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녀들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8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정소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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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올해 여름에 93세 7개월 12일을 살다가 런던에서 생을 멈춘 조세핀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아일랜드 작가로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이름을 낸 소설가였던 모양인데, 나는 이름도 몰랐다. 출판사 은행나무의 ‘에세’ 시리즈에서 이런 작가, 작품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어 독자 입장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이 시리즈의 18번으로, 열여덟 권 모두 여성 소설가가 쓴 작품으로 구성했다. 여성작가 시리즈가 이것 말고 다른 출판사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좋은 작품만 소개하면 되지 굳이 여성작가만 대상으로 하는 것에 불만이 생길 즈음, 은행나무는 드디어 에세 시리즈의 19번에서 처음으로 제럴드 머네인의 <평원>, 150쪽에 불과한 중편 정도의 소설을 찍어, 다음 달에 읽을 예정이다. 괜찮다고 여기는 작가 구성이 남자 한 명에 여자 18명 정도 되는 모양이다. 문학은 여성시대로 오래전에 완전히 바뀌었다. 1번으로 나온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는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었고, 2번부터 한 권도 빼지 않고 집중하고 있다. 좋은 책만 찍어라, 읽는 건 내가 한다. 별로 소용은 없겠지만 광고와 영업도 해준다.


  에드가 오브라이언은 소설 말고도 회고록, 극작, 시, 단편소설도 썼다고 하는데, 하여간 전업작가로 2019년까지, 그러니까 88세에 낸 마지막 장편소설 <소녀>까지 쉬지 않고 뭔가를 썼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1960년부터 64년까지 출간한 시골소녀 3부작, <시골 소녀들>, <외로운 소녀들>, <행복한 결혼을 한 소녀들>일 것 같다. 필립 로스는 오브라이언을 가리켜 “현재 영어로 글을 쓰는 가장 재능있는 여성”이라고 평했다고. 로스가 이렇게 말한 것이 언제 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요즘에 이렇게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다가는 네가 뭔데 재능이 있고 아니고, 여성이고 남성이고를 말하느냐고 경향각지를 막론하고 오지게 얻어 터졌을 듯하다. 안 그랴? “가장 재능있는 여성” 속에 은근히 여자가 이 정도면 잘 쓴다고 해줄께, 뭐 이 비슷한 뉘앙스가 보이는 거 같아서 그렇다. 내가 여자라면 로스의 말이 달갑지 않을 것 같다. 반면에 아일랜드의 대통령이었던 매리 로빈슨은 “그녀 세대의 가장 위대한 창의적인 작가 중 한 명”이라 평했다. 매리 로빈슨은 여성 대통령이었다. 성을 불문하고 오브라이언이 창의적인 작가라고 칭찬한 것이니 얼마나 깔끔하느냐는 것이지. 필립 로스가 좀 그래. 예쁘장한 여자 제자를 뒷말 나오지 않게 자빠뜨릴 생각 하는 늙은 것들이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말이지.

  에드가 오브라이언은 완전 아일랜드 혈통(뭐 이런 혈통이란 게 있기는 있다면 하는 얘기지만)으로 어린 시절에 수녀원 부속 기숙학교를 다니며 천주교에 깊은 영향을 받은 초년시절을 지냈다. 1930년생이니 이이의 작품 속 소녀시절은 주로 1940년대 중후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당시 천주교 아일랜드는 1960년대 우리나라의 의식하고 많이 다르지 않았다고 여기면 될 듯하다. 그중에서도 시골이면 완고함, 특히 여성의 규범, 특히 성과 몸가짐에 관한 사회와 가정의 압제와 강요는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발표한 1960년이 되면 많이 나아지기는 했을지언정 그렇다고 여성이 대놓고 자신의 성적 욕망과 흥분상태를 묘사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을… 않았다고 한다. 18세를 넘어 이제 사회에서 확실한 성인으로 인정받아 음주와 흡연, 섹스를 포함한 연애의 자유를 얻었어도 임신과 피임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 연인이 더블린발 런던행 비행기를 타도 시간을 달리 해 각자 출발해야 하던 때였다.


  이 시기에 에드가 오브라이언은 열네 살 먹은 사춘기 소녀가, 작품에서는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는데, 초경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해 곧 본격적인 사춘기로 접어들었을 정도의 화자 ‘나’ 캐슬린, 애칭 ‘도티’와, 제목이 시골 소녀”들”이어서 이미 알 것 다 알 거 같고 가까이 사는 이웃집 동급생 브리짓, 애칭 ‘바바’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이들 가운데 특히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도티가 몸 속의 성적인 발현이랄까 끌림 혹은 열정을 고스란히 표현하여, 1960년대 초의 아일랜드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시골 소녀들>은 가톨릭 교회와 정부와 문화계 저명인사들로 하여금 대단히 열을 받게 했으며, 당장 금서로 지정된 건 물론이고, 분서갱유의 변까지 당했다고 하나, 이건 특정 공개장소에서 불을 싸지른 건 아니고 그냥 그런 말이 전해진 것이었는데 2015년 조사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밝혀졌단다. 그렇다 해도 이게 당시의 유럽 변방, 아일랜드의 수준이었다. 어떠셔? 겁나게 웃기지?

  도대체 어떤 장면인데 그러냐고? 독자들은 작품의 시대가 1940년대임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도 16세면 결혼을 하고 17세에 아이를 낳아, 18세에 이혼해 미혼모가 되던 시절. 동네에 늙어 골골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잡화점과 술집을 하면서 돈 깨나 모아 책의 전반부에서 도티의 주정뱅이 아빠가 빚을 많이 져서 은행에 넘어간 도티네 집과 48만5천 평에 이르는 농장을 인수하는 알부자 노총각 잭 홀랜드와, 프랑스 사람으로 더블린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주말이면 이곳 시골에 와 평온한 시간을 지내는 유부남 미스터 젠틀먼, 본명 드모리에 씨. 이들은 열네 살의 도티를 절대 소녀로 보지 않고 신붓감으로 보거나 바람피울 내연녀의 대상으로 대한다. 둘의 공통점은 도티네 집에 비하면 엄청 돈이 많다는 거. 드모리에 씨는 진짜로 부르주아 비슷하다는 거. 도티는 어떨까? 은근히 자기 무릎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잭 홀랜드는 옷과 몸이 더러워서 싫고, 난생 처음으로 진짜 키스를 가르쳐준 미스터 젠틀먼 씨한테는 자글자글하고 간질간질하고 쪼르르한 성적 반응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젠틀먼 씨를 사랑하고, 젠틀먼 씨 역시 자기를 사랑할 것으로 믿는다. 3년, 4년이 지나면 그게 사실로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러면 어느 수준의 성적 묘사인데 그리 수모를 당하고, 엄마가 평생 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됐느냐고? 나중에, 4년이 지나 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 수녀원 부속 기숙학교에 바바와 함께 입학했다가 숨막히는 기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어 퇴학을 당하고, 나이 깨나 먹었으니 자립하기 위해 더블린에 가서, 집이 거덜이 난 도티는 잡화점 점원으로 일하고, 바바는 대학에 진학해 하숙집에서 함께 살고 있을 때, 둘은 더블린의 돈 좀 있는 유부남과 노총각을 꼬여 (주로 바바가) 이들한테, 속된 말로 줄 듯 말 듯 밀당을 즐기며 고급요리와 비싼 술을 마시며 젊음을 즐긴다. 노총각과 바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유부남은 도티와 절대 그런 사이가 될 수 없으니, 도티의 마음에는 또다른 유부남인 미스터 젠틀먼, 드모리에 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부남-점원, 노총각-여대생이 두 커플을 이루어 유부남의 집에 가서 간신히 선을 넘지 않고 스릴을 즐기고 온 날, 하숙집 앞에 검은 승용차가 서 있었고, 승용차 안에는 오랜만에 등장한 드모리에 씨가 들어 있었으니 다시 나이든, 아마 40은 당연하고 50 가까운 꼰대를 하염없이 사랑한 도티는 그만 스르르 오금에 힘이 풀렸던 거다.

  어느 정도 묘사인지 빨리 말하라고? 알았다, 알았어. 둘은, 둘만 하숙집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마주보고가 아니라 나란히, 옆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오늘은 정말로 할 거야, 하고 말 거야. 이러다가 드모리에 씨가 도티의 전신 나신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홀랑 벗었고, 도티 역시 나도 보고 싶어요, 요 지랄을 해 드모리에의 늙은 몸도 홀랑 벗었더니, 역시 당신 생각대로 그냥 흐물흐물 한 것이 매달려 있었는데, 도티가 만져보니까 몽글몽글한 게 귀여웠더라, 뭐 이런 수준이다. 이 정도에서 끝난다. 그걸 지칭하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1960년대면 남학교 화장실 벽엔 “어제 친구네 집에 갔었다. 마루에서 친구 누나가 치마를 입은 채 만세를 부르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집에는 친구 누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등등의 패관문학이 절정을 달했을 때인데, 이 정도 가지고 뭔 금서에, 출간금지에, 분서갱유라는 유언비어까지 떠도느냐는 것이지.


  하여간 그렇다. 내가 읽기엔 문장이 지극히 간결하고, 담백한 데다가 주인공 도티와 바바가 만드는 불량 소녀의 감정이 인상적이어서 마음에 드는데, 한 가지가 머뭇거리게 되는 게 있다. 주로 도티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이 섬세한 간질간질, 충동, 그리고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나이 먹은 남자들의 터치를 어떤 방식으로 보아야 할지 조금 난감했던 걸 말해야겠다. 1940년대 유럽식으로 볼 것인지, 남성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성적 추행으로 봐야 할지.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열네 살짜리 소녀한테 저지르는 성추행이라서 처음엔 그렇게 읽었다가, 점점, 작가 에드나 오브라이언이 남성에 의한 성추행에 관한 인식/기억이라기보다 사춘기 소녀 속에 감추어진 리비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해서 난처했다. 어떻게 읽어야 마땅한가? 이런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는데 나름대로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이 난삽한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는 감안해주시면 좋겠다. 섣불리 말했다가는 얻어 터질 거 같고, 그냥 넘어가자니 비겁하고 찜찜할 것 같았다. 몇 방 얻어 터지는 것이 찜찜하거나 비겁한 거 보다 나을 거 같아서 굳이 말미에 꺼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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