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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열기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93
엘리자베스 보웬 지음, 정연희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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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보웬. 태어나자마자 백년을 산 1899년생. 여섯 달만 뒤에 나왔어도 ‘노베첸타Novecenta’가 될 뻔했다. 앵글로-아일랜드인. 즉 저 윗대 조상이 16세기 후반에 웨일스에서 솔가해 아일랜드에 와 정착한 상류계급 집안이다. 외가는 한 술 더 떠서, 엄마 플로렌스 이사벨라 포메로이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아일랜드의 자작 집안이었단다. 집안 내력만 소개해도 A4 용지 한 장은 넘겠지만, 재미도 없는 소설의 독후감을 쓰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하여간 엘리자베스가 여덟 살 때 법정변호사인 아빠 헨리 찰스 콜 보웬이 정신 건강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자, 엄마가 외동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켄트 지역에서 살았지만 엄마마저 1912년, 엘리자베스가 열세 살 때 세상 하직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이모 집에 살면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재미있는 건 지금부터. 엘리자베스 도로시아 콜 보웬은 스물네 살 되던 1923년에 교육행정가 앨런 카메론을 만나 결혼했다는 거. 엘리자베스는 훗날 자신의 결혼생활에 완전히 만족했다고 기술했으니 어떻든 행복한 부부였을 것이다. 근데 이 부부는 한 번도 서로의 성적 교감을 나눈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완전한 섹스리스 부부였던 것. 피가 펄펄 끓는 20대 팔팔한 여성 엘리자베스는 그래서 그랬는지 이후 적지 않은 남성들과 혼외정사를 즐겼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으며, 짓궂기도 하지, 상대방의 이름도 실명으로 써 놓았는 바, 무려 30년간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일곱 살 연하의 캐나다 외교관 찰스 리치, 아일랜드 (단편)소설가 숀 오팔론, 미국 시인 매이 새턴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부는 1952년에 보살 남편 카메론에 해당하는 얘기로,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검은 머리가 파뿌리는 아닐지언정 회색이 될 때까지 “완전히 만족한” 부부로 살았다고 주장했다.
1930년에 아버지는 그때까지 아일랜드에서 살다가 죽으면서 보웬 저택(Bowen’s Court)를 딸에게 상속해주어 엘리자베스는 살기는 영국에서 살면서도 이후 휴가 때는 종종 아일랜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보웬은 이곳에서 영국과 미국의 여성 작가들을 종종 초대하기도 했는데 인물이 다 빵빵하다. 버지니아 울프, 유도라 웰티, 카슨 매컬러스, 아이리스 머독. 우와, 눈 나오지? 원래부터 은수저 물고 나온 여사님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보웬스 코트, 보웬 저택이라고 하는 것이 세칭 Country House라고 하는 것으로, 저택도 저택 나름이지 워낙 규모가 커서 이걸 유지하는 비용이 무지막지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보웬은 영국과 미국을 망라해 강의를 하는 등 죽을 똥을 쌌던 모양이다.
이이의 중요한 경력 가운데 하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보부에서 일했다는 거.
재미도 없다면서 왜 엘리자베스 보웬의 사생활을 자세하게 소개했느냐 하면 작품 속에서 주인공 스텔라의 아들 로더릭이 로더릭의 아버지이자 스텔라의 전남편인 톰의 사촌한테, 로더릭은 이런 당숙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일랜드의 저택 Country House를 상속받는 일이 생기고, 작품 속에서 현재 스텔라의 직업이 영국 정보부에서 중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닌 일을 하고 있다는 점, 저택을 상속해준 사촌의 아내가 정신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 점, 조연 급인 루이는 남편이 전쟁통에 징집되어 인도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여러 남자를 만나다가 덜커덕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게 임신을 하면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다는 점 등등 작가의 바이오와 적지 않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재미없는 작품이나마 이런 점을 미리 알아두면 그래도 조금은 재미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심사숙고했기 때문이니, 이 아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정성일쏘냐.
첫 장면은 1942년 9월의 첫 일요일 오후 런던 리젠트파크 야외 공연장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연주자들이 모여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공연을 한다. 여기에 스물일곱 정도에 헝클어진 머리칼에 퉁방울은 아니지만 큰 눈을 하고 인조 낙타털 코트를 입은 소련 당원 스타일의 여성 루이가 앉아 있다. 조금 후 한 자리 건너, 둘 사이의 자리는 공석인 채로, 38세에서 39세로 보이는 갈색 중절모에 회색 정장을 입은 찡그린 얼굴의 사내 해리슨이 앉아 있다. 남편이 인도로 파병되어 독일해군의 유보트가 두려워 왕래 및 편지가 금지되어 감감무소식인 젊은 여성 루이는 비록 좌우의 크기가 다른 짝눈이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포스가 풍기는 남자한테 끌리는 기분이 들어 접근한다. 그러나 결론은 뺀찌. 해리슨이 여덟 시에 데이트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루이를 물리치고 간 곳이 영국 정보부에서 일하는 주인공 스텔라의 아파트이다.
스텔라는 일찍 결혼해 일찍 파국을 맞았다. 근데 이혼을 하자마자 남편이 죽는 바람에 괜히 호적초본에 이혼 경력만 한 줄 보탠 꼴이 됐다. 이 부부의 이혼 내력은, 내가 읽기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작품 내내 스텔라와 스무살 아들 로더릭, 그리고 로드니 가문의 화제거리가 되는 바람에 여기서는 소개하지 않겠다. 지금 스텔라는 젊은 여성이 평생 독수공방할 수 없는 일이라 짬을 내서 자연스럽게 연애를 했던 바, 현재는 로버트 켈웨이라고 하는 남자와 뜨거운 시절이다.
로버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마자 벨기에 근방 프랑스 땅에서 벌어진 됭케르크 전투에 참전해 용맹무지하게 임하다가, 이 전투 상황이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대강 아시겠지만, 영국군의 패배로 끝나면서, 뒤로 돌아 돌격할 당시 배에 오르는 동안 부상을 당해 사실상 의병 제대한 신분이다. 됭케르크는 영불해협 근처라서 프랑스 내륙으로 퇴각하는 것보다 배 타고 영국으로 튀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하여간 이때 부상을 당해 수개월간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했고, 후유증으로 알게 모르게 다리를 절게 된다. 전시에 그냥 놀고먹을 수 없어 취직을 했고, 눈치상 영국 정부 또는 군에 소속되어 있는 정보기관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끝까지 어떤 기관인지, 정말 그런 기관에서 일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내용을 다 알고 스텔라를 찾아온 진짜 영국 핵심 정보부 요원이 바로 짝눈이지만 어딘가 매력을 뿜어내는 사나이 해리슨이었다. 근데 알고보니까 해리슨이 은근히 스텔라를 좋아한 거 아니냐는 말이지. 해리슨은 사실 가명이다. 책이 거의 끝나갈쯤 해서 본명이 드러나지만 본명이 뭔지 말하고 싶지 않다. 이 해리슨이 은근히 스텔라를 좋아하고 있는 눈치. 아일랜드 로드니 가문에 일차 왕림한 바 있고, 스텔라의 아들인 로더릭의 당숙과 친교를 맺어 저택에 놀러가, 이때 당숙이 죽은 다음에 저택을 로더릭한테 유증하라고 꼬드긴 사람이 해리슨 아닐까 싶게 만들기도 한다. 하여간 이런 해리슨이, 스텔라는 전에 이 당숙 초상 치룰 때 딱 한 번 본 적밖에 없을 뿐인데도, 그냥 찾아갔다. 스텔라는 로버트가 왕래하기 좋게 하기 위하여 현관문도 슬쩍 열어놓고, 방문도 잠그지 않았는데 이렇게 신작로 닦아 놓으니까 나병 환자가 먼저 들어선 꼴이 됐다.
이렇게 마주 앉게 된 스텔라와 해리슨. 이제 폭탄이 떨어진다.
해리슨이 하는 말이, 당신도 조국의 정보국을 위하여 일하지 않느냐. 로버트도 정보 일을 하고 있고. 이제 문제는 로버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적국의 이익을 위하여 제공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가 갖고 있다. 아직 내 선에서 이 일을 덮을 수 있지만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스텔라,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덜 피해가 갈 방법은 가능한 빨리 로버트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이다. 한 달 줄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렇게 “요약”을 해 놓으면 흥미진진하겠지? 그러나 실상은 우리의 엘리자베스 보웬이 말이 너무 많다. 본문이 543쪽에서 끝나는데 독자가 기다리는 정보, 첩보물의 드라마틱한 전개와 반전은 눈알을 뒤집어 까고 찾아도 전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스텔라의 로버트에 대한 감정선이 어떻게 변하는지, 로버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스텔라의 비밀을 지키면서 로버트의 집안을 방문하고, 아들 로더릭의 상속 재산을 돌아보기 위하여 아일랜드 저택에도 가보고, 이왕 나왔으니까 그것도 초장에 나왔으니까 스물일곱 정도의 생과부 루이와 스텔라 그리고 해리슨도 한 번은 더 만나게 해야겠고, 이렇게 스토리는 산만하게, 산처럼 크다는 뜻의 ‘산만하게’가 아니라, 난삽하게 벌어지고, 독자는 가뜩이나 543페이지로 많은 분량에다 페이지마다 꽉 들어찬 많고 많은 활자에 여차하면 질식해버리고 만다.
책을 낸 출판사와 애써서 번역을 한 역자에게 미안한 말씀이지만, 정말 읽기 쉽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문장이 눈에 와 박히지도 않았으니, 당신한테 추천도 못하겠지만, 작가의 명성이 떠르르해 아일랜드 문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몇 년도인가 노벨문학상 강력 후보였으며, 부커상 심사위원이었던 작가임을 유념하시어, 보잘것없는 아마추어가 쓴 독후감에 현혹되지 마시고 읽어 보실 분은 읽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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