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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장 ㅣ 세계문학의 숲 11
샤오홍 지음, 이현정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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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장>은 2018년 여름에 샤오홍의 새까만 후배 극작가 티엔친신(田沁鑫)의 희곡<생사장生死場>으로 읽었다. “낳고 살고 죽는 마당.” 재미도 있어서 읽자마자 곧바로 도서관 검색해 관심도서 등록하고, 그땐 퇴직 전이라 그러고 말았다가, 이제 남는 건 시간밖에 없는 세월이 닥쳐 정말 읽어보려고 하니까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건만 책이 낡아서 차일피일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단편집 《가족이 아닌 사람》을 읽어봤지만 흥미유발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도 이 책 읽기를 오래 머뭇거리게 만든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오늘 진짜로 읽기를 끝낸 순간 드는 마음은, 진작 읽어볼 것을.
책을 열면 서문이 나온다. 이렇게 시작한다.
“4년 전의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월에 나와 처, 아이는 상하이 자베이(閘北)의 전화 속에서 피난으로 혹은 죽음으로 인해 중국인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화자 ‘나’도 상하이의 영국인 조계지로 피난을 가 비교적 안전하게 중국-일본 전투 시기를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썼는데, 이게 “서문”이란 챕터로 중편소설 <생사의 장>을 시작하는 걸로 오해해 본격 감상 무드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이 소설의 원고가 내 책상에 도착한 것은 올 봄이었다.”
흠. 좋아. 화자는 남자 가장으로 소설가가 직업인 사람이고, 누가 원고를 주어 소개한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로군. 이렇게 읽어갔는데, 아뿔싸, 이건 말 그대로 서문, 샤오홍의 본문이 나오기 전 앞에 붙인 서문introduction이었던 거다. 좋다. 계속 읽었다. 드디어 서문이 끝나고 이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헉, 루쉰이다. 1935년 11월에 써주었단다. 샤오홍이 1934년에 탈고하고 35년에 루쉰이 도와주어 출간할 수 있었던 작품으로, 샤오홍의 대표작품이 되었다고. 저 내몽고 지역인 하얼빈 근동 지주집에서 낳았지만 여자아이라는 것 때문에 대강 키워 싸가지 없는 청년한테 시집보내 인생 망가뜨리고, 일본에 유학해 거기서 공부한 공산주의에 경도된 상태로 돌아와 글을 쓰는 한편 나름대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다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작가.
대표작인 <생사의 장>은 샤오홍(蕭紅)의 고향인 중국 동북지방에 크지 않은 강이 인접한 농촌마을을 무대로 작은 사람들의 생로병사를 다루고 있다. 작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덩치가 작은 종족을 말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중국에서도 동북 사람들 덩치가 제일 크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가진 거 없는 서민, 소작인, 약자를 일컫는다.
대강 둘러봐도 집 앞에 백양나무가 있는 꾀죄죄한 집에 사는 절름발이 농부 얼리반과 머리 속에 볼트 너트가 한 개 정도 빠져서 도대체 원한 같은 걸 품지 못하고 생각이 우왕좌왕하며 돼지소리 같은 목소리를 지닌 곰보댁 부부. 이들 사이에 나서 전봇대 보고 고무래정丁자도 모르는 아들 오다리 가족. 소 기르고 농사 짓는데 만족하지 못해 시내 나가서 발전적인 일을 해 볼 요량으로 아들과 함께 작은 닭장을 일컫는 ‘어리’ 장사를 시작했다가 나중엔 재고만 쌓는 자오싼. 자오싼의 아내이기는 하지만 전남편이 하도 두드려 패는 바람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무작정 가출을 해 다른 남자하고 살다가 살기가 하도 팍팍해 이번엔 자기 몸만 빠져나와 3혼 중인 아내 왕씨 아줌마. 자오 집안의 아들 핑얼은 진짜 아들이 아니고 이른바 개구멍받이 같아 보이는 사생아라서 어린 말과 늙은 어미 말 사이의 교류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주댁 둘째 아들 나리가 소작료를 올려 받으려 하자, 자오싼은 동네에서 (좋은 쪽으로) 왈짜라고 볼 수 있는 리칭산을 비롯, 젊은 축 몇몇과 함께 낫을 시퍼렇게 갈아 지주댁을 습격하려는 모의를 하기도 한다. 이를 알게 된 왕씨 아줌마는 세번째 남편한테 어디서 구했는지 구식이긴 하지만 소총 한 자루를 내주기도 하는데, 이거야말로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 개 발의 편자. 자잘한 좀도둑이 들자 배나무 몽둥이로 종아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좀도둑의 다리가 몽당, 하고 부러져 버렸다. 이 바람에 시내 유치장에 들어간 것을 지주댁 둘째, 웬수 같은 둘째 도련님이 힘을 써 풀어내고, 집에 있는 황소를 팔아 반은 합의금으로 쓰고, 반은 둘째 도련님이 활동비로 쓴 걸 갚아줬다. 풀려나오자 마자 자오싼 선생의 몸과 눈에서 독기도 함께 스르르 풀어져 늙어 죽을 때까지 젊은 시절 낫과 총을 들었다 놓은 추억만 곱씹으며 사는 인생으로 변한다. 뭐 그렇게 사는 거지 세상 사람들 전부 혁명가일 수 있나?
엄마하고 둘이만 사는 진즈는 조막만한 자기네 밭에 토마토를 키우는 처녀(였던 젊은 여성). 동네에 청예라는 멋진 이름의 청년이 있었는데 삼촌인 푸파와 함께 살았다. 푸파 삼촌이 젊은 시절에 물고기 잡는 일을 했다가 마침 눈에 쏙 들어오는 아가씨가 있어서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아가씨 손목을 잡아 끌어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만리장성을 쌓았고, 이게 처음 벽돌 한 장 올려놓는 일이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일도 아니어서 몇 번 또 얼렀더니 중국인의 위대한 번식력은 숨길 수 없었던지 그만 아가씨 배가 볼록 튀어나오기 시작해버렸다. 그리하여 지금 숙모는 집에서 엄마한테 실컷 두드려 맞은 다음에 급하게 매파를 넣어 푸파한테 시집을 온 것. 그땐 푸파 청년이 늘 살가울지 알았겠지.
청예의 숙모가 청예에게 말한다. 내 짐작에 그 처녀가 아이를 뱄을 거 같은데? 처녀한테 장가들려면 시간이 없어. 서둘러. 시집을 오면 그 처녀도 변할 거야. 안색도 어두워지고 너도 그애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될 거야. 때리고 욕하게 될 걸!
아니나다를까, 청예는 진즈가 시집온지 넉 달 만에 낳은 딸 작은 진즈가 하루종일 빽빽거리며 울기만 한다고 집어 던져 모진 세상 그만 살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서방새끼를 견디지 못한 진즈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고. 하지만 누가 먹여살려? 진즈는 하얼빈으로 나가 삯바느질을 하다가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인 몸을 팔기도 하며 1위안을 마련해 얼른 돌아오지만, 돈을 본 엄마는 하루가 지나자 다시 서둘러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돈을 더 벌어오라고 한다. 인생이 다 그렇다. 우라질.
20세기 초반의 중국 동북지역하면 잊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폐 페스트의 창궐.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주 괴뢰국의 탄생. 폐 페스트가 먼저다. 이쪽 동네에 샤오홍의 새까만 후배 작가가 있어서 내가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츠쯔젠. 이이가 쓴 장편소설 <백설 까마귀>가 폐 페스트의 창궐과 이에 대항해 싸우는 하얼빈 시내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이얼구나 강의 오른쪽> 뒷부분에 대 일본 전쟁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눈이 더 번쩍 띄었을 지도 모르지. 아니, 아마 그랬을 걸?
샤오홍의 이 촌동네에서도 폐 페스트가 창궐해 하얼빈에서 무릎까지 오는 긴 흰 옷을 입고 하얀 마스크를 쓴 외국 사람이 동네에 일차 왕림을 해 사람들에게 주사 치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벌써 병에 걸려 강력한 항생제를 주사해도 겨우 살똥말똥한 아이들한테 결코 주사를 맞추려 하지 않는 주민들. 엉겁결에 붙들려 주사를 맞고 역병을 피해 어떻게 이렇게 재수없을 수 있을까 한숨을 쉬지만 결국 그래서 역병을 피한 사람들 이야기. 하여간 이 동네에서도 숱한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래서 지주가 소작인들한테 허용한 소작인들을 위한 땅, 공동묘지에 사이좋게 묻힌다. 비록 들개가 어슬렁거리면서 시신을 파내 오도독뽀도독 뼈 채 갉아 먹어버리기는 하지만서도.
이런 와중에 봄이 오면 개구리, 두꺼비, 남생이 같은 양서류, 포유류부터 시작해 돼지, 암소, 개, 고양이 그리고 사람까지 줄줄이 새끼를 낳기 시작한다. 역병이 들어 죽어 묻히는 동시에 악을, 악을 쓰며 낳아 놓으면 또 상상을 초월하게 높은 영아사망율로 눈물바람을 하고. 그래서 낳고, 살고, 죽는 마당, 제목이 생사의 장이 되는 것이겠지.
여기서 끝나면 말도 안 한다.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하는 무력단체가 비 온 다음 날 죽순 돋듯 생기는데, 이게 진짜 저항군인지, 비적단인지, 저항군이면 혁명군인지, 민국군인지 우매한 백성들은 구별도 못하고 그냥 들어가 버리고, 하여간 누군가와 싸우다 죽어버리고, 그렇게 죽은 청년들의 어머니는 너 없는 세상, 내가 살아서 뭐하리, 진득하고 쓰디쓴 독을 먹고 명을 재촉한다.
하여간 눈물이 앞을 가리는 참상. 그땐 다 그랬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샤오홍도 그래서 작품의 제목을 생사의 장이라 한 거겠지. 이이는 천생 단편작가이다. 이 중편 정도의 소설 <생사의 장>도 단편 분량의 에피소드가 연속적으로 펼쳐져 읽기에 수월하고 절대분량도 많지 않다. 하루 뚝, 하면 책 다 읽고 독후감도 쓰고 쐬주도 한 잔 마실 수 있다. 독후감 다 썼으니 나도 이제 나가서 돼지 가브리살에 쐬주 한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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