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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에서 9시 사이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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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에만 세 권의 페루츠를 읽는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1920년대 유대계 폴란드 소설가들이 만든 황금시대. 내가 말하는 이들은 스타니슬라프 비트키에비치, 비톨트 곰브로비치, 그리고 브루노 슐츠를 가리키는데, 난데없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던 페루츠를 왜 이 무리와 같이 엮으려고 했을까? 페루츠도 아방가르드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덜 아방가르드한데 말이지. 폴란드 작가들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수준인 것을. 잠깐 오해를 한 게 틀림없다. 레오 페루츠를 비트키에비치, 슐츠, 곰브로비치를 읽기 위한 디딤돌로 삼을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할 뻔했다. 암만해도 내가 독후감을 너무 자주 쓰는 모양이다.
페루츠는 한 마디로 말해서, 환상 소설가이다. 요즘 유행하는 뉘앙스로 환상적인 작품을 생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설의 내용이 사실보다는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 같은 걸 다룬다는 뜻이다. 이미 죽은 아버지가 창문을 두드리는 <스웨덴 기병>, 읽는 사람마다 자살에 이르게 하는 책 이야기 <심판의 날의 거장>, 실제가 아니라 서로의 꿈속에서 만나 짙은 사랑을 해 보헤미아에 페스트를 창궐하게 한 커플 <밤에 돌다리 밑에서> 모두 그랬다. 그러니 페루츠를 훗날 라틴아메리카에서 유행하게 될 환상문학의 범주와 비슷하게 엮어도 나쁘지는 않겠다. 그러면서도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고딕 문학과는 좀 차별을 두는. <9시에서 9시 사이>도 마찬가지로 환상 문학이다. 앞에서 <밤에 돌다리 밑에서>가 왜 환상문학이라 하는가를 언급한 건 스포일러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9시에서 9시 사이>가 왜 환상문학인지 알려드리는 것도 확실한 스포일러이다. 따라서 그건 피해갈 수밖에.
주인공은 스타니슬라우 뎀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짧고 불그스레한 콧수염을 한 철학박사 수료생이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 논문을 써서 통과만 하면 학위를 얻을 수 있는 과정이 아닐까 짐작한다. 덩치와 생김새하고 어울리지 않게 마치 먼 길을 갔다 온 듯 지저분한 장화를 신고, 바지에도 얼룩덜룩하게 진흙이 묻어 있다. 이런 모습으로 첫 장에 등장한다. 빈 시내 비저 골목의 식료품 가게에.
뎀바는 가게 주인 요한나 퓌흘 여사한테 버터빵과 (재고가 떨어진)크라카우어 소시지를 주문했다가 소시지만 대신 엑스트라부어스트로 다시 주문을 한다. 근데 이 다음부터 좀 이상하다. 음식값 64헬러를 내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으면서 퓌흘 여사와 종업원에게 자꾸 엉뚱한 요구를 늘어놓으면서 신경질을 낼 뿐이다. 그러다가 우유를 찾는다. 퓌흘 여사는 자기가 마시려고 조금 남겨놓은 화주를 퍼뜩 떠올리고 그거라도 좋을까요, 묻는다. 예, 당연하지요. 치통엔 화주 만한 것이 없지요, 그래서 여사는 화주를 가지러 갔고, 딱 한 잔을 따르면서 생각해보니 이제 카운터에 저 남자손님 한 명만 남았는데, 서랍엔 14크로네와, 산호 목걸이와 터키옥 반지 두 개, 카테를의 저금통장, 그리고 마리아첼산 성화 두 점이 들어있는 것을 기억했고, 갑자기 수상한 생각이 들어 객장으로 뛰쳐나갔더니, 아뿔싸, 뎀바는 벌써 보이지 않는 거다. 여사가 현금보관통을 열어보니까 다행스럽기도 하고 한편 이상하게도 돈과 보석, 저금통장, 기타 등등이 그대로 있었으므로, 도둑놈이 비록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할 찰라, 카운터 위에 놓인 20헬러짜리 동전 세 개와 크로이처 두 개, 합해서 64헬러가 놓여 있었던 거다.
다음 장면은 버터빵과 엑스트라부어스트를 들고 그걸 아침식사로 먹으려 리히텐슈타인 공원의 한적한 벤치에 앉은 스타니슬라우 뎀바. 하필이면 개 키루스와 함께 아침 산책을 나선 궁정고문관 클레멘티 선생과 동행인 트룩사 폰 리터 교수가, 원래부터 아침마다 원고나 교정지를 검토하는 장소인 후미진 벤치에 도착하니, 바로 뎀바가 앉은 벤치. 뎀바는 그들을 보자 빵과 순대를 벤치에 올려 놓은 채 그저 멍하니 앉아 있으면서, 클레멘티 고문관이 데려온, 암만해도 잡종견 같은데 하여튼 키루스가 빵과 순대를 다 먹어치우는 걸, 분명히 얼굴만 보면 분노에 차서 이글거리건만 그저 째려보고만 있는 거다. 궁정고문관과 교수는 오늘 아침 토론의 주제가 마리화나, 대마초였는데, 뎀바가 처음엔 개를 달려려고 하다가 나중엔 결국 키루스의 옆구리를 발로 뻥 차버리고,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더니,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이자 철학 및 역사분과 외교 아카데미 강사인 폰 리터 교수는, 뎀바가 오늘의 화재였던 대마초를 흡입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더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득달같이 쫓아갔으나 이미 뎀바는 사라진 후였다. 이때가 한 아홉시 반 정도 됐으려나?
아침을 먹지 못한 뎀바는 멀리 가지 않았다. 같은 공원의 다른 장소. 이제 주인들은 출근을 하고, 여사님들은 외출을 위한 준비에 바쁜 시간. 공원에는 쁘띠 부르주아의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가정교사 아가씨들과 베이비시터 할머니들로 가득하다. 빨간 브로치 두 개가 달린 새 보일 블라우스를 입고 작은 남자애, 여자애 각 한 명씩 데리고 나온 아름다운 아가씨 알리스 라이트너로 말할 것 같으면, 척 보면 새침하고 얌전할 것 같은데 사실은 내숭 덩어리로 도발적인 주제로 은근하고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는 걸 어느 정도 즐기는 성향이다. 알리스는 특히 숱한 남자들로부터 엽서나 편지를 통해 보낸 사랑의 고백을 읽는 걸 최상의 취미로 생각한다. 이 알리스를 뎀바가 우연히 만났다. 아가씨 쪽에서는 인연이 되려는지, 원래 잘 차려 입은 남자를 선호하건만 오늘은 지저분한 장화와 바지의 뎀바를 보고 낭만적인 보헤미안을 떠올리는 거다. 게다가 순전히 폼으로 들고나온 책을 슬쩍 보더니, 입센 책이군요, 그렇죠? 한 번에 알아맞추는 것까지 반할 요소는 많았다. 알리스 아가씨는 뎀바가 마음에 들어 본격적으로 꼬드길 심사로 우산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이건 남녀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꼬리치는 일로, 여성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 하여간 남자가 주워 주는 것이 삼천만의 일반상식이건만, 뎀바는 꼼짝도 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 알리사 본인이 주워들었다. 그래도 뎀바가 싫은 기척을 보이지는 않았는지, 알리사가 자기 주소를 알려주며 편지나 엽서를 보내라 주문하면서 주소를 불러주었는데, 뎀바는 도통 그걸 받아 적지 않는다. 기억할 수 있다면서. 더 재촉을 하니 이젠 글을 읽지 못한다나?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 놓더니, 나중엔 사실 자기가 유레카 공장에 기계 협착 사고를 당해 두 팔을 잃은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뎀바를 불쌍히 여긴 알리스는 벤치 위에 1크로네 10헬레의 동전을 놓고 자리를 뜨고, 이걸 발견한 뎀바는 그걸 집어 땅바닥에 내팽개쳐 버린다.
여기까지 읽으면 주인공 스타니슬라우 뎀바가 너무 찌질해 보인다. 세상에 이리 궁상맞을 수가. 외견상 괜찮은 신체조건에 어디 빠지지 않는 외모, 다만 가난한 학생 신분이라 그게 한 가지 허들인 인생을 사는 뎀바가 처음부터 이런 찌질이는 아니었겠지? 맞다,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 똑똑해서 모르는 게 없는 모든 분야의 척척박사라 불렸다. 망가지는 사람은 틀림없이 어느 계기가 있는 법인데, 뎀바의 경우에는 피끓는 20대 청년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듯이 연애문제였다.
패션 조끼용 천 도매상을 하는 오스카 글레빈터사社에서 일하는 조냐 하르트만 양. 스타니와 조냐는 둘이 짧지 않은 시간동안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 였던 걸로 뎀바는 오해했다. 항상 더 나은 환경이나 권력 또는 힘을 가진 수컷을 좇는 암컷의 본능으로 조냐는 그러나 자기 앞에서 활짝 구애의 날개를 펼치며 바르르 떠는 숫공작 게오르크 바이너를 선택했다. 게오르크는 대학생이고, 아빠가 겁나게 부자라서 이번에 학점을 잘 받아 게오르크에게 3백크로네를 선뜻 하사를 했다. 여기에 조냐가 가지고 있는 90크로네를 합쳐 약 4백크로네로 베네치아를 비롯한 유럽 각지를 3주에 걸쳐, 2주는 휴가를 내고 둘째 주 금요일에 병이 나서 한 주일 더 머물러야 한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는 걸 전제로 3주 여행을 계획, 벌써 열차표 일습을 예매해둔 터이다.
세상에 이런 비밀을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 소식이 뎀바의 귀에도 “어제” 들어갔고, 눈알이 훽 뒤집어진 뎀바는 곧바로 오스카 글레빈터사에 쫓아가 조냐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고 빈다. 그러나 조냐는 뎀바가 그럴수록 더 정나미가 떨어졌고, 둘의 감정을 더욱 틀어져만 갔는데, 나중에 뎀바가 말하기를, 내가 내일 오전 9시까지 4백크로네를 가져오면 게오르크말고 나하고 여행을 떠나겠어? 묻는 단계까지 왔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한 번 떠난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안 넘어가는 나무는 백 번을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법. 웃기고 있네. 콧방귀를 핑, 뀌는 순간, 조냐는 뎀바의 손에서 반짝이는 크롬 도금 쇠뭉치를 발견한다. 틀림없이 리볼버 권총이다. 순간 조냐는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진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원래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뿐이었다고, 일단 진정을 시키는데 성공했고, 곧바로 뎀바는 문제의 4백크로네를 마련하기 위해 도매상을 뛰쳐나간다.
여기가 차원이 바뀌는 지점이고 순간이다.
뎀바는 전에 논문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수십년 간 아무도 대출한 흔적이 없는 고서 세 권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을 당해, 결국 세 권을 훔쳐 내온 적이 있다. 가져다 놓아야지 말뿐이고 생각뿐, 시간이 흘렀으며, 살다 보니 돈에 궁색해질 때가 있어서 고서 두 권은 책의 가치를 그나마 알아보는 유대인에게 팔아먹었다. 이제 남은 한 권을 가지고 다시 그 유대인을 찾아가 감정을 하고, 흥정 끝에 240크로네로 결정을 했다. 돈을 지불하려 방에 들어간 유대인은 열쇠를 가진 조카가 뭘 사러 밖에 나가 있어서, 점원에게 그를 데려오라 시켰고, 점원이 데려온 사람은 조카가 아니라 두 명의 형사였는데, 이들은 유대인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뎀버의 손에 은팔찌, 수갑을 채워버렸다. 순간 덩치 좋은 뎀버는 몸부림을 쳐 이들을 떨쳐내고 집 3층 다락방으로 올라가 문을 걸었지만 그게 오래갈 일이 없을 터, 결국엔 두 팔에 수갑을 채운 채 그곳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는 데 성공한 거다. 그러니까 여태 뎀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러면 수갑을 채운 손목이 드러날 터이고, 즉시 사람들은 뎀버를 경찰에 고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돈이 생기면 바로 두 손을 사용하지 못하고, 손을 노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돈을 잃어야 하는 상태가 계속된다. 독자는 읽는 내내 뎀버의 상황이 너무도 갑갑해 숨이 턱턱 막히지만, 나중에 결말 부분에 가면 허, 참. 왕년에 TV에서 수십년 간 <가족 오락관>을 진행하던 허참 씨의 이름을 한 번 되뇌면서, 세상에 이렇게 된 거였어? 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된다.
이제 페루츠의 책은 한 권 남았는데, 그건 그냥 내버려두어야겠다. 뭐든지 약간 부족한 게 좋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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