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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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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쓰홍陳思宏은 1976년, 타이완 용징永靖향에서 농부의 아홉째 자녀로 태어난 퀴어 소설가, 영화배우, 역자이다. 자식 많이 낳은 농부는 당연히 아이들이 공부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얼른 자기 밥벌이를 시작했으면, 하고 바랐겠지. 그러나 천쓰홍은 책읽기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보던 신문, 여동생의 책꽂이에 꽂힌 책을 주로 읽었고, 학교에 다니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위키피디아는 소개한다. 고등학생 시절에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혔지만 가족들은 왜 하필이면 자기네 집에서 동성애자가 나왔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곱게 생긴 외모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니 아버지 바람대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할 수 있었을까. 천쓰홍은 푸런輔仁 대학에서 영문학과와, 국립타이완대학 연극학과를 졸업한 후, 남자친구와 베를린에 정착해 주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커플이 법적 “파트너”로 등록했다고 하는데, <귀신들의 땅>에서 말하는 것처럼 동성결혼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귀신들의 땅>은 도서관의 관심도서목록에 오래 보관하던 책이다. 읽으려면 상호대차를 해야 해서 차일피일하다가, 이번에 <67번째 천산갑>이란 책을 출간했다기에, 그 책을 희망도서 신청하면서(하려다 안 했다) 전작인 <귀신들의 땅>을 먼저 읽어보자 싶어 그렇게 했다.
같은 타이완 작가 가운데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서자孼子>를 쓴 바이센융. <서자>와 <귀신들의 땅>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동성애자인 것이 드러나 집에서 쫓겨난 아들. 즉 퀴어소설이라는 점. 타이완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동성간 결혼을 합법화, 2017년에 동성간 결혼 금지가 위헌이라고 판결했지만 아직 ‘결혼’ 대신 ‘동반자 등록’이라고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시아 지역에서 동성애에 관해 상당히 관대하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천쓰홍이 1976년생, 이이가 성인이 된 시절까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이라고 크게 좋아졌을 것 같지는 않다.
작품의 주인공 톈홍는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타이완 중부의 시골, 아주 작은 마을 용징永靖에서 낳고 어린시절을 보낸 후, 동성애 성향을 목격한 어머니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베를린에서 젊은 애인 T를 만나 동성결혼했다. 베를린에서의 동성결혼이라고 해서 이 작품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경험 가운데 몇 조각은 작품에 반영을 했겠지만.
5백쪽에 달하는 장편에 한 가족 이야기. 어머니 아찬과 아버지 아산에게 당연히 각자 한 권 분량은 족히 넘을 이야기가 있고, 순서대로 5녀2남 도합 일곱 명의 자녀 개개인들 역시 한 권 분량의 소설로도 다 쓰지 못할 인생이 있는데, 그걸 몽땅 합쳐 소설 한 권으로 썼으니 얼마나 구절양장 같이 얽히고설켰는지 짐작을 하실 터, 부모, 형제, 자매들의 우여곡절과 궁상은 옮기지 않겠다.
1970년대 중반에 건설업자가 용징 최초의 타운 하우스 열 동을 짓는다. 원래 타이완 중부의 큰 지주였지만 내전에 패배한 장제스 정권이 들어서서 토지개혁을 하는 바람에 그저 그런 시골부자가 됐다가, 그럼에도 여전히 대지주의 소비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톈홍의 할머니가 하필이면 백세까지 장수하는 바람에 있던 재산마저 말짱 다 말아먹어 찌그러진 집안으로 전락했던 톈홍의 아버지 아산. 아버지는 트럭을 구입해 각종 농산물을 도시의 소매상에게 내다 파는 일을 했다가, ‘빈랑’이라고 아시지? 발암물질이 있어서 구강암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지만 중독성 또한 있어 주로 남중국 일대 주민들이 늘 우물거리면서 붉은 침을 찍찍 뱉게 하는 열매, 그걸 농부들과 협력해서 대량으로 내다 팔아 차익을 챙기면서 잠깐 여유로운 시기를 맞았고, 딱 그때 3층짜리 타운하우스 한 동에 입주했다. 빈랑 사업을 시작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다섯 딸의 학비를 모두 낼 수 있었으며, 매일 저녁 흰 쌀밥과 돼지고기를 삼킬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연초에 드디어 첫아들을 낳더니 연말에 이왕 낳은 김에 둘째 아들도 한 번 더 쑥 뽑아냈다. 이렇게 세상 빛을 본 일곱째 막내이자 두번째 아들이 오늘의 주인공 톈홍. 말 그대로 생로병사를 시작한다.
톈홍은 여덟 살 무렵에 빨간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옆집 왕씨네 아들 징쯔총에게 유별난 정을 느낀다. 징쯔총도 톈홍을 귀여워해 함께 극장에 가면 무릎에 앉히고 영화를 보곤 했는데 당시가 시골 용징에서 거의 처음 상영하는 영화였음에도 톈홍은 스크린을 바라보는 대신 엉뚱하게 빨간 반바지 사이로 자꾸 손을 집어넣어 징쯔총한테 쿠사리도 받고 그랬다. 하여간 그러다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하필이면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학생들을 두드려 패던 담임선생의 친아들 샤오촨에게 그게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고 하여간 무슨 감정을 느낀다. 무슨? 무슨은 무슨이야, 연애감정이겠지. 톈홍의 일방적인. 하지만 담임은 둘 사이를 의심할 만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그렇지 않아도 미친년 같던 폭력 성향에 불이 붙어 학교 나무에 묶어놓고 상급 아이 몇 명을 불러다가 매타작에 들어갈 때, 바로 옆을 지나던 톈홍의 형 톈이는 그걸 슬쩍 보더니, 그냥 가던 길 갔다. 진짜 형 맞다. 이래봬도 나중에 용징 현장까지 해먹는 형. 업무상 배임으로 임기도 못 채우고 감방에 가긴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 샤오촨의 엄마이자 담임선생이 집으로 쳐들어와 당장 다른 학교로 전학하라고 난리법석을 한 번 떨더니 정작 자기 아들을 전학시키고 나중엔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다. 샤오촨은 톈홍과의 연애감정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고향을 못 잊어 홀로 다시 용징으로 와 터를 잡긴 해도.
이렇게 세월은 흘러, 톈홍은 베를린에서 살다가 가난하고 젊은 청년 T를 만나 연애를 하고, 동반자 등록을 한다. T는 톈홍과의 관계를 부모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크리스마스 시즌을 빌어 발트해에 인접한 고향 라뵈 집으로 간다. 가긴 갔다. 가서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식사, 작은 만찬을 하면서, 이미 얼굴이 수세미처럼 구겨져버린 아버지와 대판 싸움을 하고 의절을 해버렸다.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 커플은 가난 속에서 어렵게 살다가, T는 네오 나치 집단에 들어가더니 어깨와 팔뚝 사이에 18과 44라는 숫자를 문신으로 새기고, 꼭 N자를 새긴 비싼 미제 운동화만 신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18은 1번째와 8번째 알파벳, AH, 아돌프 히틀러를 의미하고, 미제 운동화 N은 나치의 첫 글자와 같다. 같긴 같지만 결국 동료들에게 동성애 성향이 뽀록이 나고마는 T. 험한 세상을 만나 T는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톈홍과 극한 싸움, 육체적 결투를 벌이게 되는데, 애당초 순혈 아리안족하고 왜소한 남부 중국인하고 상대가 되겠어? 이 결과 톈홍은 짧지 않은 세월 베를린 교도소에서 콩밥을 먹고, 출소하고, 다시 타이완 용징으로 귀향해 누나들을 만나는 이야기.
원래 누나가 다섯 있었지만 다섯째 누나 차오메이는 스스로 험하게 죽었다. 약을 충분히 먹은 다음에 넷째 언니 결혼식장에 들어가 칼로 자기 몸을 북북 긋더니 얼굴에 비닐 봉지를 덮고는 죽은 개와 고양이를 던져버리는 개울에 처박혀서. 넷째 누나는 이때의 충격으로 ‘백악관’이라 불리는 용징 최고의 저택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고 지낸다. 하나 있는 형은 업무상 배임에 따른 징역형을 마치고 출소해 백악관에 들어가 넷째 누나 수발을 하고. 그리하여 베를린 감옥에서 출소한 기념으로 생두부를 함께 먹을 사람으로는 이제 딱 하나 남아 타운하우스 아버지 집을 지키고 있는 첫째 누나 수메이, 타이베이에서 민원 공무원 일을 하는 둘째 누나 수리, 타이완 최고의 뉴스 앵커한테 날이면 날마다 두드려 맞으며 사는 아름다운 셋째 누나 수칭. 그리고 어린 시절 친구, 어쩌면 절친, 말 그대로 친구였던 샤오촨. 여기에 한 명만 더 보태자면, 제목 <귀신들의 땅>이니까, 이미 귀신으로 살기 시작한지 꽤 된 아버지 아산의 유령. 이렇게 기구하게 살아온 사람들. 이야기가 속도감이 있어서 그렇지 딸 셋과 막내 아들이 만났을 때, 맏이는 이미 나이 육십이 됐거나 근처까지 간 세월이 흘렀다. 징글징글한 삶의 이야기들.
그런데 어째 좀 덜 재미있게 읽었다. 이미 죽은 귀신이 직접 말을 한다고 해서 <귀신들의 땅>이 윌리엄 포크너 근처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좀 뭣하고, 성소수자에 관한 퀴어 소설이라는 것도 이제는 특별하지도 않고, 궁상스런 삶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은 내력이 있으니 눈에 쏙 들어오지도 않았으며, 하여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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