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폴로의 도서관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2월
평점 :
일시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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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년 도쿄에서 태어난 소설가, 극작가, 연출가인 아베 코보는, 성姓 아베安部가 말해주듯이 일본의 그럴싸한 가문 출신이다. 맞다. 총맞아 죽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같은 성씨다. 의사 아버지와 작가 어머니는 아베가 어린 시절에 만주로 진출한 소위 “개척자” 가족의 일원이었는데, 만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도쿄에서 의과대학을 다녔다. 의대생 시절이었던 1944년에 문과생들은 모두 징집을 당하고 이제 이과생 차례라는 말이 돌자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만주로 돌아가 아버지를 돕다가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소집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삶을 접었다. 패전 후 일본인들이 만주에서 사는 일은 쉽지 않았을 터. 아베는 만주에서 사이다를 만들어 팔아 살다가 가족과 함께 귀국선을 탔다. 가족을 홋카이도의 조부모 댁으로 옮긴 후 다시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아베는 (나도 이런 제도가 있는지 처음 알았는데) 의사가 되지 않겠다는 전제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으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가 뭘 하겠는가? 당연히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49년부터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전후 가난하다 못해 비참한 생활을 하던 작가 아베 코보. 피를 팔아 아베 코보 매혈기를 쓸 정도였던 그가 많고 많은 장르 가운데 초현실주의 문학을 했다니, 거 참. 하여간 이후 아베는 장르는 다르지만 미시마 유키오와 함께 전후 문학의 기수로 알려졌다고 한다. 미시마? 에휴, 그러거나 말거나.


  작품집 《벽》은 아베 코보의 대표작인 모양이다. 2000년에 위덕대학 출판부에서 정가 7천원에 팔던 책을 사반세기만에 마르코폴로에서 정가 2만원으로 새단장해 나왔다고 한다.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이 여섯 편 가운데 제목을 <벽>이라 한 작품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두 이 “벽”이 특별한 상징으로 등장하니 작품집의 제목을 《벽》이라 한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아베 코보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 처음이 <모래의 여자>이고 두번째가 <불타버린 지도>이다. <불타버린 지도>가 생각나지 않고 머리속에서 “용의자의…” 어쩌고저쩌고가 뱅뱅 돌아 결국 검색까지 해봤다. 두 작품 다 흥미롭게 읽었음에도. 이 책들도 읽으면서 뇌 좀 써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그리 낯설거나 어리둥절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억하는데, 《벽》은 완전히 초현실주의 작품 자체이다. 초현실주의는 내가 제일 경원하는 장르라서 만일 이 책도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작품들만 실은 책이란 걸 알았으면 과연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을까 의심스럽지만, 정작 읽어보니 이 정도면 뭐 그냥저냥 읽을 만했다. 아, 이건 내 생각이다. 이런 장르 좋아하시는 분한테는 최상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금도 망설일 필요 없다.

  여섯 편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고, 위키피디아 보니까 제일 중요한 작품으로 삼는 <S. 카르마 씨의 범죄>만 보기로 하자.


  화자 ‘나’와 ‘나’의 도플갱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나’ S. 카르마가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아침에 이야기는 시작한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가서 수프 두 그릇과 빵 한 조각 반을 먹었는데, 먹다보니 ‘나’가 평소에 먹던 양이 아니다. 하여간 먹어 치우고 외상 장부에 서명을 하려는데, 아뿔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거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방법이 있지. 서둘지 않고 지갑을 꺼냈다. 어, 이름이 쓰여 있는 명함이 이날 따라 한 장도 없다. 신분증을 찾아봐도 흑백 사진까지 다 들어 있는데 이름이 적힌 부분만 지워져 있다. 주머니에 아버지가 보낸 편지가 있어 그걸 펴 봐도 이름을 쓴 곳만 잉크가 번져 알아볼 수 없다. 재킷 안주머니에 금실로 수를 놓은 이름도 실이 다 풀려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날 아침 밥값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왔다. 방에 들어와 봐도 이름이 새겨진 모든 장소와 물건에서 아무 흔적을 찾지 못한다. 창 밖에서 속절없이 출근 사이렌이 울렸다. 근데 보니까 책상 위에 있을 가방도 없다. 며칠 전에 3개월 할부로 산 소가죽 가방. 가방 속엔 중요한 서류가 잔뜩 들어 있는데 이걸 어쩌나? 할 수 없지.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은 구두도 어딘가로 가고 없어 허름한 검은 신을 신은 채 걸어서 출근했다.

  현관에 들어가서, 당시에 일본 회사는 현관에 들어가면 벽에 커다란 이름표가 있어서 특정인의 이름을 적어둔 모양인데, 이 이름표의 세번째 줄 왼쪽에서 두번째 적힌 S. 카르마가 ‘나’의 이름일까 잠시 궁금해한다. ‘나’의 책상이 있는 곳은 건물의 2층 3호실. 방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어라, 내 의자에는 내가 아닌 또다른 내가 앉아 있다. ‘나’는 소름이 끼치고 수치심이 들어 문 뒤로 몸을 숨긴다.

  타이피스트 Y양에게 보고서를 설명해주고 있는 또다른 나. 그의 책상 위에는 ‘나’가 아침에 찾았던 소가죽 가방이 놓여있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왼손으로는 Y양의 무릎을 더듬는 것을 보니까 책상에 앉아 있는 것 역시 틀림없는 ‘나’이다. 음. 내가 나 자신이 아닌가?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당연히 또다른 나와 ‘나’의 눈이 마주친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나도 그를 알아본다. 틀림없는 ‘나’이다. 근데 한쪽 눈을 가리고 보니까 ‘또 다른 나’의 정체가 보인다. 그건 ‘나’의 명함이었다.

  “N 화재보험. 자료과. S. 카르마”

  명함은 ‘나’에게 주장한다. 처음부터 이곳은 나의 영역이오. 솔직히 말해 난 당신 같은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견딜 수 없소!

  ‘나’는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빠져나와 집으로 간다. 방에 혼자 있자니 외로움과 공허함이 밀려든다. 명함이 돌아오면 나는 이 방에서도 쫓겨날까? 이름을 잃어버렸으니 명함과 비교해보면 만사가 불리하다. 가슴에 뻑뻑한 통증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까, 에구머니, 가슴이 정말로 뻥 뚫렸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나’는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 접수창구에서 건장한 사무 주임이 또 이름을 묻는다. 이름을 말하면 나중에 명함이 어떤 까탈을 잡을 지 몰라 가짜 이름을 대기로 한다. 카르테. 아닌 거 같다. 아르테. 조금 어색하다. 그래서 아르마. 이것도 아냐. 아쿠마. 좋다, 아쿠마는 근데 악마惡魔라는 뜻이다. 사무주임이 대기실에서 기다리라 한다. ‘나’는 잡지를 편다. 잡지 속에 레이몽 라디게의 초상화가 있다. 허 참. 민음사세계문학전집 321번. 레이몽 라디게의 <육체의 악마>. 무진장 잘 어울린다. 페이지를 더 넘겨보니 황량한 광야 사진이 나온다. 왼쪽 중앙에 사구砂丘가 있고 사구 기슭에 띠 모양의 황사 소용돌이가 있는. 근데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까 내가 사진 속에 실제로 들어가 있다. 조금 더 오래 보고 있으니, 그건 아니고, 사진이 내 뚫려 비어버린 가슴 속으로 들어와버렸다. 가슴이 비었다는 건, 흉곽이 진공상태가 되었다는 것이고, 상당한 수준의 음압이 발생해서 잡지의 사진이 통째로, 종이라는 물질을 제외한 사진의 형상만 ‘나’의 가슴 속으로 쏙 들어와 버린 것. 정말로 얼굴이 새카맣고 키가 큰 의사가 가슴의 흉압을 측정하자 단위는 나오지 않지만 하여간 130, 끔찍한 저압이란다. 의사와 사무주임은 ‘나’가 자신들마저 흡수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둘이서 ‘나’를 번쩍 들어 2층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2층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고, 다치지도 않고 비척거리며 일어난 ‘나’. 이번엔 동물원으로 향한다. 많고 많은 동물 가운데 사자가 ‘나’의 눈을 보더니 애수에 찬 모습으로 발발 긴다. 그러더니 사라져버렸다. 다른 동물은 안 그러는데 이번엔 또 낙타가 ‘나’한테 설설 긴다. 왜 그럴까? 아하, ‘나’의 가슴 속 황야 사진, 넓고 넓은 초원지대에 사는 동물인 사자와 낙타만 ‘나’한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다.

  어떠셔? 더 할까? ‘나’ S. 카르마 씨는 이렇게 왔다리 갔다리,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놀라지 마시라, 바벨탑까지 간다. 거기 누가 있느냐고? 별 인간 다 있다. 당연히 여호와를 비롯해서 수 세기 동안 연옥을 팔아먹은 단테, 놀랍게도 힛솔리니, 그리고 명색이 초현실주의 소설이니까 앙드레 브르통까지. 사람이 이 바벨탑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벽.” 벽을 통과하는 방법은? 아마 유일하게 말 그대로 대가리 박치기를 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나올 때는? 안 알려줌. 그러면 S, 카르마 씨는 어떤 범죄를 저지른 거냐고? 마찬가지로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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