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여관 범우희곡선 27
이강백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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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에 국립극단, 오태석 연출로 댤오름극장에서 초연한 작품. 밀레니엄 또는 Y2K로 뭔지 모르게 좀 싱숭생숭했던 사회분위기 속에서 작품 구상을 해 쓰기 시작했지만 몇 년 동안 손을 놓고 살았단다. 드디어 21세기가 도래했으나 자신이 애초에 쓰려고 했던 당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지금 보면 가장 큰 건 아니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지만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인 “세대 갈등”에 대해 더는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던지 <황색여관>을 썼다. 극작가가 보통 극작가가 아니라서, 우리나라 연극계의 지존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라 집필을 마치자마자 그해 당장 무대에 올렸다. 2025년. 현재 우리나라를 보면 이까짓 세대 갈등은 기원 몇 세기 전부터 유구하게,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던 전통이니 그렇다 치고, 빌어먹을 위정자들이 정치 목적상 국민을 이쪽 저쪽, 쉽게 말해 선한 우리와 악한 너네로 짝, 모세가 염불을 해 홍해 바다를 갈라놓듯 짝, 갈라놓은 것이 훨씬, 훨씬, 그리고 훨씬 더 심각하지 않을까 싶다. 보수 1찍과 수구 2찍의 대결을 설명 목적상 진보와 보수라고도 칭하는 거 같은데, 이거야말로 웃겼다. 웃겨도 보통 웃긴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 진보가 있댜? 내 눈엔 이짝은 보수, 저짝은 수구. (앗, 이 독후감 쓰고 사흘 지나 이짝 당 당수가 말한다. “우리 당은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라 중도 보수당”이었다고. 이 자들도 자기들의 정체가 보수인 건 알고 있었군. 흠.) 이것들이 애꿎은 시민들을 선동, 현혹해 심각한 수준으로 갈라놓았다. 세대 갈등보다 이짝, 저짝 갈등이 훨씬 심각하지만, 이강백이 이 희곡을 쓴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이짝, 저짝 갈등이 그리 우려스럽지는 않았던 듯하다. 내가 그때를 돌아봐도 그렇다. 그러나 당시에도 두 짝의 싸움은 사회 밑바닥에 이미 파종되어 있던 것이었으며 그때 벌써 싹을 틔워 적어도 묘목 수준까지 컸었는데 눈이 어두워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여간 이강백은 자기 주특기, 현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빗대어 우화화寓話化하는 것. 하기는 연극이라는 장르가 실제/자연을 모방하여 무대 위에서 그것을 다른 형태로 우화, 은유, 변용시켜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강백은 유신시대 때부터 독특하고, 과하게 격하지 않고, (유신, 5공 같은 독재자 치하에서 특히 빠지기 쉬운 골짜기인)초현실성/추상성 없이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선다. 이 작품 <황색여관>도 마찬가지다.


  사방 80킬로미터, 그러니까 사방 2백리,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재면 합해서 4백리에 아무것도 없이,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딱 하나 서 있는 건물이 황색여관이다. 벌판도 그냥 벌판이 아니라 사시사철 진한 황사바람이 몰아쳐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과 목에 모래가 끼고, 눈은 아침 저녁을 가리지 않고 따끔거리는 황무지.

  이곳에 딱 하나 서 있어서 지붕 위에 “황색여관”이라고 네온사인 간판이 밤마다 유일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에 나오는 적막한 성 가브리엘 고원은 에덴 동산일 정도이다. 여관은, 21세기 모텔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마 생각하기 어려울 터인데, 시멘트를 바른 앞마당을 둘러싸고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방엔 화장실도 샤워실도 없다. 저 대문 옆의 공동 화장실과 찬물만 나오는 공동 샤워실에서 볼 일을 봐야 하고, 간단한 세수 정도는 마당에 놓은 수도꼭지에서 해결해야 한다. 나 대학 다닐 때도 이런 여관이 학교 근방에 있어서 술이 과해 꽐라가 된 아이들이 만날 요와 이불 위에 먹은 걸 퍼질러 토해놓고는 했으며, 아줌마 교양영화 좀 틀어주세요, 지붕이 날아가라 소리를 지르면 3분 뒤에 여관의 중앙관리실에서 송출하는 포르노라고도 부르고 쌕쌕이라고도 불렀던 교양영화가 브라운관 18인치 TV를 통해 흘러나왔으며, 또다시 3분쯤이 더 지나면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주와 막걸리를 시멘트 봉지 가득히 사들고 온 사회학과 다니는 애새끼가 자기 오기도 전에 쌕쌕이 시작했다고 투덜대기 시작했던 기억 또는 추억. 말이 기억이고 추억이지 당시엔 환장이었던 기억 또는 추억.

  희곡을 읽어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지만, 황색여관의 주인이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서 여관은 날이면 날마다 손님이 찼는데, 이들은 숙박료 말고 주인한테 가욋돈을 듬뿍 안겨주는 놀라운 일들을 날이면 날마다, 아니지, 이 여관에는 낮손님이 없으니까, 밤이면 밤마다 이런 일이 생겨, 돈을 함빡 벌었다. 사업이 잘 되면 당연히 투자를 해야 하는 법. 주인은 이 여관 지붕을 뜯어 2층을 올려, 1층에 비하면 뻑적지근한 큰 방, 개별 화장실과 샤워실을 비치한 비싼 방을 들인 후 새로이 지붕을 올려 그곳에 “황색여관” 네온사인을 달았던 거다. 화장실, 샤워실이 있는 넓은 방이니 당연히 숙박료가 1층에 비해 무지막지 했지만, 그래도 손님은 늘 있었다.


  앞에서 이 작품을 쓸 때, 이강백은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세대갈등이라 보았다고 했다. 여관에서 세대갈등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1층과 2층이다. 2층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공직 은퇴자(전직 장관), 변호사, 사업가로 사회의 대표적인 나이 많은 부르주아로 생각하면 여지없다. 반면에 1층은 배선공, 배관공, 외판원 등 젊은 무산자계급. 유일하게 있는 집 아들이자 대학생이 1층에 숙박한다. 이 대학생은 계급은 (쁘띠)부르주아의 자제이지만 자기 쓸 돈이 언제나 많지는 않은 “젊은” 계층이다. 2007년이면 지금과 별로 다를 것 없는 후기자본주의. 사실 이 작품에 갈등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자본, 나이가 많고 적고가 아니라, 돈이 있고 없고에 달렸다. 얼핏 보면 부유한 장년/노년과 가난한 청년으로 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면 가난한 노년이 또한 얼마나 많은 지.

  손님이 여관에 들어와 방을 선택할 때부터 계급은 정해진다. 그걸 (학생을 제외한) 무산자 청년들은 차별로 인식한다. 방을 선택하는 일은 돈이 있고 없고 간에 확연히, 그리고 제일 앞서 일어나며, 이 정도는 비행기의 1st 클래스석과 비즈니스석, 이코노미석처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나눔으로 인식하지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못 말리게 기분 나쁘게 하는 게 ‘먹는 거’다. 손님이 들고, 시간이 조금 지나, 사방 2백리에 아무 시설도 없어서 이 여관에서 주는 밥만 먹어야 하건만, A코스와 B코스의 요리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A코스는 각종 기본반찬에 소갈비 찜, 닭고기 볶음, 바닷게와 새우를 섞어 끓인 해물 찌게, 송이버섯 구이가 나오고, B코스는 김치와 간장만 담은 비빔밥이다. 당연히 2층 손님은 자연스럽게 전부 A코스를 선택하고 1층 손님들은 울화를 쏟아내며 B코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이제 여독을 풀기 위해 술 한 잔. 여관에서는 소주, 맥주, 막걸리, 이런 술 따위는 팔지 않는다. 유일하게 위스키. 12년, 17년, 21년 묵은 위스키만 판다. 2층 손님 가운데 사업가는 활수하게 21년 묵은 위스키를 사서 2층 손님들하고 맛나게 홀짝거린다. 1층 손님은 12년 묵은 것도 언감생심, 침만 꿀꺽 삼키기만 할 뿐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이고, 위스키? 5년짜리면 어떻고 8년짜리면 어떠냐. 그냥 술이면 되는 것이지 숙성 햇수가 무슨. 졸리와 피트 부부가 주연한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에서 이 부자 부부가 한바탕 쌈박질을 한 다음에 마시는 술도 조니 워커 레드, 10년 미만 숙성시킨, 숙성기간 미표시 위스키인데 우짜 고급 위스키만 그리 좋아들 하는지. 하여간 1층 무산자들이 심통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한다.

  밤이 깊어지자 이제 본격적으로 객고를 풀기 위하여 몸 파는 여자 셋을 데려온다. 늙은 여자, 젊은 여자, 그리고 어린 여자. 이들의 면접을 위하여 다시 식당으로 내려온 윗층 손님들은 아랫층 손님들은 생각하지도 못할 돈을 주고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 이렇게 둘을 데리고 올라가 3대 2로 쇼를 벌인다. 1층 손님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이 화딱지가 나서 늙은 여자를 자신과 계급이 다르지만 같은 청년 계층인 학생에게 넘겨주고, 꼭지가 먼저 돈 배선공과 배관공이 먼저 2층에 올라가 사업가를 때려 죽여버린다. 이렇게 살육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나, 아무리 늙은 인간들이라 해도 여태 살아온 전력이 있지, 이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서 1층 젊은이들을 차례차례 죽여버려, 몸 파는 여자들이 혼비백산 도망간 여관에서 살아남은 손님은 하나도 없다. 다 죽었다. 싹 죽어버렸다.

  쇼는 끝났다. 왕서방이 등장해 돈을 버는 시간만 남았다. <황색여관>에서 왕서방은 여관 주인 부부. 이들이 그동안 떼돈을 번 건, 숙박비가 아니라 노인/중년과 청년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은 다음에 이들의 가방과 주머니를 털어 거저 얻은 돈 때문이었다. 이 드런 꼴을 보다 못한 주인의 처제와 주방장은 밤이면 밤마다 쏟아져 나오는 시체들을 더는 견디지 못하여 여관을 나가겠다고 하고, 이들 없이 여관의 운영이 쉽지 않은 주인 부부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을 설득하다가, 급기야 처제와 주방장이 손님 가운데 한 명만 살릴 수 있다면 이 여관을 통째로 넘겨주겠다고 약속한다.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처제는 과연 이 세대간의 살육전을 멈출 수 있을까? 하다못해 세대갈등의 와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구해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지? 아니라고? 읽어보면 안다.

  아무쪼록 세대갈등이 아니라 202X년의 우리나라에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소위 진영갈등, 모세가 갈라놓은 홍해바다의 좁은 길을 따라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얼른, 서둘러 통과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향한 즉시 그랬듯이, 다시 바다는 바다끼리, 바다 속 물고기는 물고기끼리, 바다 포유류는 바다 포유류끼리 얼른얼른, 유사이래 단 한 번도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서로 미워하지 말고, 미워해도 지금처럼 극단적인 미움 말고, 그래도 좀 덜 미워해 가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그런 세상을 202X년에는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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