙 넣은 다음에 학교에 간다. 진짜 똑똑하지? 얘보다 좀 덜 똑똑한 아이들이 학교가서 아이들 앞에서 책 읽고, 그것도 소리 내서 읽은 다음에 왕따 당하는 거다.
여기까지 왔으면 작품의 주인공은 당연히 매드 같다. 나도 매드가 주인공이겠거니 했다. 근데 오산이다. 주인공은 매드의 엄마 엘리자베스 조트. 매드는 메드 조트. 엄마와 딸이, 1961년에 성이 같다? 혹시 사촌간 혼인인가? 아니다. 혼외 출산이다. 당시 말로 하자면, 물론 지금 이렇게 발음하는 건 실례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1960년대 초에 일컫는 말로는 ‘사생아’이다.
이쯤에서 한 마디.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Zott 양. 이이의 이름을 짧고 강하게 발음하지 말기로 하자.
1961년 11월. 엘리자베스 조트 양의 직업은 처음엔 캘리포니아 지방방송에서 송출하다가 이제는 U.S.A. 전국에 방송하는 저녁시간대 TV 프로그램 “6시의 저녁식사”의 진행자로 자타공인 이 쇼의 스타이며, 조트 양 본인은 상당히 불쾌하게 듣는 애칭 ‘맛 좋은 리지’로 불린다. UCLA 화학 석사학위 소지자이며, 1952년 1월에 대학원을 졸업 후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중 지도교수이자 학과장이며 DNA 연구에 관해 별로 실력도 없으면서 우연히 권위를 얻은 마이어스 교수한테 성폭행을 당한다. 조트 양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큰 키에 탁월한 외모, 총명한 지능을 겸비한 양은 늘 HB연필을 귓가에 끼고 다니는 버릇이 있는데, 난생 처음 이 연필을 본능적으로 오른손에 쥐고 피부를 노출한 마이어스 교수의 옆구리에 가져다 박아버렸다. 얼마나 세고 깊게 박았는지 약 12cm 길이의 얇은 나무 부분이 다 들어가 대장과 소장 일부에 박혀 버렸으며 피부 밖으로는 지우개와 지우개를 둘러싼 금속만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조트 양은 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마이어스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박사과정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실력이 모자란 조트 양이 마이어스 교수를 성적으로 유혹했고, 이를 거절하자 폭행을 저질렀지만 스승님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더 이상의 법적 조치는 취하지 않고 조트 양이 학교를 떠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마이어스 이 개자식이 그래도 뒤가 켕기기는 했는지 캘리포니아의 헤이스팅스 연구소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자베스 조트 양이 주인공이라서 독자는 당연히 그리고 전적으로 주인공의 입장, 주인공의 시각으로 책을 읽을 터인데, 사실 조트 양은 막무가내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연구소에 진짜 스타 연구원이 한 명 있다. 캘빈 에번스. 양친 부모가 교통사고로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서 고모네 집에서 자랐는데 고모 역시 고속도로를 가다가 차선 이탈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천주교가 운영하는 소년의 집에서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아주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탁월하게 총명해 거의 천재급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고 싶은 하버드에서 입학 허가를 내주지 않아 대서양 건너 케임브리지에 조정특기생으로 입학해 과학을 공부했다. 이후 눈부신 업적을 쌓아 아마도 서른 앞뒤의 나이로 보이는데, 최근 5년 동안 노벨화학상 수상 후보자로 세 번이나 거론되었을 만큼 전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과 연구소에서 캘빈을 교수로 모시고자 했으나 애초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하버드는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었고, 어디로 갈까요, 알아 맞춰 보세요, 궁리를 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날씨가 좋다는 캘리포니아의 헤이스팅스 연구소에 최악의 박봉을 대신해 연구소에서 가장 큰 연구실을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들어온 거였다. 날씨가 좋으면 뭐 하려고? 조정. 보니 거머스 여사의 취미가 조정이잖여?
조트 양은 석사 출신이다. 돌 던지면 박사학위 소지자 대가리에 떨어지는 연구소에서 누가 석사를 사람 취급이나 하나? 게다가 1950년대 초중반에 여성이 무엇을 요구하거나 신청을 하면 말이지. 그래 조트 양이 실험용 비이커를 사달라고 수십장의 신청서를 써도 그 하찮은 물품이 들어오지 않아 열폭하고 있을 즈음, 캘빈 에번스의 연구실엔 비이커가 남아돈다는 걸 알고 무작정 연구실에 쳐들어 갔다. 문 앞에 “절대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조트 양이 선택한 것은 연구실 주인이랄 수 있는 캘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비이커를 얻어온 것이 아니라 대판 말싸움을 하고 선반에 놓인 비이커 케이스를 무작정 통째로 들고 나온 거였다. 이쯤 되면 사실 조트 양이 사회부적응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은 다음으로 하자. 주인공이니까. 1950년대 초반이니, 캘빈이 어엿한 연구원인 조트 자신을 사무행정 보조원 정도로 알고 대우한 것이 극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 다음날 조트 양이 연구원이었던 걸 알고 사과하러 온 캘빈을 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모난 돌이었던 것. 캘빈 역시 과학에 관해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 비슷한 면이 있어서, 캘빈과 조트 양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아 얼마 후 둘은 각본에 의하여 연애를 하고, 경제논리에 입각하여 함께 사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동거생활로 들어가며, 당시 미혼 남녀의 동거란 불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음에도 워낙 캘빈이 유명한 학자라서 눈꼴이 시어도 뭐라 하는 인간이 없었다. 이 커플은 혼인제도와 출산에 관해 부정적이었는데 조트 양이 훨씬 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콘돔을 두 겹으로 둘러쳐보아라, 빠져나올 놈은 다 빠져나오게 되어 있어서 조트 양은 임신을 했다. 이 좋은 세월에 캘빈은 양친부모와 고모처럼 개 ‘6시 30분’과 함께 노닐다가 경찰차에 치어 죽어버린다.
여태까지는 캘빈의 유명세 덕분에 연구소에서 버틸 수 있었지만, 조트 양 역시 천재는 아니더라도 수재급 인재라서 놀라운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연구소에서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애를 밴 여성 연구원을 내친 화학과장 도나티 박사는, 조트 양의 화학진화에 관한 연구를 자기 이름으로 출판하는 파렴치한 일을 벌이고, 우리의 엘리자베스는 혼자 딸 매드를 키우며 어렵게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맛난 점심 도시락과 쪽지 쓰기를 멈추지 않고.
이때 나타난 홀아비 TV 연출자와 그의 딸. 매드가 연출자의 딸 어맨다의 도시락이 형편없는 것을 보고 기꺼이 자기 도시락을 함께 먹자고 했다가, 매드는 집에서 얼마든지 먹으니 거의 다 어맨다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됐고, 이를 알게 된 조트 양이 꼭대기까지 열을 받아 어맨다의 아빠인 월터 파인 씨 사무실로 쳐들어가 무턱대고, 조트 양 특유의 사회부적응적 항의를 퍼붓는다. 월터 파인 씨가 조트 양을 보기에, 난리 피우는 건 난리를 피우는 것이고, 외모가 지극히 훌륭하고 말빨 역시 좋아 저녁 시간대 TV 프로그램을 새롭게 만들어보자고 했고, 명색이 과학자인 조트 양이 단칼에 거절하자 그녀 입장에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높은 보수를 제의하는 터라 그렇게 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매드를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고 국영수 과외도 시켜야 했으니. 다만 요리쇼가 아니라 철저하게 화학과 생물학에 입각한 요리법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이때가 1960년대 초반으로 보인다. 미국의 가정주부들 역시 자존감의 싹이 트기 시작하던 무렵. 조트 양의 프로그램은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그래서 성공하는 것보다 더한 놀라운 행운이 이 모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적 행운. 뭐긴 뭐야? 미국적 행운이면 돈이지. 이상무 화백이 그린 만화 시리즈 가운데 독고탁이란 주인공이 있어서, 고생고생해가며 어린 시절과 소년시절을 겪어 조금 이름이 알려지자 어린 시절에 어쩔 수 없이 또는 사고가 생겨 잃어버린 재벌급 아버지가 나타나 한 방에 인생 역전하는 드라마를 연이어 그린 적이 있다. 그래, 그래. 이게 힌트다. 미국적 기적. 너무 유치한 클리셰. 재미있게 읽다가 한 번에 폭망하는 기분. 뭐 미국 소설에서 그리 드물지 않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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