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빛 하늘 아래
마크 설리번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의철학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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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크 설리번은 미국 보스턴 변두리에 있는 메드필드 출신의 58년 개띠 아저씨로 198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말끔하게 면도한 흰 와이셔츠의 미국 남자,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사하라 사막에 가서 투아레그 족 유목민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했다. 귀국해서 저널리즘 일을 조금 하다가 서른 살이 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주로 미스터리, 서스펜스 물이었으며 나름대로 꽤나 인정을 받은 걸로 보인다. 이 책 <진홍빛 하늘 아래> 서문에 따르면, 마흔일곱 살이던 2006년 초엔 그동안 글 써서 번 돈을 몽땅 까먹고 인생 최악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고 한다. 친동생이 과하게 술을 마시는 바람에 세상을 떴고, 소설은 독자들에게 외면 받았으며, 업무상 분쟁에 휘말려 개인 파산을 신청할까 말까 기로에 서게 되어 차라리 고속도로를 달리며 적당하게 자살로 위장해 죽어버리는 것이 남은 가족들에게 보탬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니까 정말 막바지까지 몰리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때 몬태나 보즈먼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열일곱 살짜리 이탈리아 소년의 영웅적 이야기를 들어 소설로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그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곧바로 연락을 해서, 직접 이탈리아로 날아가 그를 인터뷰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조사를 해, 영웅적인 소년의 활약을 통해 북이탈리아 지역의 세계대전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에 이르니, <진홍빛 하늘 아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책으로 설리번은 다시 기사회생하는 데 성공해 아직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잘 했다.


  작품은 1943년 6월 9일, 이탈리아 롬바르디 주의 주도 밀라노를 주무대로 펼쳐진다. 패션 명가 밀라노에서도 가장 첨단을 달리는 명품 가방가게 “레 보르세테 디 렐라”를 운영하는 포르치아와 미켈레 렐라 부부의 2남1녀 가운데 맏아들인 17세 키다리 소년 주세페, 애칭 ‘피노 렐라’가 주인공이다. 그보다 두 살 아래로 키가 크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리 크게 자라지 않을 예정이지만 깡다구 하나는 밀라노에서 당할 수 없는 청년으로 성장할 동생 도메니코, 애칭 ‘미모’의 형이자, 작품이 끝날 때까지 어린시절에 머물 치치의 큰오빠다. 이때까지 밀라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세계 전쟁이라는 이슈는 듣자마자 잊어버려도 상관없는 뉴스 기사에 불과했다. 재벌은 아니지만 부유한 명품 제조공장과 상점을 운영하는 유복한 가정의 여드름쟁이 피노는 아직까지 여자친구는 없었지만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나 실망이나 좌절하고는 거리가 먼 정의파였다.

  먼저 짚고 넘어가자. 마크 설리번이 주 특기로 다루는 장르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물이다. 이런 장르 문학의 경우에 읽으면서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등장인물이 딱 두 가지 부류로 갈린다는 점이다. 착한 우리편, 나쁜 너네편. 이 책에서도 나치와 독일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 두체 무소리니를 두령으로 하는 파시스트는 한 명도 빼지 않고 전부 나쁜 너네편이고, 이에 비밀리에 대항하는 시민군과 인종을 가르지 않고 나치에게 핍박받는 사람들을 스위스로 피난시키는 가톨릭 종사자들은 모두 선한 우리편이다. 주인공 피노 렐라는, 읽으면서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정말로 피노가 겪은 일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료를 수집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치열하지만 프랑스 전선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장면을 살리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의 중요한 인물들과 전부 직접 만날 기회를 얻으며, 그들로부터 정보를 제공받거나 훔칠 수 있던 것은 물론, 직접 전쟁의 중요한 장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를 위하여 피노 렐라는 10대 초년 시절부터 이탈리아에 면한 남알프스 지역의 수목한계선을 넘는 고산지대까지 등산을 즐겼으며, 프로 수준급의 스키 실력을 가진 상태로 소설을 시작한다. 이후 알프스의 까마득한 암벽 가까이에 있는 교회 겸 남자기숙학교 카사 알피나로 피난을 가서 유럽 그랑프리 포뮬라 전 챔피언을 아버지로 둔 친구를 사귀어 그에게 놀라운 정도의 운전실력까지 보유한다. 185cm에 75kg으로 시작한 17세 소년은 키도 더 크고 근육도 빵빵해져 놀라운 완력까지 지니는 정의의 사나이로 변신하며, 이에 맞추어 주변 인물들도 모두 반 나치, 반 파시즘의 시민 저항군에 가세한다.

  주변인 가운데 중요한 사람으로 먼저 기숙학교 카사 알피노의 건장한 50대 레 신부와 신부의 수석 보좌관과 요리사 역할을 하는 보르미오 수사. 이들은 밀라노 산타마리아 나센테 성당의 일데폰소 슈스터 추기경과 긴밀한 연락을 하며 유대인을 비롯한 피난민들을 험난한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망명시키는 역할을 한다. 당연히 뛰어난 등산과 스키 실력을 가지고 있는 피노 렐라가 이들을 안전하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가면서 한 명도 낙오시키지 않고 국경을 넘겨주는데, 당연히 이런 작품에서는 모진 고난과 극복, 또다시 앞의 것보다 더 독한 고난과 극복을 반복한다. 이건 국룰이 아니라 세계적인 법칙, 이른바 ‘세룰’이니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정년이>의 김태리도 그렇잖은가?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다.


​  당연히 작가 마크 설리번이 1943년에 열일곱 살 청소년이었던 이탈리아 노인과 인터뷰했다는 건 믿는데, 그리하여 그가 주장한 걸 결정적으로 번복할 수 없어서 그랬는지, 작가도 매우 가톨릭 친화적이다. 당시 교황이 비오 12세.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배경으로 하는 카사 알피노의 정의로운 레 신부는 밀라노의 슈스터 추기경과 긴밀하게 협조를 하고 있으며, 추기경은 또한 레 신부의 유대인 망명 협조를 비오 12세에게 보고를 하여 교황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독자에게 이런 도움을 교황이 총괄했다는 암시를 줄 정도이다. 우리나라 가톨릭계에서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비오 12세와 로마 가톨릭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큰 힘을 쏟았다고 광고하고 있지만,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 천주교사에서 조선인 신분의 영광스러운 첫 번째 주교였던 노기남이 추축국 일본제국을 미친듯이 찬양한 다양한 증거들을 연상하면 별로 믿고 싶지 않다. 또한 비가톨릭 쪽에서는 비오 12세와 히틀러의 협조 여부로 시비를 걸고 있기도 하다. 마침내 2차 세계대전 당시 비밀문서가 보관기일을 넘겨 열람이 가능하지만 아직도 이에 대해 명쾌하게 어떠했다, 라고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내 생각, 단지 정말 생각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말해보자면, 교단도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 유대인을 구하기도 했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히틀러에게 그래, 그래 하기도 했겠지. 그러니 내놓고 유대인 학살에 관해서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도 않았거나 못했지 않겠나 싶다. 나치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바티칸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교황이라 해도 쉽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을 수 있었겠어? 교황도 총 맞으면 죽거든. ‘진짜 용기’라는 거, 이거 아무나 내는 게 아니거든. 제사 지낼 때나 제사장이고, 교황이고, 사제이지 한낱 인간인 건 다 마찬가지거든.


​  밀라노에 미영 폭격기의 공습이 본격화하자, 피노의 부모는 아들 둘을 카사 알피노에게 피난을 보내고, 열여덟 살이 되기 몇 달 전에 피노만 다시 밀라노로 부른다. 이제 18세가 되면 이탈리아 정부는 피노를 파시스트 군대에 보내 독일의 대 소련 전선에 투입, 총알받이나 대포밥으로 삼을 것이니, 차라리 독일군 건설대에 자원입대해 전선이 아니라 후방에서 명을 보존하라고 강권한다. 도무지 말릴 수 없고, 비타협적인 명령에 몸이 익은 천생 사업가인 엄마 포르치아가 간단하게 선언한다. 넌 아직 미성년자야. 결정은 내가 한다. 넌 독일 토트 조직에 입대해!

  그리하여 피노는 전선 대신 이웃 도시의 중앙역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가 벌건 대낮에 공습을 당해 오른손 둘째와 셋째 손가락이 덜렁거릴 정도의 부상을 입어 잠깐 귀가조치를 받고, 귀가 첫날 마침 (고급 레지스탕스 지위에 있던) 외삼촌의 가죽 가게 앞에 서 있는 고장난 6륜 구동 다임러를 발견, 알프스에서 운전을 배울 때 함께 익힌 정비 실력으로 불과 몇 분만에 말끔하게 고쳐준다. 이게 누구 차인가 하면 회의를 할 때 히틀러의 바로 왼쪽 옆에 앉는다는 군수품 전권대사 한스 레이어스 장군의 전용차였다. 정부 돌리에게 가방 하나를 선물로 사줄까 하고 들렀다가 시동이 꺼져 화가 단단히 난 레이어스 장군은 그 자리에서 피노를 자신의 전용 운전병으로 고용한다.

  고민에 빠진 피노. 가뜩이나 독일군에 입대해 이두박근에 하켄 크로이츠 완장을 달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서 탈영해 저항군에 들어갈까 고심하던 차에 이제 장군의 운전병이라니,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잔뜩 부어올랐다. 그러나 그의 현명한 외삼촌 오스트리아 사람 알베르트는 이것을 천재일우라고 여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탈리아 전역의 물류이동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레이어스 장군의 운전병이라면 누구보다도 고급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으니, 이제는 마음먹고 독일군의 정보를 빼오는 첩보원으로 일하라는 거였다. 그가 정보를 가져오면 모종의 루트를 통해 영국 정보국으로 송신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숱한 연합군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정말로 그가 말한 장소에 미군과 영국군의 폭격기가 폭격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이제 열여덟 살이 된 피노 앞에 피할 수 없이 등장해야 하는 숙명적인 스토리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맞다, 연애. 레이어스 장군의 정부 돌리. 그녀의 집에 가정부로 있는 스물네 살의 여성이 누구냐 하면, 피노가 작년 이후로 애타게 찾고 있던 환상 속의 여인인 안나. 궁금하지? 그래, 그래. 시원하게 말해준다. 안나와 얼려 피노는 총각 딱지를 뗀다. 됐어? 그러나 잊지 마시라.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북부 이탈리아를 다룬 소설이라는 것을. 전쟁 자체에 이미 숱한 비극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다. 그래서 속도도 팍팍 나간다.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마크 설리번이 이 작품도 다분히 미스터리 서스펜스에 어울릴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영화를 염두에 둔, 아니, 다시 말하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헐리우드 영화. 심각하고 중요한 일을 애써서 다 마치고나서 꼭 한 마디 농담을 던져야 직성이 풀리는 등장인물을 보는 듯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다. 기껏 심각하고 긴박한 스토리를 진행하다가 이런 디테일에서 독자의 헛심을 빼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그리하여 에피소드 자체가, 아휴, 한 때의 베스트셀러에 대해 아마추어가 이렇게 말을 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작위적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불만은 사소하다. 그저 이런 작품은 재미 있으면 그걸로 장땡이다. 아쉽게 품절 상태이니 도서관에 들르실 일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다. 다만 해설 없이 655쪽까지 달려야 하는 것이 조금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터. 인생이 그렇지 뭐 다 좋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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