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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는 잠들고 ㅣ 더봄 중국문학 전집 12
거페이 지음, 유소영 옮김 / 더봄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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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페이의 “강남 3부작” 가운데 <복사꽃 그대 얼굴>에 이은 2부. 무대는 전작 푸지의 상급 현인 메이청현縣. 거페이가 장시성江西省 사람이라 혹시 푸지普濟가 파양호 남쪽에 있는 푸저우抚州시市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1부 <복사꽃 그대 얼굴>의 주인공 루슈미의 아들 탄궁다譚功達, 우리말 발음으로 담공달 씨가 2부 <산하는 잠들고>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40여 년 전 메이청 현 서쪽 산간 평지에 있는 정원이 딸린 영국식 호화스러운 건물이지만 당시에 현의 감옥으로 쓰던 곳에서 슈미 여사가 1년 6개월 동안 수감되었는데 이때 옥 속에서 몸을 풀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이가 오늘날의 담공달 씨, 지금은 마흔살이 훌쩍 넘은 진짜, 진짜 모태솔로, 즉 숫총각이면서 노총각인 메이청 현장이며, 후에 현위원회 서기를 겸임하는 탄궁다 선생이다. 경자년 한여름인 7월3일생. 경자년? 1900년생, 노베첸토. 근데 문제가 있다. 책에 틀림없이 루슈미 여사가 경자년에 탄궁다를 낳았으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바람에 옥졸 메이스광이 데려가서 뱃사공 부자父子 탄수이진과 탄쓰에게 주었고, 이들은 아이를 탄쓰의 아들이라 생각하며 키웠다. 맞다. 그랬다. 그러다 탄쓰가 청나라 군인한테 죽임을 당해 할아버지 혼자 키우게 됐고, 아이가 여섯 살일 적에 어느 하루 길을 잃어 거리를 헤매는 것을 역시 자손이 없는 메이스광 선생이 포구에서 발견해 키우면서 정을 함빡 쏟았다. 아이를 잃은 탄 할아버지가 눈물바람을 하며 온갖 곳을 찾아다녀 드디어 아이를 발견해, 이 아이를 놓고 소송까지 갈 뻔한 것을, 그러면 탄 씨 성을 주어 탄 가문의 대를 잇되, 양육은 메이 집안에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아이는 그날로 탄위안바오가 되었다가 위안바오元寶라는 이름이 지극히 봉건적이라서 큰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 훗날 위안바오 스스로 궁다功達로 개명을 했고 이름이 좋아서 그랬는지 메이청 현장까지 올랐다. 그런데, 뒤에 또 보면 구체적으로 아라비아 숫자까지 써서 1912년생이라고 딱 적어 놓았으니 경자 1900년 노베첸토가 아니라 1912년 임자생이 맞다.
거페이가 좀 헛갈린 듯. 왜 사소한 거 가지고 목숨 거냐고 하실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자 주인공이자 메이청현장 탄궁다의 비서이며 서로 마음, 순전히 마음으로만 깊고 깊은 사랑을 하게 되는 야오페이페이姚佩佩가 등장하면 좀 복잡해져서 그렇다. 야오페이페이는 상하이의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다. 해방이 되어, 즉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페이페이의 아버지는 자본가로 낙인이 찍혀 어느날 늦은 오후에 야오페이페이를 데리고 나가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을 정도로 사준 다음날 총살형을 당한다. 이날 아침 페이페이가 학교에 가기 전에 자기를 품에 꼭 안아주던 엄마는 딸을 학교에 보낸 사이에 집에서 목을 매달아 죽어버리고. 졸지에 고아가 된 신세의 페이페이. 이때 메이청 현에서 소학교 교사와 아이 없이 결혼생활을 하던 고모가 득달같이 올라와, 사실은 친척 가운데 누구보다 먼저 집에 남은 가구나 패물 같은 재산을 거머쥐려 했건만 벌써 다른 친척들이 다 들고 가고 애먼 야오페이페이가 홀로 덩그러니 남아, 눈물을 머금고 데려다 키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거다. 몇 해 갖은 구박을 해가며 하여튼 함께 살기는 했다. 그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까짓 것을 키워봤자 도무지 보탬이 될 거 같지 않아 그냥 쫓아내 버렸고 갈 곳 없는 페이페이는 뒷골목 목욕탕 카운터에서 셈가지 파는 일을 했다. 좋게 말해서 박스오피스에 앉았다. 벌거벗은 남자 전용 목욕탕에서. 한겨울에 탄 현장이 과거의 혁명 동지이자 훗날 처절한 배신자가 될 바이팅위와 함께 공동목욕탕에 갔을 때 성질 겁나게 까칠한 소녀 야오페이페이를 눈 여겨 봤다가 나중에 현사무소 사환을 거쳐 비서까지 올렸던 거다.
전혀 여성으로 볼 마음도 없었던 탄궁다 현장이 무심결에 낙서를 한다.
1961 – 1938 = 23
1938 – 1912 = 26
27 – 23 = 4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61년. 1938년생 야오페이페이, 본명 야오페이쥔姚佩菊, 가슴에 국화를 단 아가씨 나이가 스물셋, 23세. 1912년생인 자신, 탄궁다와의 나이 차이가 26년이란 거다. 마지막 27 – 23 = 4는 안 알려줌. 그런데 정말로 탄궁다의 마음에 페이페이가 여자로 들어오지 않은 건 맞다. 앞부분에도 이런 뺄셈 낙서가 나오는데 탄궁다는 자신이 의식도 하지 않고 그저 이런 숫자 더하기, 빼기를 쓰는 습관이 있다. 당연히 스스로 의식은 하지 못하지만 저 무의식 중에 무겁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겠다. 그러나 탄궁다는 애초에 여자를 파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동성애 혹은 발기부전 증세가 있거나 애초 성불구도 아니다. 저 천하의 배신자 바이팅위가 자기의 어리디어린 조카딸을 소개해 결혼하기 바로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뒤편에 가면 아이 하나 딸린 가난한 극성스런 과부가 덮치는 바람에 결혼까지 해버려 아이도 하나 낳는다. 죽으나 사나 사랑은 오직 하나 야오페이페이를 향하지만 과부와 살림을 합칠 때까지 그런 줄도 몰랐다. 뭐 그런 사람도 있겠지. 인구가 워낙 많잖아.
거페이의 “강남 3부작”은 유토피아, 이백의 싯귀마따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근데 이게 말처럼 되는 거야? 아니, 세상에 한 곳이라도 있기는 있는 건가? 말 그대로 별유천지이건만 비인간, 인간은 빼놓고 얘기하자니 말이지. 1부 <복사꽃 그대 얼굴>에서도 다양한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해 몇 사람들이 발버둥을 친다. 슈미의 아버지 루칸 선생부터 시작해서, 진품인줄 알고 살았던 한유의 가짜 그림 <도원도> 이야기. 그리고 슈미 엄마의 혼외 연인이자 혁명가인 장자위안 역시 혁명을 통해 새 세상을 추구했으니 그게 바로 유토피아 아니겠느냐, 하는 것. 슈미 역시 흘러흘러 화자서라는 호숫가 마을의, 척 보면 유토피아와 가장 흡사한 공동체, 그러나 도둑 소굴까지 들어갔던 거다. 그러나 별유천지비인간인줄 알았던 화자서에서도 피와 살이 튀는 살인과 권력투쟁과 슈미를 향한 성폭행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렇게 참담할 수가.
평생을 유토피아 건설에 정신을 쏟은 슈미의 아들 탄궁다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마오 홍군에 들어가 혁명전쟁에 투신하다 이제 메이청현의 현장으로 부임한 탄궁다는 메이청현을 중국에서 가장 복된 땅으로 만들기 위하여 ①푸지 호수에 댐을 만들어 전기를 생산해 메이청현과 푸지에 광명을 가져오려 하며, ② 장강과 연결한 수로를 건설해 유통의 편리함과 더불어 농업용수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도 모자라 ③ 중국인의 최애 식품인 돼지 사육의 부산물인 분뇨에서 메탄가스를 농축해 연료와 기타 생산공장 운영에 사용하려 한다. 당연히 세가지 중점사업은 현민들과 현사무소 주요 간부들의 저항을 받으며, 심지어 작은 규모의 폭동까지 일어나고, 그걸 구경하다가 떠밀려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죽는 사람까지 생긴다. 이때 죽은 남자의 아내, 과부가 훗날 마흔살이 훌쩍 넘은 탄궁다의 동정을 수거해서 기어이 남편으로 삼는다니까.
그러나 엄마 슈미에 이어 유토피아 건설로 자기 나이 드는 지도 모르고 사업에 몰두한 탄궁다를 기다리는 것은 예전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전우, 탄 현장의 직속 부하들의 배반, 그에 따른 추락뿐이었다. 자신은 몰락하고, 비서인 야오페이페이는 모실 상사가 몰락을 한 와중에도 현에서 성省으로, 당원이 되어 영전을 하려다가 인생이 삐그덕, 탄 전 현장보다 더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1부에서 슈미를 다시 보는 것처럼.
탄궁다는 베이징에 있는 은인이 힘을 써주어 성 일대를 관찰하는 직을 얻어 길을 떠나 작은 마을에 도착하는데, 에그머니, 그곳이 예전에 슈미 엄마가 자신을 임신했던 화자서. 슈미 엄마 시절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이상적인 마을, 이상향, 별유천지비인간이 실체화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다. 애초에 무릉도원은 비인간, 인간이 없어야 가능하다고. 탄궁다는 자신이 본 이상적 공산주의가 실현되는 곳, 화자서의 본질을 알아낸다. 당연히 비극이지 뭐.
재미있다. <복사꽃 그대 얼굴>만큼은 아니지만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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