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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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칠리아 람페두사의 11대 영주이자 12대 팔마 공작Duke인, 주세페 토마시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1896년에 태어났다. 이 정도면 정말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거다. 좋았겠다. 하지만 귀족도 마냥 다 행복할 수는 없는 거라서, 집안 식구들은 귀족 값을 하느라 소위 예절과 법도를 내세워 부모자식 간에 살뜰한 애정을 표하지 않았다. 냉랭한 가족 사이에서 자란 주세페 토마시는 어린 시절부터 말이 없고, 고독하고, 수줍음이 많고, 조금은 대인기피적 성격을 지녔다. 혼자 뭐 했느냐고? 물론 극소수의 친구는 있었지만 대부분 책을 읽고 사색에 빠진 소년이었단다.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보다 사물과 같이 있는 편을 좋아했던 소년은 죽기 3년 전인 1954년에 깨어있는 16시간 가운데 열 시간은 혼자 보냈다고 썼을 정도. 이 지독한 외골수 대인기피증 환자가 유일하게 쓴 소설이 <표범>이다.

  1896년생이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엔 18세. 당시 기준으로 전쟁하기 딱 좋은 나이다. 19세이던 1915년에 드디어 징집당해 포병 사병으로 있다가, 거 별일이다, 영주의 직계 자손이자 현 공작의 외아들이 사병으로 뽑혀 간 게 말이 돼? 하여간 포병 사병이었다가 1917년에 장교 교육을 받은 다음에야 중위 계급장을 달고 카포레토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포로로 잡힌다. 빈 근교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토마시는 전쟁 막바지에 그곳에서 탈출, 걸어서, 즉 알프스를 두 발로 넘어 돌아왔다고 한다. 좀 궁금하다. 정말로 (물론 해협 또는 나폴리에서는 배를 이용했겠지만) 반도의 장화끝이나 나폴리까지 사람을 꺼리는 성격의 귀공자가 걸어서 갔을까? 아니면 국경만 넘어 엄마한테 전보를 쳐 기차를 탔을까? 뭐 중요한 건 아니다.

  유일한 소설작품 <표범>과 연결할 수 있는 작가의 바이오는, 여름에는 몇 달간 엄마의 소유였던 시골 팔라초에서 지냈다는 것. 팔라초. 영주의 영지 안에 있는 저택을 말하는데, palazzo를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궁전이나 전당 정도. 대략 규모를 말하자면 팔라초 건물의 길이가 2백 미터 또는 그 이상이라니 궁전이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규모이다. 작품에서는 살리나의 영주 파브리초 코르베라가 식솔들과 조카 탄크레디를 데리고 여름을 보내려 돈나푸가타 팔라초에 가서 가을까지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주세페 토마시가 19세기에 태어났으니 이미 귀족의 시대, 즉 지주-소작인으로 대표하는 토지 매개 부르주아의 시대는 종막을 고하고 있어서 앞 문단에서 거론한 소설 속 사실상의 주인공 살리나 영주 역시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수용하며 지낸다. 가문의 재산도 이미 많이 사라졌고, 사라진 재산은 새시대에 맞는 두뇌가 팽팽 돌아가는 신진 사업가의 재산으로 귀속이 되던 시기에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보잘것없는 신분의 신흥부자와 혼인을 통한 친척의 연을 맺기도 한다. 주인공 살리나 영주의 모델이 작가의 증조부였다고. 증조부를 거쳐 조부, 부친 그리고 자기 대에 와서는 거의 모든 재산이 사라진 상태였는데도, 여전히 팔레르모의 팔라초는 토마시가 소유하고 있었다니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게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다.

  몇 가지가 더 있지만 독후감이 너무 길어진다.


  1860년 5월. 첫 장면은 팔레르모에 있는 살리나 가문의 저택이다. 이 당시 시칠리아는 부르봉 왕조 치하에 있었다. 사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자신을 이탈리아 국민이라기보다 시칠리아인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러나 시칠리아는 말 그대로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이 나라한테 터지고 저 나라한테 치이며 자기들 생각으로는 2천년 동안 식민지로 지내왔던 터이다. 이건 작중 살리나 영주 돈 파브리초의 대사를 읽고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이다. 그리하여 돈 파브리초한테 더 중요한 것은 시칠리아를 누가 다스리는지가 아니라 어떤 형태의 경제구조인가 하는 점이었다. 시대는 리소르지멘토Resorgimento 즉 가리발디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한참일 때였다. 이미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정치, 경제적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 돈 파브리초는 자신이 속한 계급이 몰락하고 가문의 재산도 사라지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볼 뿐 대응책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이였다.

  키가 매우 크고 힘도 장사이지만 결코 비만하지 않은 돈 파브리초. 어려서부터 배운 귀족의 범절을 지키기 위하여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대신, 식사를 하며 포크나 숟가락을 가볍게 구부려버리는 습관이 있어 팔레르모의 은식기 세공업자는 돈 좀 만졌다고 한다. 고인이 된 어머니 카롤리나 영주부인은 올리브색 피부와 금발머리를 한 독일인으로 아들에게 자부심과 지성을 물려주었고, 아버지는 기꺼이 경솔함과 호색가의 기질을 넘겨주었다. 근데 시절이 19세기 중엽. 대 귀족 돈 파브리초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아내 마리아 스텔라는 침대 위에서 남편의 품에 안기기 전에 반드시 십자성호를 그어 김을 빼놓는 것으로 시작해, 어느덧 절정에 올라 까무룩 한 고비 넘어갈 찰나가 되면 이렇게 콧소리를 냈다고 한다.

  “예수 마리아!”

  잘 하다가도 저절로 죽겠지? 근데 이게 다가 아니고, 결혼을 해 아이 일곱을 낳았는데, 남편 돈 파브리초는 아직 아내 마리아 스텔라의 배꼽도 한 번 못 봤다는 거다. 돈 파브리초는 한탄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근데 그걸 왜 독자한테 물어봐? 자기부터 반성을 해야지. 마리아 샤워할 때 등 한 번 밀어줘 봤어? 에휴, 말을 말자.

  반면에 팔레르모에 있는 미모의 비싼 매춘부 마리안니나는 정말로 엑스터시에 도달했는지 그냥 고객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랬는지 한 고비를 넘어갈 순간 “오, 나의 영주님!” 이렇게 소리쳤다니 이 아니 색다르겠냐고. 기분도 좋고 말이지. 다시 말하는데 19세기 중엽의 대 귀족 입장에서. 키 크고 힘 좋은 남자의 솥뚜껑만한 손이 완력을 쓸 때와 포크와 숟가락을 휘어버릴 때만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여인을 애무할 때는 더 섬세했는데, 이 순간 말고도 천체망원경으로 밤하늘을 탐색하며 렌즈를 조절할 때는 더더욱 세밀했다. 영주는 날 때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이것을 천문학 연구에 사용했다. 영주의 천문학은 당시 부르봉 왕가의 시칠리아 총독은 물론이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영토로 하고 1860년 현재 프란체스코 2세가 다스리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자랑일 정도였다. 평생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 두 개를 발견해 각 살리나와 즈벨토라고 명명했는데 딸과 키우는 개 이름이었다나. 그러니까 살면서 손끝에 물 한 방울,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소작인들이 바치는 소작료로만 가지고 하고 싶은 일 빠짐없이 다 하고 온갖 사치를 향유하는 전형적 봉건 농촌 부르주아였다는 말씀.

  이 영주한테 탄크레디라는 이름의 조카가 있다. 활발하고 다른 계급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화통한 성격의 잘생긴 청년. 영주는 자기 장남, 극도로 우울해 보이는 수척한 얼굴의 프란체스코 파올로 공작보다 평소 사랑했던 누나의 아들인 탄크레디를 더 좋아했다. 누나는 이웃한 영지의 영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거대한 재산을 단숨에 말아먹은 매형은 저택 한 채만 달랑 남기고 죽어 탄크레디 혼자만 달랑 남아, 영주가 후견인으로 조카를 말 그대로 부족함 없이 키웠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별로 건전하지 못한 청년들과 어울리며 도박을 즐기고 바람직하지 않은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도 영주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카를 향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준 건 아니다.

  어느 날 탄크레디가 외삼촌을 찾아와 말한다. 이제 떠나겠다고.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에 들어가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힘을 쏟기로 맹세했단다. 탄크레디는 왕정주의자. 근데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겠다고? 그렇다. 대신 샤르데냐 왕국을 위해 싸우겠다는데, 복잡한 이탈리아 통일운동사에서 아마 훗날 통일의 기반 역할을 할 것으로 기억한다. 잘생긴 탄크레디는 사실 알고보면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다. 정치적인 면도 그렇고, 연애관계도 마치 영주의 둘째 딸 콘체타와 결혼할 듯하다가 정작 진짜 결혼은 신흥부르주아로 등장하는 옛 시절의 천민이자 난데없이 남작의 후계를 자칭하는 돈 세다라의 아름다운 외동딸 안젤리카와 해서 훗날 장인의 재산을 다 거머쥐어 아빠가 잃어버린 팔코네리 가의 재산을 충당한다.

  그러나 소설은 특정 등장인물의 성쇠나 인생을 보여주는 것에 있지 않고, 작가 자신의 계급인 대 귀족의 몰락 과정을 그 쓸쓸함을 차분하게 소묘한다. 따라서 진정한 주인공은 살리나의 영주 파브리초 코르베라나 탄크레디 팔코네리가 아니라 귀족 계급 자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망할 계급이 당연히 망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진정한 귀족이 쓴, 그것도 잘 쓴 소설이라 마치 독자 자신도 작가를 따라 스스로 마지막 귀족이 된 듯, 이 계급이 서서히 망가지는 장면을 읽으면서 속으로 허전하기도 하고, 마찬가지 말이지만, 쓸쓸하기도 할 터이나, 독자여, 특히 당신이 진보의 분자라면 현혹되지 마시라. 망가질 계급이 당연히 망가진 일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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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17 0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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