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회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서정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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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 순천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고 어려운 초년 팔자를 견디던 서정춘은 야간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1959년에 상경, 김승옥이 소개해준 출판사에 들어가 일을 하며 틈틈이 시를 쓴다. 스물일곱 살 때인 1968년에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잠자리 날다>가 당선하면서 시인 말석에 자리를 깔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등단하자마자 소멸하거나 은퇴해버린 숱한 시인,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여겼다. 그럴 수밖에. 세월이 흘러 1996년, 시인 면허증을 따고 28년이 흘렀으며 41년생 서정춘이 쉰다섯 살이 되어 정년퇴직을 하고나서야 첫번째 시집 《죽편》을 세상에 내놨으니. 20세기 말에 서정춘의 《죽편》을 읽은 평론가, 동료 시인, 작가, 독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신시新詩라도 되는 듯, 세기말에 축복을 받은 느낌이었다. 나도 그랬다.

  5년이 더 흐른 2001년에 《봄, 파르티잔》이 나와 다시한번 시 읽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그만 게으른 내 귀에 서정춘의 시집이 나왔다는 풍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20년이 넘게 흐르는 동안. 나도 시인처럼 정년퇴직을 한 다음에야 다시 ‘서정춘’이라는 이름을 볼 수 있었고, 마음에 담았다. 그랬더니 결국 눈에 띄었다. 도서관 서가에 다른 시집과 확 구별이 될 정도로 얇은 시집, 《귀》. 판권지까지 45쪽에 불과한 시집에 무려 서른여섯 편의 시를 담았다. 서정춘은 3단의 시인. 키가 짧고, 가방끈이 짧고, 시가 짧아서 3단短.

  그를 독자에게 널리 알리게 된 가장 중요한 시 <죽편 1>도 그랬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竹篇·1 ― 여행> 전문, ≪죽편≫ 22쪽


  《죽편》, 《봄, 파르티잔》에 이은 세번째 시집 《귀》. 여전히 초절정 3단 시인의 경지에 이르는데, 어째서 그럴까, 이젠 앞의 두 시집만큼의 효용이 덜하다. 시집의 제일 앞에 일행시이며 표제작인 <귀>를 배치했다.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전문. P.9)


  낮에 나온 반달은 하늘의 귀라는 건데, 내가 아는 서정춘스럽지 않게 하늘의 귀는 “신의 음성에게” 향해 있다. 이이가 그동안 좀 아팠다더니, 그래서 말술을 마시다가 이젠 딱 한 잔의 탁주에서 한 모금도 더하지 않는다더니, 어느새 신에게 귀의했나보지? 하긴 아닐 수도 있다. “꽃 그려 새 울려놓고 /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던 ‘봄’이라는 파르티잔 적的 자연현상도 신일 수도 있을 테니까. 음. 이 시집이 나왔을 때 시인은 겨우 예순네 살밖에 안 되었는데.

  이 시집에서 가장 글자 수가 많은 작품은 <아름다운 독선(獨善)>이다. 시인들은 자주 시 자체가 시의 주제이다. 이 시도 그렇다. 서정춘에게 시를 쓴다는 건 사실 자신의 독선이라 말하는데, 또한 사실 시인의 독설이 아닌 시를 쓰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나? 이 시 작품은 시 자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자기가 시를 쓰는 행위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이 읽힌다.


  그러니까,

  나의 아름다운 봄밤은 저수지가 말한다

  좀생이 잔별들이 저수지로 내려와

  물 뜨는 소리에 귀를 적셔보는 일

  그 다음은, 별빛에 흘린 듯 흘린 듯

  물뱀 한 마리가 물금 치고 줄금 치고

  一行詩 한 줄처럼 나그네길 가는 것

  저것이, 몸이 구불구불 징한 것이 저렇게

  날금 같은 직선을 만든다는 생각

  그래서는 물금줄금 직선만 아직 내 것이라는 것

  오 내 새끼, 아름다운 직선은 독선의 뱀새끼라는 것   (전문. P.11)


  그래, 그러니까 서정춘의 시가 짧을 수밖에. 직선이라니까. 유크리드 공간에서 점과 점을 잇는 가장 가까운 선은 직선이다. 직선을 긋듯 시를 쓰면 나머지 우다다다 수다를 떨 필요가 없어지고, 은유와 직유는 소멸시켜야 하며, 눈물과 설사와 땀과 피조차 건조기 레벨을 극한까지 올려 바싹 말려야 한다. 서정춘은 이렇게 건조하고 직선적인 시를 써놓고 함빡 웃으며, 오 내 새끼, 내 뱀새끼, 하고 킬킬 웃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말술을 마셨겠지. 모자란 수분을 보충하느라고.

  그런데 이런 시는:



  낮달을 헹구다



  올라라

  홀어미

  설거지에

  씻긴

  달

  시렁 위에

  올라라

  白磁 접시의

  달

  홀어미의

  달

  올라라   (전문. P.18)


  서정춘의 생모는 시인이 첫돌을 지내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떴다. 마부 일을 하며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없어 계모를 들였다. 계모도 아이를 낳았으니, 남이 낳은 자식보다 내가 낳은 자식이 더 귀한 것은 당연한데, 이게 어려운 관계다. 나쁜 계모 소리를 듣지 않으려 많은 계모들이 오히려 자기 새끼들에게 더 (자기 생각으로)엄하게 한다고 하는데, 원래 아이는 그것 또한 오해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수 있는 관계. 어떻게 하든 힘든 사이이다. 서정춘도 이런 어려운 사이에서 피가 거꾸로 솟아 날선 호미를 계모에게 엣다 이거 맞고 죽어라, 힘껏 던진 적도 있다 하는데, 결국 해결은 세월이 해주는 법, 학교 졸업하고 집 떠나기 전에, 핏덩이 자기를 살린 사람이 생모가 아니라 계모였다는 걸 깨우치고 계모를 얼싸안고 한없이 울었단다. 이런 내력을 알면 장독대 위에 하얀 접시에 물 한 그릇 떠놓고 자식새끼 잘 되라 치성 올리는 홀어미가 시인의 계모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숨길 수 없다. 집, 고향, 대숲을 떠나기 전에 얼싸안고 한없이 울어 진짜배기 엄마, 아들 하기로 했던, 그러나 환갑이 넘어도 가슴패기 저 한구석이 조금은 서먹한 엄마와 아들.


  비백飛白. 오탁번의 시에서 처음 발견한 단어. 날릴 듯 흘린 글씨체. 시인이 섬진강 여울을 길목에서 비석 하나를 보았던 모양이다. 비석을 봤겠나, 비석에 새긴 글씨를 본 것이지. 그것을 서정춘은 아하, 이게 비백체飛白體렸다, 싶어 시를 썼다……, 이렇게 읽으면 오해. 섬진강 여울길을 가다 은빛으로 튀어오르는 연어 떼를 발견한 시인. 그는 은어의 휘날림을 보고, 누가 시인 아니라고 할까봐, 비백 글씨체를 연상한다.


흘림


  저것이냐 飛白 어느 흘림체 먹물에서 보았던 飛白 오늘 섬진강 여울에서 시린 니쏘리로 여러 번씩 보인다 飛白 돌자갈에 몸을 갈며 여울물 차오를 때 보이는 飛白 은장도 빛깔의 은어 떼가 보인다 飛白 저 역류(逆流)의 힘!  (전문 p.27)


  “니쏘리”가 뭐냐고? 치음齒音. ㅈ, ㅊ, ㅉ 으로 시작하는 소리로 들린다는 뜻이다. 훈민정음 언해에 나온다. ㅈ는 니쏘리니 즉卽자 처럼 펴아나난 소리가타니 갈바쓰면 짜慈자처럼 펴어나난 소리 가타니라. 요즘 고문 안 배우지? 그럼 그냥 넘어가자. 하여간 시인은 연어가 날리는 모습을 소리로 표현하자면 ㅈ, ㅊ, ㅉ 계열로 시작하는 음이어야 하고, 형태로 쓰자면 飛白이었다는 거다.


  이렇게 시 하나하나를 뜯어 읽으면 여전히 서정춘은 매력적이다. 나는 아쉽게도 앞선 시집 두 권을 몽땅 읽어서 이번에 읽은 《귀》는 조금 아쉬웠다. 독자는 원래 야박한 법이다. 앞선 시집보다 조금 낫거나 아니면 조금 다른 시들을 읽기 원했는데, 좋기는 하지만 서정춘을 읽을 때의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한 정도였다는 건 말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이제 여든세 살이 된 노 시인. 하여간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 삶이 허락하면 그래도 시 몇 편은 더 만들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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