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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ㅣ 새소설 15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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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75년 토끼띠. 이 책 나온 2024년에 만 49세. 글을 쓰던 23년엔 세는 나이 마흔아홉. 딸 둘을 둔 엄마라는 것만 밝혔으니, 독자도 더 알려 하지 말자. 명지전문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6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다. 책방에서 김이설 검색하면 공저 포함 마흔 권이 올라온다. 나름대로 꾸준히 쓰고 있다. 나이 마흔아홉. 살만큼 산 거 같은 나이. 바로 직전까지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이젠 말과 행동을 하고 싶은 대로 하던 버릇을 조금씩 내려 놓아야 할 때. 김이설은 이 시절의 여성 셋을 호출했다. 미경, 정은 그리고 난주. 소위 경장편. 경장편이 뭔가 하면,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좀 남우세스럽고 그렇다고 중편이라 하기엔 좀 아쉬운 분량의 소설을 말한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회사의 자랑인 고급 기술력으로 널럴하게 편집해 딱 2백쪽을 넘겼다. 김이설은 2023년 여름에 출판사로부터 경장편 한 편을 의뢰받고 쓰기 시작했는데 이게 말이 쉽지 동력을 얻기가 만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재를 할 터이니 미리 읽고 숙제 검사를 해줄 독자를 모집해 이 소설의 초안을 썼다고, 작가 후기에 밝혔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그렇게 해서 매주 원고지 서른 장을 썼단다.
김이설은 딱 자기 나이 또래 대학동창을 호출했다. 그래서 당연히 자기의 시절이다. 소위 X세대, 수능 0세대. 수능을 여름에 한 번 보고, 겨울에 또 봐서 둘 중에 좋은 점수를 대입에 적용한 아주 짧은 또는 유일한 학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94학번이다.
아주 오래 전, 박완서는 “여자 나이 마흔아홉”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엔 2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출산과 육아를 시작해서, 마흔아홉 정도 되면 맏딸이 대학을 졸업해 딱 결혼적령기에 다달았다. 엄마는 딸아이 남자친구와 그 가족의 재산, 학력, 가정, 성격, 외모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둘 사이에 접착제를 붙여주든지 매몰차게 정리를 해주었고, 필요에 따라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에 일차 왕림해 처녀막재생수술도 받게 해야 했다. 어디서 나오더라? <휘청거리는 오후>던가?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에 출연하는 세 명의 주인공 가운데 난주가 딱 이렇다. 대신 아들만 둘이고, 아이들에게 올 인해 (아이들 말고)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시켰더니 이젠 자기 아내한테만 입이 무거운 남편을 그대로 닮아서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한 달에 용돈주는 날 딱 하루 빼고, 엄마한테 말 한 마디 안 한다. 박완서 시절처럼 아들 일에 말이라도 보태려면 엄마 조언이나 도움 필요 없으니 제발 그만 놔두라고 타박이나 한다. 남편은 직장과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한테만 온갖 정성을 쏟아 한 달에 두어번 넘어 제주도니 동남아니 골프 치러 다니는데 정말 골프를 치러 가는 건지, 친구들하고만 가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젊은 시절엔 질투도 나고 신경질도 나고 바가지도 박박 긁어보았지만, 이제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될까봐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는다.
이렇게 제법 사는, 그래봤자 인 서울도 아니고 안양이긴 하지만 겉으로만 유한마담으로 지내면서 난주의 우울증은 째각째각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결국 병원에 다녀야 했고, 약을 복용해야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아무 연락도 없이 일주일간 혼자 강릉으로 떠나 숱한 남자와 술을 마셨고, 그 가운데 몇 명과는 섹스를 했어도 마음이 허전한 건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내내 남편한테, 아들한테 카톡 한 자,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가, 일주일이 되자 남편이 문자를 보내 “둘째 제대할 때까지만 참아주면 좋겠다.”라고 한다. 왜? 제대하면 어떻게 하게? 두 달 있으면 제대하니 그때 헤어지자는 말인가? 군대 있을 때 이혼이라도 하면 아이가 탈영할까봐? 정작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는 난주. 난주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갱년기 증상이란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딱 이렇게 한 마디로 하면 재미없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소설책을 읽는 거 아닌가.
정은은 애초부터 여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아빠가 희망퇴직해서 받은 위로금과 퇴직금, 은행 융자를 만땅으로 받아 시작한 사업이 쫄딱 망해서 세 남매 가운데 막내는 대학 구경도 하지 못하고 지금은 어느 동네 사는지 알고는 있지만 연락해본 지도 오래다. 신입생 시절에 연애를 했다가 그애의 어머니와 누나가 삼풍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던 중에 백화점이 무너져 죽었다. 심각한 슬픔에 빠진 남자친구. 그 무거운 상실과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남자친구의 고개를 받아줄 어깨가 너무 무거울까봐 헤어졌다. 그게 남은 시절 내내 크게 후회가 되고 오래도록 창피한 일인 줄은 몰랐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적은 연봉을 주는 작은 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친정아버지처럼 조기 퇴직을 하고 퇴직금과 은행융자를 받아 키드 카페를 열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코로나가 닥쳤고, 은행에 이자도 내지 못해 키드 카페를 접었다. 이후 하는 일마다 족족 말아먹기 시작해 이제 거의 모든 거래 은행에 한도에 꽉 차도록 대출을 받은 것도 모자라, 이자와 원금을 갚기 위해 제2 금융권에서 남편이름이 아닌 정은의 이름으로 억대의 대출을 받았는데, 이자 기한이 지나면 정은의 휴대폰으로 독촉전화 또는 독촉메시지가 온다. 이걸 남편한테 전하면, 같은 나이의 남편은 즉각 “미안해요. 내일 중에 처리할 수 있어요. 다음엔 이런 일 생기지 않게 할께요.” 꼭 존대를 붙여 답글을 쓴다.
친구들한테 가오가 있어서 들어간 계약직 도서관 사서 자리에서는 벌써 잘렸고 지금은 낮엔 학교 급식사로, 밤엔 음식점 주방보조로 일한다는 걸 말하지 못한다. 손과 손가락이 두툼해지고 결 따라 가늘게 갈라진 건 벌써 오래. 원래 없는 사람이 군살은 많은 법이라 허리와 아랫배, 윗배, 가슴, 목, 어디 한 군데 퉁퉁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건 좋은데, 민망하게 오줌을 참지 못한다. 극심한 요실금으로 이제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얼른 가게 되지 않는 진퇴양난. 친구들과 강릉에 오면서도 바지와 팬티, 그리고 잠옷바지는 서너 벌씩 가져온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첫날 밤 잠을 자다가 그만 침대 위에서 요실금이 시작하는 걸 얼른 알아채고 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가 씻은 다음, 아랫도리를 벗은 채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모습은, 다행스럽게 술에 만땅 취한 친구들이 보지 못했다고 오해한다.
미경에게 강릉은 저 옛시절의 첫사랑 성희 언니의 고향이다. 94년 겨울에 성희언니 집에서 보낸 시간들. 성희 언니. 한 시절 사랑했지만 결국 다시 남편한테 가버린 사람. 그 시절까지 진지하게 의식화 학습에 몰두하던 언니와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에 이별하고, 불과 몇 년 전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삼십대 초반이었을 테고, 심근경색으로 죽을 때는 오십대 초반이었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이든 성희 언니라니.
미경은 도서관 사서 관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다니다가, 취직을 하자마자 언니가 엄마를 맡겨 버렸고, 혼자서는 도무지 아픈 엄마를 돌보며 직장생활을 할 수 없어서, 이모가 사는 보은군 도서관에 지원해 그리고 이사 가서 산다. 바쁘고 급할 때마다 잔정 없고 깊은 정도 없는 이모에게 잠깐 엄마를 부탁할 수 있으니까. 엄마가 어디 특정한 곳이 불편하거나 이상증세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아프다. 아프다고 주장한다. 현대과학이 밝힐 수 없는 고통.
내가 읽기에 미경은 깔끔하다. 입도 무겁다. 남의 일에 참견하려 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어떤 사정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표내지 않을 뿐.
이 세 명의 중년 여성이 강릉으로 길을 떠났다. 스물네 살 시절에 함께 강릉에 간 적이 있어서 이번이 25년 만에, 그저 단톡방에서 습관적으로 시작해본, 우리 그냥 떠나볼까? 난주의 제의에 설마 했던 것이 우연히 뜻이 맞은 거였다. 25년 만에. 25년 전에 강릉에 갔을 때는 난주가 결혼하기 석 달 전이어서 소위 처녀여행, 처녀파티 비슷한 기분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서 난주가 지나가는 세 명의 남자들한테 3대 3으로 놀자고 제의했고, 여섯 명의 청춘들이 정신이 빠질 정도로 술을 마셨으며, 셋은 평택인가 천안에서 놀러온 남자들과 각자 하룻밤을 보냈는데, 석 달 후에 결혼을 해야 하는 난주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강릉에서 돌아와 한 달이 지나 임신중단 수술을 받은 난주는 모텔방을 대실해 미경을 불렀고, 미경은 전복죽을 싸와 난주에게 먹인 일이 있었다.
25년이 지난 겨울. 이제 이들에게 젊음이란 지나간 흔적에 불과하다. 스물네 살 때는 마흔아홉이 그렇게 멀리 보이고 생각도 하지 못할 나이였는데, 이제 앞으로 25년 후에 다시 강릉에 온다면 그땐 일흔네 살. 그렇게 멀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어쩌면 당장 다음 달부터 생리가 멈춘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절을 맞은 세 명은 그렇게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지금 세월을 결국 이야기하며, 에라, 술이나 마시자, 옛 방식으로 시간을 때운다. 그것 말고 함께 시간 때우는 법을 25년 오랜 세월 내내 별로 배우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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