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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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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카르추크의 단편집은 처음 읽는다. 그래도 낯설지 않다. <방랑자들>과 <태고의 시간들> 모두 장편소설이기는 하지만 짧은 단편이 촘촘하게 서로 이야기를 엮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토카르추크를 읽은 것이 벌써 4, 5년 전이라 큰 줄거리 정도와 작가 특유의 문법과 문장 같은 것들만 기억하는 수준이기는 하다. 이이의 작품을 딱 끊은 계기는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고나서 과한 동물주의, 자기가 기르던 개 두 마리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것 때문에 지역의 명사 네 명을 차례차례 연쇄 살인하며 시신 훼손과 비웃음까지 저지르는 장면을,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정당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죽은 이들의…>가 2009년 작품이고 《기묘한 이야기들》은 9년 후인 2018년에 발표했다. 《기묘한 이야기들》를 읽어보니 <죽은 이들의…>를 쓸 수 있었던 채식주의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토카르추크는 1998년부터 폴란드 남서부, 실레지아 주와 보헤미아의 국경 근처인 크라야노프 지역에서 살고 있다. 알프스에 비해 크지 않은 산들도 이어지는 산맥 지역으로 구릉지대에 울창한 숲이 접한 곳이 아닐까 싶다. 지역적으로는 가깝지 않아도 이이와 비슷한 환경에 살고 있는 프랑스 소설가가 한 명 생각난다. <내 식탁 위의 개>를 쓴 클로디 윈징게르. 두 명이 쌍벽을 이루는 동물주의자인 건 맞는 듯. 토카르추크는 동물주의에서 한 발 더 진화해 인공적인 것, 사람살이에 유독한 물질을 만드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보인다. 즉 21세기 식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런 식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현재 인간의 미래형을 제시한다. 이 과정을 그리기 위하여 인간종이 다른 생명종보다 우월할 것이 없는 증거를 보여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완전히 다른 양식으로 살고 있는 미래의 인간을 설정하기도 한다. 당연히 17세기 30년 전쟁 직후의 폴란드 왕국을 묘사하기도 한다.
작품집의 제목이 “기묘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묘한 이야기, 아마 이런 “기묘함”은 주로 유럽의 고딕문학이나 일본 민속문학의 영향으로 유령이나 엽기 잔혹이 나와야 할 듯한 생각이 들겠지만, 토카르추크의 기묘함은 이들과 달리 공포를 유발하거나 자극적이지 않다. 이이의 작품은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간혹 인류의 영속성을 위한 자연친화의 추구 또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으로 읽힌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인간의 축일력>은 작품 가운데 제일 분량이 많은데, 인간이 대량 배양한 플라스틱 포식 박테리아가 바다에 떠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다 처리한 후에도 개체수가 줄지 않아 육지에 상륙해, 당장 필요한 플라스틱까지 몽땅 포식한 후의 미래 인간세계를 그렸다. 플라스틱이 없는 세상. 당연히 나일론도 포함한다. 즉, 인간생활의 필수조건인 의식주가 몽땅 수백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함에도 인류는 여전히 TV방송을 송출하여 국민들이 절대자 모노디코스의 죽음과 부활과 현시 행사를 볼 수 있게 한다. 당연히 매년 다시 살아나는 절대자 모노디코스를 유지시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치 중세 시대의 종교처럼 권력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교정분리 이전 시대의 왕, 천기를 움직여 필요할 때 비를 부를 수 있는 힘이 떨어지면 대중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주술사 비슷한 지배자일 수도 있다. 당연히 사회 속 젊은이들의 한 패거리는 주술사 왕일 수도 있고, 주술사 또는 왕을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에 반대하기 위하여 모노디코스라는 우상을 파괴하기 위한 세력도 있다. 또는 이를 인류의 죽음과 부활, 소멸과 탄생의 연속을 통한 영생과, 과연 인간이 영생할 필요가 있을까, 사이의 고민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터.
반면에 30년 전쟁이 끝나고 8년이 흐른 1656년의 폴란드를 무대로 쓴 두번째로 실린 작품 <녹색 아이들>은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이자 생물학자인 윌리엄 데이비슨이 폴란드 왕과 함께 국가의 상황을 점검하고 지방 호족들과의 연합을 다지기 위한 여행길을 떠나는 이야기다. 폴란드왕은 데이비슨이 딱 꼬집어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에게 수은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독 환자였을 것이다. 하여튼 여행을 떠난 와중에도 스웨덴과 모스크바 군대가 여전히 폴란드 영토에 침범해 약탈과 점령 행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왕의 일행이 예전에 타타르 족이 2년 여 동안 지배하고 있다가 숲에 불을 싸지르고 물러난 음습한 숲 근처 영주의 저택에 도착해 머물렀다. 왕이 통풍 때문에 꼼짝하지 못하고 나날을 허비하고 있던 중, 사냥꾼 무리가 숲에서 옷, 누더기도 그런 누더기가 없다시피한 그런 누더기를 걸친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 하나씩을 잡아왔다. 이들을 보니까 온몸에 마치 엽록소가 든 듯 푸릇한 기색이 나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반점 같기도 한 자잘한 알갱이가 피부 바로 밑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되는데, 이들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 태양빛/볕을 받으며 양분을 흡수해서 실제로 음식물을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하며,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처럼 짐승의 고기는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 가운데 남자 아이와 얽혀 크게 사고를 당한 데이비슨은 왕은 떠나보내고 청년 리치볼스키와 함께 영지에 남는데 결국 리치볼스키도 숲 속의 아이들과 함께 사라져버린다는 이야기.
이런 스토리를 쓰기 위하여 결코 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자연을 훼손했고, 당장은 필요하겠지만 멀리 보면 결국 그것 때문에 인류의 큰 위기를 봉착할 수밖에 없는 폐기물 등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류의 행위를 진짜 행위보다 더 지독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을 터이다. 게다가 소설이란 명백히 픽션, 허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과장은 허용될 수 있다. 그러다가 일이 좀 커지는 것이지. 전작 <죽은 이들의…>도 그랬고, 클로디 윈징게르의 <내 식탁 위의 개>도 그랬듯이.
근데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번 책 《기묘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참 글 하나는 잘 쓴다, 라는 생각을 곳곳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문장의 능란함은 작가니까 밑에 깔아놓고 생각해도, 사고의 깊이와 지식의 넓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가 바르샤바 대학 대학원에서 학위를 딴 임상심리학자로 다년간 심리치료사 일을 해서 그런지 다양한 이야기거리도 준비되어 있는 것 같다.
지난 주 월요일(12월 16일)에 페루츠의 <밤에 돌다리 밑에서> 독후감을 쓰다가 어떻게 이상한 의문이 문득 들어 그걸 그대로 썼다가, 암만해도 건전한 양식을 지닌 분들이 읽으면 욕을 한 바가지 먹을 정도로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지워버린 적이 있다. 정말로 궁금해서 썼던 것이기는 하지만. 근데 난데없이 이 책 《기묘한 이야기들》의 아홉번째로 실린 작품 <모든 성인의 산山>에 해답이 실려 있어서 깜짝 놀랐다. 스위스 산중에 있는, 한 시절의 폐쇄수녀원이었지만 지금은 네 명이었다가 몇 십 년만에 한 명이 늘어 다섯 명의 수녀만 살고 있는 수녀원에 성인의 유골이 치장,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고 중세 시절부터 유럽 곳곳에 유행했던 성유물 매매에 관해 심리학자인 주인공이 이렇게 생각을 보탠다.
“(성인의) 손가락과 발목뼈, 머리카락 뭉치, 몸통에서 꺼낸 심장, 잘려 나간 머리통에 대한 숭배, 사등분으로 조각난 성 아달베르트의 유해는 교회와 수도원에 성물로 배포되었고, 성 야누아리우스의 피는 주기적으로 신비한 화학적 변화를 겪으며 상태와 형질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성스러운 시신의 도난사건, 유해를 쪼개어 성유물로 만드는 과정, 기적적으로 늘어나는 심장과 손, 라틴어로 ‘사크룸 프레푸티움(sacrum preputium)’이라 불리는 아기 예수의 포피까지.” (p.212)
* 신성모독의 위험이 있음. 조심하실 사!
위에 적은 것이 성유물의 종류들이다. 이걸 읽자마자 내 의문이 개운하게 풀려버렸다. 페루츠의 <밤에 돌다리 밑에서>는 16세기 말, 30년 전쟁이 터지기 바로 직전 신성로마제국 보헤미아의 유대인 게토에서 한 부자 유대인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2세가 주인공이다. 이때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적은 투르크. 지금의 튀르키예. 제국과 투르크 사이의 국지전이 (독후감을 쓰던 내 머리 속에서)십자군 전쟁으로 확장하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로 갔다가, 예수를 믿는 기독교도들은 할례를 하지 않았고, 이슬람과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는데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까지 갔다. 사실 이것도 너무 많이 간 거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v.s. 이슬람교의 십자군 전쟁은 “자연산과 깐 놈” 간의, “포피와 귀두”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리스도의 호적상 아버지 성 요셉은 호적상 아들에게 할례를 해주었을까, 아니었을까? 이게 갑자기 궁금하더란 것. 고민을 하다 하다가 거실에서 드라마 보고 있던 아내에게 물어보니까 단칼에, 남의 조껍데기에 신경 꺼, 라고 앙칼진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고마워, 하고 말았다. 친구 가운데 신부가 한 명 있다. 그 친구한테 직접 물어보긴 좀 뭐해서 최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한교수한테 전화할까, 싶었던 찰나에 한교수한테 전화가 왔다. 다른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내 생각나서 전화 했다나? 그래서 내가 물어봤다. 얘도 영세 받은 신자잖아? 성 요셉이 그리스도 소년 시절에 포경수술을 해줬을까, 안 해줬을까? 모르겠단다. 옆에 있던 다른 친구 이교수가 내 말을 듣더니 한 마디 했다. 그런 생각하는 니가 미친 놈이다. 얘도 그새 소위 종교에 귀의한 모양이다. 네미럴, 교수들이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말세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단번에 가르쳐주었다. 성 요셉은 호적상 아들 예수한테 할례를 해주었다. 심지어 할례 후, 예수의 포피 또한 무진장 잘 보관했다. 책 속에 뭐든 다 있다니까! 올가, 땡큐. 오늘은 2024번째 크리스마스. 실제로는 설 연휴 마지막 날이겠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 올해 행운이 쏟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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