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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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티파니 Danielle 잭슨은 뉴욕주 몬트로즈에 있는, 주로 백인뿐인 웨스트체스터의 (헨드릭 허드슨) 고등학교에 다녔고 잭앤드질의 회원이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졸업 후 하워드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뉴 스쿨 대학에서 미디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내셔널 지오그래픽, NNC 아메리카 등 다양한 네트워크 및 미디어 회사에서 10년 이상의 커리어를 쌓는다. 2009년에는 단편 공포영화 <필드 트립>의 각본과 감독을 맡기도 했다.

  위키피디아에 소개하는 잭슨의 소설 작품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하이틴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 그것을 둘러싼 보편적 미국인의 사고방식, 사고방식을 소통하는 채널 또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추가하자면 작가가 청소년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장르인 공포물이거나. 잭슨의 홈페이지에서, 만일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을 하겠느냐는 팬의 질문에 이이는 “공포에 휩싸인 것을 창작하거나 가르치는 일”이라 대답할 정도니까 공포 장르에 지극한 관심이 있다고 봐도 좋겠다. 십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R.L. 스타인, 35개 언어로 무려 4억 권 이상을 판매하여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공포소설 시리즈 <구스범프>를 쓴 로버트 스타인의 열렬한 팬이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역시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공포의 왕’ 스티븐 킹 같은 인물들이다. 따라서 티파니 잭슨의 작품이 다분히 서스펜스 적인 구도를 갖춘 것 역시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일. 다른 작품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로운>은 확실히 그렇다. 흑인 하이틴에 대한 성을 포함한 폭력 범죄, 흑인 여성의 피해에 관한 삐딱한 사적, 공적 시선, 공포스러운 수준인 그루밍과 가스라이팅. 나는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에 관해서 말로만 어떤 것이다, 들었을 뿐이라서 작중 수퍼스타 코리 필즈가 주인공 인챈티드 존스에게 가하는 행위에 아예 질려버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소설과 영상을 통해 코리 필즈의 행위와 유사한 것들을 적지 않게 읽고 봤다. 그게 <그로운>의 등장인물들이 가하고 당하는 수준까지 아니었을 뿐, 완력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인간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장악하려는 장면은 살면서 여러 번, 어떻게 생각하면 자주 목격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 세밀하게 생각해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을 가하거나 당하지는 않았을까?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이 가한 건 잘 기억하지 못하고, 당한 건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틀림없이 정도의 차이지, 나도, 당신도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을 가한 적도 있고 당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더 조심해서 살자는 뜻으로.


  안챈티드 존스. 애칭 ‘챈티’는 노래도 잘하고 수영실력도 수준급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17세, 반년 후엔 성년인 18세가 될 고등학생이다. 챈티가 다니는 파크우드 고등학교는 카운티에서 엄격한 복장 규정이 없는 유일한 사립학교라서 흑인 학생이라고는 전교에 열 명밖에 없다. 그렇게 까다롭지 않은 학교 규정에 집중을 방해하는 머리 모양을 금지한다는 항목이 있어서 가닥가닥 굵게 땋은 드레드록스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버렸다. 흑인으로 살기가 만만치 않다. 흑인 아이라 불량스럽다, 흑인 아이라 머리 모양이 저렇다, 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알아서 긴 거”였다.

  존스 가족은 원래 외할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살았다. 챈티는 어려서부터 물, 수영장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바다처럼 파도가 치거나 강처럼 흐르는 물 속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해 하루 종일이라도 물 속에 있을 수 있었지만,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빌리 할리데이, 에타 제임스 같은 클래식한 재즈부터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어리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같은 팝스타까지 다 좋아하다가 이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니 자기 역시 다섯 옥타브를 넘는 음역과 풍성한 성량을 가지게 됐다. 당연히 학교에서 알아주는 노래꾼이 되었는데, 거의 유일한 절친 가브리엘라, ‘갭’이 챈티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서 엄마가 운전하는 엄마 차를 타고 BET 방송국에서 하는 뮤직 라이브 오디션에 참가해, 1등을 먹었으면 1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장렬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스테이지에서 눈물을 찔끔찔끔 짜고 있을 때, 심사위원은 아니지만 오디션 도중에 불쑥 등장해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 있던 수퍼, 수퍼 중의 수퍼스타 코리 필즈가 어느 새 챈티의 뒤에 다가와 목덜미 가까이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이렇게 속삭이는 거였다.

  “좋은 노래였어.”

  코리가 몇 살이냐고 물었고, 열일곱이라는 챈티의 대답을 들은 아주 잠깐 조금 실망한 듯하더니, 다음 주 토요일의 자기 공연에 챈티와 부모를 VIP석에 초대한다.

  “입구에서 내가 초대했다고 말하면 될 거야, 브라이트 아이즈.”

  브라이트 아이즈? 그가, 무려 코리 필즈가 나를 ‘브라이트 아이즈’라고 부른 거야? 챈티는 흐물흐물 녹아버린다. 일찍이 열세 살에 이미 수퍼스타가 되어 마이클 잭슨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른 곡이 열다섯, 15세에 첫번째 그래미 상을 받은 이후 음악상이라는 음악상은 모두, 아니지, 에미상 하나 빼고 메이저 어워드는 몽땅 수집한 미국 대중음악계의 천재가 나를 초대한 거야?


  존스 가족이 재정적으로 여유로워 다양성이 부족한 뉴욕의 부자동네 하트데일로 이사왔고 아이 둘을 엘리트 사립학교에 넣은 것도 모자라 10대 흑인 커뮤니티인 윌앤드윌로우 클럽에 가입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전기노조에 가입해 2교대로 일하며 케이블을 수리하는 일을 하고, 이사와 동시에 간호학교를 다녀 자격증을 딴 엄마는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하며, 집세와 아이들 사립학교 등록금, 수영 과외활동 지원비, 윌앤드윌로우 회비와 행사 참가비를 조달하느라 쌔가 빠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이나 적은가? 맏이 챈티, 둘째 딸 셰이, 밑으로 딸 아들 쌍둥이 펄과 피닉스, 막내딸 테스티니까지 다섯을 키울 생각하면 머리가 찌근거리겠지? 걱정하지 마시라, 다 살게 되어 있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 존스씨와 존스 부인도 맏딸 챈티의 손을 잡고 코리 필즈 콘서트에 VIP로 참석해서, 공연을 즐긴 후, VIP라는 것이 공연 후에 백스테이지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며, 절대로 푸르지 않은 그린룸까지 들어가 숱한 스타들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린 라이트를 말하는 것인지 처음 알았고, 이를 충분히 즐긴다. 평소 우상으로 알던 조금 나이든 가수들까지 모두 와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을 터. 몸에 걸친 의상과 액세서리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티파니 잭슨은 그딴 것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으며, 팝스타들 역시 삶에 허덕거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부와 스스럼없이 짧지 않은 동안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데 머뭇거리지 않는다. 여기에다가 코리 필즈는 얼마나 부부에게 점잖고, 정중하고, 상냥한지. 그는 부모에게 말한다. 따님 인챈티드 존스 양이 노래에 상당한 재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배워야 합니다. 레슨이 필요합니다. 자질이 너무 출중하기 때문에 제가 무료로 레슨을 해주고 제 공연에 세워보려 합니다.

  실제로 엄마 라토야 존스 여사는 챈티와 함께 웨스트사이드에 있는 코리 필즈의 펜트하우스에 설치한 음악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구경하고, 세 시간 동안의 첫번째 레슨 시간을 갖게 된다. 엄마는 세 시간 동안 레슨을 받을 딸에게 나름 엄격하게 말한다.

  “예의를 지켜. 숙녀처럼 행동하고.”

  그러나 챈티가 보기에 코리한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애수哀愁”가 있었던 것이니 코리의 친절과 따스함과 상냥함과 애정이 바야흐로 그루밍의 시작이었던 것을 챈티도, 존스 여사도, 독자도 몰랐던 거였다. 코리가 주장하는 스튜디오의 규칙: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함.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목소리가 공기중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함.

  이렇게 애수 속에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의 강철 발톱이 돋아, 드라마는 미성년자 성착취와 폭력과 약물 강제와 감금과 살인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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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0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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