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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ㅣ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2
앨리 스미스 지음, 이예원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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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브스 가족을 소개한다. 가장 클리브스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잉글랜드 콘월 지방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그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전쟁을 겪은 다음에 클리브스 선생은 독일의 G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총을 들고 전투를 경험한 사람의 80퍼센트 이상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PTSD가 이런 방식으로 발현된 거였다.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선량한 잉글랜드 시골 사람다운 무뚝뚝한 친절함을 가진 따뜻한 이웃으로 기억될 예정이다.
선생은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 벗은 아내와의 사이에 딸 둘을 두었다. 맏이 아이리스는 머리통이 점점 커져가며 삶의 방식이 자유분방해졌다. 학업은 일찌감치 작파한 것처럼 보이고, 10대 후반부터 핵무장 반대자로 나서서 원폭, 수폭에 반대하는 행진 시위에 참가하기 위하여 표어가 큼지막하게 적힌 더플코트를 구입해 아버지의 복장을 뒤집어 놓더니, 직장 동료들을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아빠한테 “살해하지 말지어다!” 예수님 말씀을 풀었다가 급기야 손찌검을 당하고 다음 날 아침에 보따리 싸서 집을 나가버렸다. 이후 아버지를 본 것은 매장을 앞두고 관에 누워있는 모습이었고. 동네에서도 평판이 빤했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워낙 성격이 좋고 활발하여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진짜 오랜만에 고향집에 왔을 때, 거의 모든 이웃사람들이 아이리스 곁에 모여서 즐겁게 이들 가족과 고인을 추모했을 정도이다. 이후 아버지의 집을 동생 소피아가 구입하기 전까지 방이 열 몇 개가 있는 저택에 뜻을 같이하는 반전 반핵운동 동료, 쉬운 얘기로 히피들을 끌어들여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똑 소리 나는 동생 소피아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도 잘해, 사회성도 좋아, 생기기도 예쁜 엄친딸 성향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여자가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면 그걸 눈꼴 시어 하는 인간들이 많았음에도 성인이 되었을 때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는 작지 않은 규모의 회사를 차려 제법 돈도 벌었다. 그래서 아버지 사후 언니와 공동으로 소유하던 큰 집도 자신이 구입해, 그 넓은 집에 혼자 살며 노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젊은 시절 콘월에서 휴가를 보내러 온 나이든 유부남이자 미술 애호가와 두 번째 만나 크롬웰가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섹스를 하고 아들 아서를 임신한다. 당연히 이에 대하여 소피아는 한 번도 후회해본 적도 없고, 임신마저 당연한 일, 아니면 적어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잘 생긴 희극배우 고드프리 게이블을 만나 결혼한다. 고드프리는 예명이고 본명이 레이먼드 폰즈. 그러면 소피아의 이름은 소피아 게이블이나 소피아 폰즈가 되어야 하건만, 소피아는 아버지의 성 클리브스를 그대로 유지한다. 작가 앨리 스미스가 동성애자이듯, 소피아의 법적 남편 고드프리도 동성애자였는지, 적어도 그가 법적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선 성스러운 동정남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단 한 번도 성적 결합을 해본 적 없고, 서로 등짝을 밀어준 적도 없다. 오직 하나, 혼자 아이를 키울 소피아가 안 되어 보여서 고마운 고드프리가 사해동포의 이념으로 결혼을 해주었던 거다. 곧 둘은 헤어지지만 소피아는 남은 생애 내내 고드프리 또는 레이먼드에게 고마움을 품고 산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소피아의 아들인 자연생태학자 아서. 애칭 아트. 자신의 블로그 ‘아트 인 네이처’로도 돈을 벌지만 역시 가장 큰 수입원은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 SA4A의 저작권 콘솔리데이터를 하면서 받는 돈이다. 아트는 세계 각지의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SA4A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는 컨텐츠가 법적 용도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회사에 신고하는 일이 주업무다. 자연생태학자라고 해도 요즘에 자리 하나 얻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것만 팔 수는 없는 일이니 일단 돈 되는 일이면 해야 하는 법이다. 젊은 아트는 당연히 3년 전부터 연인 샬럿과 반려자 자격으로 지내고 있다가 요즘 대판 싸우고 샬럿이 일단 집에서 나가버렸다. 물론 그것이 이별을 뜻하지는 않겠지만 하여간 좀 갑갑하게 됐다. 왜냐하면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 소피아의 집에 샬럿과 함께 가서 즐거운 연휴를 보내기로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샬럿은 아서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샬럿이 현관을 박차고 나간 날에는 북아프리카의 레몬 혁명 당시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이 다툼의 주제였는데, 과밀한 승객을 태운 쪽배가 전복하여 사망하는 일 등을 아서가 그들이 선택한 결과라고 말하자, 샬럿이 이렇게 반박했었다.
“저번이랑 같은 소리를 하려는 거야? 전쟁으로부터 도망치느라고 바다를 건너다 익사한 사람들, 집이 불타고 폭파당하는 와중에 도망친 것도 그 사람들 선택이고 침몰할 배에 탄 것도 그 사람들 선택이니까 우리가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필요 없다고 했던 때처럼?”
샬럿의 의견이 아서의 이모 아이리스와 같다. 아이리스는 심지어 북아프리카 난민 수용소가 밀집해 있는 그리스에서 그들을 위해 민간단체에서 열일 중이다.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 샬럿까지 없어진 마당에 엄마한테 애인 또는 반려자와 함께 집에 가겠다고 큰소리 뻥뻥 쳐 놓았으니 아서 또한 급하게 됐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바늘 구멍 만한 틈이 있는 법, 아서는 도서관 옆 버스 정류장에서 뭔가를 읽고 있는 아가씨를 발견한다. 나이도 조금 어리고, 얼굴에 고리, 걸이 그리고 막대 모양의 다양한 피어싱을 한 이국적인 여자애. 나중에 알고 보니까 크로아티아 출신 유학생이고, 런던에 와서 공부를 하다가 학비 지원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바람에 중도에 작파 해 버렸고, 잠 잘 곳을 얻기도 쉽지 않아 일하는 곳에서 숙박도 해치워야 하는 조금 딱한 신세의 일종의 유랑민이다. 그래도 캐나다 등지의 도서관에 있는 셰익스피어 책도 제법 알고, 무엇보다 성실하고, 솔직하고, 담백한 화법이 사람에게 진솔한 면목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도 있다. 이 아가씨한테 아서는 3일간 ‘샬럿’이란 이름으로 자기 반려 역할을 해주면 1천 파운드를 주겠노라고 제의를 했고, 이를 받아들여 둘은 함께 기차를 타고 콘월, 어머니 집으로 간다.
엄마 소피아는 좀 괴팍하게 늙었다. 아서가 도착하기 닷새 전에 “눈 안에 청록색 점, 시야 측면에 청록색 점이 보이면서 점점 커질 때”를 검색해보더니, 이 점 모양의 부유물이며 눈 앞을 하루살이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조막만한 스푸트니크 위성에 불과한 점에 말을 건넸고, 그러자 점은 핀볼 머신 옆구리에 붙은 쇠막대에 한 방 얻어맞고 튀어나온 쇠공처럼 눈에서 튀어나와 지금은 진짜 어린 아이의 머리통 만해졌다. 몸통을 잃어버린 머리. 잘린 부문에 살덩이가 흐물흐물 붙어 있는 것 같기도 한 머리통과 소피아가 이야기하고, 마치 쿠션이라도 되는 듯 몸을 기대고, 함께 외출도 하는 장면으로 작품을 시작하니, 이거야말로 전에 읽었던 매력적인 앨리 스미스, <호텔 월드>에서 음식 운반용 승강기에 몸을 구기고 들어갔다가 떨어져 죽은 알바 아가씨의 귀신 같은 것이 생각나서 흥미진진 했었다. 물론 조금 엽기적이기도 했지만. 근데 이 책에서 문제의 머리통은 조금 지나면 흐지부지 없어져 출판사 책소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아쉽다.
하여간 이렇게 어렵게 콘월 엄마 집에 아서와 샬럿이 도착해 고프다 못해 배가 쓰린 수준까지 되어 냉장고를 벌컥 열어 보았지만 버터도 없고, 딱 두 알 남은 달걀은 사온 지 두 달이 넘어 이걸 삼킨 사람은 응급실행을 진지하게 각오해야 할 수준이며, 생수 한 통도 없는 건 물론이고, 하여간 목구멍 넘길 것도 없었다. 따듯한 부엌 의자에 앉은 엄마 소피아는 아이들에게 헛간에서 자는 편이 좋을 거라 말하고 자기는 방에 들어가 잔다. 이 할머니가 아서의 진짜 엄마 맞다.
이제 어이가 없어져버린 아들 아서. 어떻게 할까? 넋이 거의 나가 샬럿이란 거짓 이름의 럭스를 쳐다보고 있자, 결정적일 때 단호하고, 현명하며, 사람의 기분을 제대로 맞출 줄 아는 가난한 아가씨는 단칼에 해법을 제시한다.
“이모를 불러.”
아서는,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이모에게 문자를 보내고, 즉각 아이리스 이모한테 답장이 왔으며 “즉각 갈게!”, 옆에서 보고 있던 럭스는 한 마디 더 보태라고 한다.
“여기 먹을 것이 없어요. 음식물 좀 넉넉하게 사 오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 번 더 옆구리를 지른다.
“크리스마스 축하용 와인도요.”
그래. 크리스마스. 잉글랜드에서 크리스마스, 라면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를 뺄 수 없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는 영혼. 이 작품 속에서도 몸통 없는 머리와 지내는 소피아는 자기가 기억하는 예전 시절부터 결국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귀결하는 장면을 소환한다.
과거를 소환하는 일은 자주 현재와 타협을 이룬다. 스크루지도 결국 그렇게 했다. 이제 이 가족, 맏이 아이리스와 둘째 소피아, 그리고 아들 아서. 이들도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다시 그리스의 섬과 런던으로 갈 때, 샬럿 럭스에게 1천 파운드를 주고 돌려보낼 즈음엔 온 세상 감화 감동 가득하듯,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읽어보시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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