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의 한 가족 제안들 29
샹탈 아케르만 저자, 이혜인 역자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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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에 태어난 범띠 여사님 샹탈 아케르만은 소설가가 아니라 평생을 유명한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뉴욕시립대학 영화과 교수로 지냈다. 47년간 40편 이상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남겼다’라고 쓰는 것은 아케르만이 가지고 있다가 스르르 없어진 필름도 상당 수 있다는 의미다. 보관하는 방법이 필름 원본을 둥근 양철통에 담아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었던 시절이라 자기 공간이 없는 유명하지 않은 감독한테 이런 일은 그리 드물지 않았으리라. 문학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이 가운데 첫째가 1998년, 48세의 아케르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중편소설 <브뤼셀의 한 가족>이다. 몇 년 후 <어머니가 웃는다> 한 권 더 내고, 아케르만의 홈페이지에 가면 시나리오집 두 권을 찾아볼 수 있다.

  워낙 유명한 영화감독이라고 하나, 나는 이이의 영화를 한 편도 본 기억도 없고, 영화에 그리 깊은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샹탈 아케르만’ 대신 ‘아커만’이라는 프랑스 감독이 있는데 이 책을 읽기 바로 직전까지도 아커만이 (이름으로 짐작해) 유대인이고 남성인 줄 알았다. 샹탈 아케르만의 일생은 거의 대부분이 영화감독 커리어로 되어 있어서 작가 아케르만에 관해서는 구할 수 있는 정보조차 없다.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고 30년이 지나야 소설을 쓴 아케르만은 감독 생활 내내 감독은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유명 영화감독이라 필모그래피야 엄청나겠지만 이 가운데 1975년에 제작한 <잔 딜만, 코메르스가 23번지, 1080 브뤼셀>이라는 작품의 정보가 책 뒤편에 실린 “작가 연보”와 위키피디아가 서로 다르다. 책에서 “당시(1975년) 일간지 『르 몽드』는 이 영화를 ‘영화 역사상 최초의 여성 명작 영화’라 평했다.”라고 쓴 반면, 위키피디아는 영화잡지 “『시각과 음향』은 2022년 ‘가장 위대한 영화’ 비평가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여성”이라 했다. 아케르만은 특이한 페미니즘을 표현한 감독이라 하는데 문장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명작 영화”와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여성”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 아닌가 말이지.


  샹탈 아케르만은 폴란드계 유대인 부모의 맏딸로 태어났다. 나치 치하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어머니는 외조부모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으며, 1942년에 외조부모는 수용소의 흰 연기의 형태로 굴뚝을 통해 하늘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놀랍게도 그곳에서 끝까지 생존했다. 자매들과 함께. 삶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고, 트라우마가 워낙 크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평소 말도 별로 없고 소극적이던 어머니는 그래도 오래 살다 간다. 아케르만은 평소 어머니와 특히 가까웠으며, 유대인 공동체 일원 답게 자매, 이모 등의 친척, 이웃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를 멀리 하지 않은 듯하다.

  <브뤼셀의 한 가족>을 아케르만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포함된 작품으로 보면, 그렇다고들 하기도 하고, 화자 ‘나’를 아케르만의 어머니로 볼 수 있다. 죽음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어머니. 그러나 이미 부모와 남편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나이든 여성. 두 번째 수술을 앞에 두고 조금은 심란한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큰 딸은 파리의 메닐 몽탕 가의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아이도 없이 혼자 살고, 작은 딸은 남미의 해변도시에서 남편, 두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엄마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메닐 몽탕에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고 사는 딸’이 맏이, 눈치로 보아 샹탈 아케르만이고, 남미의 두 아이의 엄마가 남미가 아닌 미국에 사는 둘째딸 실비안 아케르만 같다.

  오늘 독후감에 허튼 소리가 많은 건, 길지 않은 중편소설 한 편만 달랑 실린 책이기도 하고, 스토리도 거의 없는 작품이라 할 말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 미리 사실을 고해야 하는데 이제야 밝히는 건 아주 약한 사기수법이기도 하지만 이해해주시라.

  화자 ‘나’는 유대인. 부모가 1942년에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자매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갔거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거나 하여간 멀리 산다.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해야 하는데,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기차를 타고 와서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그 아이는 남편이 산, 벤츠는 아니고 아우디지만 운전을 잘 하지 못하는 남편이 그래도 사고 한 번 내지 않고 몰고 다니던 남편의 차를, 남편이 죽은 다음에 자기가 파리로 가져갔다. ‘나’나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나 운전면허는 있지만 운전을 해본 적이 (메닐 몽탕에 사는 딸)거의 없거나 (‘나’)없다.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은 그래서 기사를 고용해 타고 다니다가, 기사가 큰 사고를 내서 차는 파리의 사고차량 보관소에 아직 폐차 처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다고 들었다.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은 책이 끝날 때 즈음해서 기차 1등실을 타고 오는 대신 친구가 파리에서 브뤼셀까지 자기 차에 태워 데려다 주고 자신은 다시 차를 운전해 파리로 돌아갔다.


  ‘나’의 두번째 수술. 두번째 수술이라는 말이 독자에 전해주는 두번째 수술의 위험성. 여차하면 자신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의미는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감이 교차하겠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죽음을 떠올린다. 역자 이혜인이 해설을 통해 ‘2인칭의 죽음’이라 이야기하는 남편의 죽음. 뇌졸중으로 한 번 쓰러져 입이 돌아간 남편. 이 책 <브뤼셀의 한 가족>을 출판한 해가 1998년. 2년 전에 아케르만은 아버지를 여윈다. 책 속 ‘나’의 남편이. 남편은 몸이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쇠해져 이젠 역시 늙은 ‘나’가 간호하기에 힘이 벅차다고,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판단해 남편을 요양병원에 보냈지만, 그곳에 가 볼 때마다 ‘나’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데려온다. 그걸 알고 메닐 몽탕에 사는 딸이 득달같이 쫓아와, 엄마도 같이 죽고 싶은 거냐고, 야단을 치더니 다시 요양병원으로 데려가는 걸 ‘나’는 막을 수 없었다. 남편을 돌보다 옆구리 뼈에 이상이 생겨서. 요양병원의 건강한 간호사가 마음에 든다. 남편을 번쩍 들어 자세를 바꾸어 준다. 그러나 남편은 다시 입이 돌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죽는다. 메닐 몽탕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은 딸이 오고, 남미에서 결혼도 했고 아들도 둘 키우는 딸도 남편과 아들들을 데리고 날아왔고,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들도 왔으며, 브뤼셀에 거주하는 유대 커뮤니티 사람들도 빠짐없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빠짐없이 찾아와 조문했다. 팔레스타인 사는 자매 하나 빼고.

  이제 독자는 ‘나’가 1인칭, 즉 ‘나’의 죽음이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2인칭인 남편의 죽음,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연상하는 것. 더 나아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다중의 죽음, 그게 수용소에서 가스에 질식해 죽은 유대인 연대의 인물들일 수도 있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의미없이 총알받이나 대포밥이 된 청년일 수도 있고, 와중에 떨어진 폭탄이 터져 죽은 여성, 노인, 아동일 수도 있지만 결코 유대인의 무기에 죽은 팔레스타인 거류민일 수는 없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다시 ‘나’가 수술을 위해 입원해야 하는 시기. 이번에도 메닐 몽탕에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은 채 혼자 사는 딸과 남미에서 결혼도 하고 아들도 둘을 낳아 키우는 딸이 가족을 다 데리고 ‘나’를 보러, 응원하러, 완쾌를 빌어주려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한다. 많은 이야기. 개중엔 진실이 아닌 것도 있고, 진실이긴 하지만 ‘나’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사실이 아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처음부터 거짓말인 것이 확실하긴 해도 좋은 의미로 하는 거짓말도 있다. 이렇게 2인칭 또는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혹시 죽음, ‘나’의 2인칭과 가까운 사람들이 벌써 경험한 죽음으로 이끌지도 모를 수술 바로 전에 ‘나’를 위안하기 위해 모여 있다.

  이게 다다. 내 취향에 잘 들어맞는다. 별점 다섯을 줄 정도로. 그러나 주의하실 필요가 있으니, 진심으로 말해서 당신한테는 아닐 수 있다. 그럴 위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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