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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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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러스데어 그레이, 이이가 누군가? 20세기의 이름난 작품 <라나크>를 쓴 바로 그이다. 적지 않은 독자가 이이의 이름과 명작 <라나크>가 귀에 선 것은, 작가와 작품이 다분히 장르문학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8년여 전 <라나크>를 읽었는데, 읽은 당시엔 마음에 콕 박혀 있었지만 내용 거의 대부분은 휘발되어 버리고 그때 “인상적으로 읽었다”는 감상만 남았다. 당시 적지 않은 문제작을 골라 출간하지만 현금의 흐름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싹 폐간을 시키고는 했던 [뿔>에서 책이 나온 것부터 불운했다. 게다가 네 권짜리 길고 긴 분량도 독자에게 쉽지 않은 허들이기도 했을 터이고.
난데없이 앨러스데어 그레이를 읽은 계기는 최근에 읽은 앨리 스미스의 <아트풀> 속에서 스미스가 같은 스코틀랜드 작가 그레이를 거론하길래, 그렇지, 그가 있었지, 무릎을 탁 치면서 냅다 검색을 해봤더니 <라나크> 말고 딱 한 권이 시장에 나왔으며, 더 기분 좋은 것이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도 있더라는 거였다. 그걸 어떻게 참나 그래. 후딱 집어와 읽을 수밖에. 이런 기분 다들 아시지?
작품의 내력을 한 번 보자.
엘스퍼스 킹이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글래스고 지역역사박물관 피플스팰리스에 그녀의 팀원으로 열성적인 직원 마이클 도널리라고 있었다. 1990년 어느 하루, 도널리가 글래스고 거리를 걷다가 쓰레기 처리를 당하기 위해 대기중이던 구식 문서 보관함을 발견했고, 언제나 구식 문서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법이라, 이 속에서 커다란 문서 다발을 찾았다. 그렇지만 문서 일체가 변호사 사무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널리는 변호사를 만나 문서의 개봉을 요청하나, 변호사는 변호사의 의무조항을 거론하며, 의뢰인이 요구한 조건, 1974년 이후에 자기 후손들만 열람하라는 내용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손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절대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소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고하기를 만일 피플스팰리스 직원이라 하더라도 당신이 문서 일부를 가져가든지 하다못해 읽어보기만 해도 절도죄로 고소할 것이니 애초 마음을 먹지 말란다. 여기서 포기하면 소설이 안 되는 법. 도널리는 과감하게 가장 중요한 서류 일부를 주머니 속에 꿍친다.
서류는 20세기 초반 연도의 편지와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글래스고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여의사 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쓴 편지와 그녀의 문서. 문서는 여사의 남편인 아치볼드 맥켄들리스가 쓴 일종의 소설책 한 권이다. 빅토리아 맥켄들리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가 수년간 운영했던 빈민 계급 여성을 위한 산과와 소아과 중심의 의료재단을 지을 수 있게 자신의 전재산을 물려준 고드윈 벡스터 씨 덕에 갑자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 의사 아치볼드 맥켄들리스가, 자기한테 있는 줄도 몰랐던 글 나부랑이를 쓰는 잔재주로 소일하더니 아내, 즉 자신을 포함한 주변사람들을 심하게 왜곡할 뿐인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 아치볼드 맨켄들리스 박사의 젊은 시절 일화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잘나가는 스코틀랜드 화가한테 삽화까지 의뢰해 딱 한 권을 만들었다는 거다.
아치볼드가 빅토리아의 두번째 남편인 건 맞다. 첫 남편 오브리 다 라 폴 블레싱턴 대장이자 준남작이 자기 머리통에 권총을 쏘아 죽은 후에 전남편의 거대한 재산을 갖고 아치볼드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연모하지만 스스로는 위대한 의사 아버지 콜린 벡스터 경에게 유전으로 물려받은 매독이 깊어 청혼은커녕 피부 접촉마저 사양하는 특출한 의사, 고드윈 벡스터의 집에서 살기는 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오해도 좀 받기도 했지만 그게 뭐? 나만 떳떳하면 되는 거 아냐? 하여간 빅토리아가 벡스터의 집에서 특출한 의사 벡스터가 보기엔 ‘그저 그런 외과의 아치볼드’라면 까다로운 전남편하고 살면서 겪은 온갖 치사한 광경은 안 보겠거니 하고 혼인한 바 있다. 남편상喪과 재혼 사이에 물론 사기꾼 변호사이자 재주 없는 도박꾼인 던컨 웨더본과 불장난 깨나 해본 바 있기는 하지만.
이런 내용의 편지와 소설을 손에 넣은 지역역사박물관의 학예사 마이클 도널리는 고민 끝에 문서를 가지고 당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필력이 높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고, 잠깐 박물관에서 일을 하기도 한 작가 앨리스데어 그레이에게 원고 검토를 부탁한다. 흥미를 느낀 그레이는, 편지와 원고를 훑어보더니, 원고가 인쇄되어 마땅한 걸작이라는 도널리의 견해에 적극 동의하면서, 자신이 편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맥켄들리스의 원본을 가능한 한 그대로 현대어, 현대작품으로 옮기는 작업을 완수한다. 결과, 책은 ①앨리스데어 그레이가 쓴 서문, ②아치볼드 맥켄들리스의 소설, ③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손주 또는 증손주에게 보내는 편지, ④다시 편집자 그레이가 붙인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이클 도널리와 작가 그레이가 ‘걸작’이라고 동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치볼드가 쓴 소설에서 평범하게 키가 큰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불쑥 솟은 정도의 신장과 보통 사람 세 명을 합한 정도의 덩치와, 거의 정육면체 형태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메스와 봉합침을 섬세하게 다루는 천재적 외과의 고드윈 벡스터의 생명 이전술에 관한 것이었다. 아치볼드의 소설에 의하면, 서로 호감을 나누어 친해진 후 처음 고드윈의 집에 가서 기함을 하게 놀랐던 것은, 두 마리의 토끼 몹시와 플롭시를 보았을 때였다. 몹시는 절반부터 머리쪽이 완전한 검정색, 플롭시는 거꾸로 절반부터 머리쪽이 완전한 순백색. 흑백의 털이 경계를 지은곳을 유심이 보니까, 섬세한 줄이 그어 있다. 몹시는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덜 발달한 거 같고, 플롭시는 하체에 비해 상체가 좀 빈약하다. 척 보면 알지. 두 마리를 반으로 잘라 교체해 붙인 거다. 이쯤 되면 뭘 생각할 수 있지? 이 소설을 썼다고 주장하는 아치볼드 맥켄들리스보다 90년 전에 태어난 메리 셀리의 역작 <프랑켄슈타인>. 한 세기 가깝게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히 창조물은 그때보다 월등하게 진화했어야지.
1881년 2월에 글래스고를 흐르는 클라이드 강에서 임신 9개월에 가까운 임산부가 익사체로 발견된다. 경찰 공의인 고드윈 벡스터가 검시해 익사한 25세가량, 신장 177cm가량, 암갈색 곱슬머리 등으로 판결하고 시신 공시를 하지만 연고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뜸들이지 않고 그냥 말해버리면, 시신을 시체공시소에서 일주일간 연고자를 기다리다가 파묻어야 하는데 고드윈이 슬쩍 시신을 빼돌려 파크 서비스 18번지, 자신의 저택 지하실로 옮긴다. 일단 배를 갈라 9개월에 육박하는 이미 죽은 아이를 꺼내고, 모녀의 두피를 절개한 후 작고 예리한 칼로 두개골을 절단한 다음, 태아의 뇌를 적출해 이미 비워놓은 어미의 머리 속으로 옮겨 각종 신경을 섬세하게 연결하고, 찌리릭,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그러했듯이 시신에게 전기충격을 가했든, 생명의 묘약을 먹였든, 마법의 플루가루를 뿌렸든 간에 한 생명을 다시 만들어 냈고, 정신연령 0세, 육체연령 25세의 벨라라고 이름짓는다. 벨라 벡스터의 탄생. 이러면 한 서른 살 먹은 고드윈 벡스터가 ‘오빠’는 아니지? 차라리 ‘아빠’가 맞는 거지? 그리하여 무시무시한 거구와 놀라운 완력과 낯가림을 심하게 타고 내성적인 고드윈 벡스터는 벨라 벡스터를 열라 사랑만 할 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외로움이 깊어지면 손빨래만 겁나 해댄다. 세상에 둘도 없이 불쌍한 캐릭터.
벨라 벡스터로 말하자면 뇌연령이 0세. 하지만 육신과 교통하지 못하면 뇌가 아니라서 다른 소아의 뇌보다 훨씬 빠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자제를 모르는 단계. 반면에 스물다섯 살이고 이미 자살하기 전에 전남편의 손길을 받은 육체, 뇌가 모르는 남자의 몸을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남자가 마음에 좀 들면 가리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고 싶어하는 단계. 어쩌겠어? 아빠 고드윈은 자기가 직접 가르치기는 뭐하니까 동료 의사로 하여금 완벽한 피임방법을 숙지하고 이행할 수 있게 조처해준다. 벨라 앞에 나타나 가장 먼저 청혼을 한 남자가 바로 아치볼드 맥켄들리스. 시골의 작은 지주가 심심풀이로 하녀와 장난쳐 만들어낸 사생아. 은행을 절대로 믿지 않았던 엄마가 죽을 당시 아치볼드에게 침대 밑에 평생 모은 돈이 있으니 뭐가 될래? 하고 물었던 엄마. 의사나 되어보련다고 대답하니 피식 웃고 죽은 엄마. 아빠는 적어도 아치한테 모른 척하지는 않아 미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죽을 때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의 유산을 남겨 줬거든.
하여간 아치볼드의 청혼을 받아들인 벨라, 고딕소설의 주인공답게 177cm 장신인 벨라는, 6주 후에 결혼하기로 해놓고 변호사 던컨 웨더본과 야반도주해 유럽 각지를 떠돌기도 하고, 웨더본의 재산이 거덜나 홀로 파리에 남아 유곽에서 몸을 팔기도 하고, 귀국해 결혼을 하려 하니, 성당에 쳐들어온 전남편 블레싱턴 장군이 자신과 벨라 벡스터라 불리는 여인, 빅토리아 블레싱턴 부인과의 혼인을 끝맺지 않은 상태이니 이 결혼을 무효라고 깽판을 치고….
이런 소설을 (벨라)빅토리아 맥켄들리스가 눈뜨고 읽어주겠느냐고? 임신 9개월 상태에서 글래스고까지 와 물에 빠져 죽은 여자, 그걸 건져다가 시체공시소에 며칠 묵힌 다음 다시 살려낸 괴물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게 한 번 책으로 찍히면 평생 아니라고, 거짓말이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지. 그것보다 더 열을 받는 건, 뭐라고, 내가 귀국할 뱃삯을 벌기 위해 프랑스에서 몇 개월간 매춘부 일을 했지만 홀라당 다 뜯겨 발간 빈 손이 되자 결국 파리에 사는, 아빠 고드윈의 친구한테 비루하게 돈을 빌어 돌아왔다고? 비겁한 아치볼드는 혹시 모르지, 원본을 수정해달라고 했던 것인지. 하여간 말도 안 되는 딱 한 권의 책을 확 불을 싸질러버릴까 싶다가, 그게 그것도 인간이라고 아치볼드가 세상에 나왔던 유일한 흔적이라서, 그냥 버리기는 뭐하니까, 1911년 이전에 쓴 소설 비슷한 잡문을 74년 이후에 자기 직계 손주나 증손주가 있다면 읽어보고 너네들 마음대로 하라고 유언을 한 거였다.
작품을 쓴 아치볼드는 1911년에 죽고, 이들 사이에 세 아들이 있었으나, 둘째와 셋째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즉시 입대해 솜 전투에서 죽었고, 맏이는 글래스고에서 자동차 사고로 엄마보다 먼저 갔다. 그래 1946년 뇌나이 66세, 몸나이 92세에 숨을 거둔 빅토리아 멕켄들리스 박사가 자기의 편지와 서류를 받기 바라는 손주, 증손주는 자기 세 아들이 뿌린 법 외 자식이나, 법 외 자식의 자식들이었다는 아련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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