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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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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원전부터 고리대금업에 관한 한 세계 어떤 인종보다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부유한 은행가였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는 걸 보고 즉시 러시아를 탈출, 핀란드를 거쳐 파리에 정착했다. 당시 러시아제국의 영토에 살다가 그곳을 탈출한 유대인 가운데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이 유럽에 정착한 이들이다. 차라리 팔레스타인이나 미국, 아니면 라틴 아메리카를 선택하지 하필이면 서유럽에 정착해 그 고생을 하느냐는 말이지. 물론 당시에 알았나, 몰랐겠지.
파리로 온 이렌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을 다니며 글을 쓰다가, 1926년 스물세 살 때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했다. 엡스타인. 유대인 성씨다. 이렌의 아버지처럼 은행가였단다. 1929년에 맏딸 데니스를 낳은 건 좋았는데, 1937년, 이미 전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팽배할 시점에 얼른 남북 아메리카 아무 곳이나 팔레스타인으로 뜨지 않고 둘째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건 뭐람. 이 시점이 사실상 거의 마지막으로 유럽을 탈출할 수 있었던 기회였을 텐데. 아마 그때도 프랑스 정부가 옙스타인 가족에게 프랑스 국적 부여요청을 거부하고 있었을 걸? (맞다! 1938년에 국적 요구가 정식으로 거부당했다.) 1년 후인 1938년 독일 전역에서는 독일인들에 의한 유대인 린치 사건인 “수정의 밤”이 벌어지고, 또다시 1년이 지나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리고 1940년 6월 23일, 군복을 입은 아돌프 히틀러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근사한 사진 한 장을 박으며, 이렌과 미셸 엡스타인의 인생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실제로 이렌 네미롭스키는 유대교를 버리고 천주교로 개종을 하며, 스스로 유대인과 거리를 둔 듯한 글을 기고하는 등의 행위를 했음에도 프랑스인이 되는 것에 실패하고, 1942년 프랑스 비시 정부의 경찰에 의하여 유대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당해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이 아니라 발진티푸스로 죽는다. 남편 미셸 엡스타인은 파리 함락과 동시에 은행에서 해고당하고 아내 이렌이 죽은 몇 달 후 아우슈비츠에서 가스를 마시고 죽는다. 두 딸이 살아남아 아직 발표하지 않은 엄마의 작품을 1990년대 후반에 소개하는데, 남긴 것이 엄마의 일기인 줄 알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니, 참.
이 책은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표작은 당연히 1929년에 발표한 <무도회>. 조금 헛갈리는데, 1929년에 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각색한 영화 대본으로 먼저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1930년에 영화 <데이비드 골더>라는 제목으로 나왔고, 연극으로도 만들어 히트를 친 모양이다. 29년에 출판사 사장이 도대체 이 작품을 누가 쓴 것인지 몰라 신문광고까지 했지만 정작 이렌 네미롭스키는 첫아이 데니스를 낳기 위해 산과에서 용을 쓰고 있었다고. 그라셋 출판사는 겨우 스물여섯 살의 여성이 이렇게 강력한 작품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었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다.
<무도회>가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없다. 파리의 은행 문 앞에 푸른 제복을 입고 서서 고객이 들어올 때마다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였다가, 고용주의 눈에 띄어 직원이 되었던 알프레드 캉프 씨. 그는 상사의 타자수로 일하던 로진 양과 연애를 해, 둘 사이에 외동딸 앙투아네트가 태어나기 바로 전 북통같이 부른 배에 웨딩드레스를 입힌 채 결혼을 했다. 이들은 파리의 허름한 파바르 가의 작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캉프 씨가 다른 건 몰라도 돈복이 있는 건 확실해서, 2년 전인 1926년에 프랑화와 영국 파운드화가 널뛰기를 하는 걸 유심히 눈 여겨 보더니 자기 전 재산을 몰빵, 대박, 대박 중에서도 초대박을 쳤고, 원래 되는 인간은 하는 일 족족 되는 게 보통이어서, 이어지는 투기성 투자도 더블, 더블-더블의 연속상영, 남은 생애 동안 아내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비단신에 흙 한 번 밟지 않고 살 수 있는, 부르주아의 일원으로 우뚝 서게 됐다. 근데 결혼한 지 14년에 딸 앙투아네트 하나밖에 없는 걸 보니 우뚝 세운 건 돈 하나밖에 없었던 모양이지?
전형적인 졸부. 이집 부모만큼 허세, 허영 덩어리로 과시하기 좋아하고, 크게 소리쳐 위압하기 좋아하는 인종을 우리도 많이 봤을 걸? 단시간에 급속도로 돈이 쏟아져 천민자본주의 시절을 충분히 경험했고, 어쩌면 아직도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지 모르니까 말이지. 알프레드 캉프는 금융업 권위자답게 부르주아 사회의 일원으로 도장이 박히기 원하고, 로진 캉프는 하층계급 출신이라 주로 공, 후, 백, 자, 남작과 그 부인들과의 교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다. 그리하여 의기투합한 부부는 무지막지한 돈을 들여 크게 무도회를 열기로 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자기네 집 안에 있는 걸 몰랐다. 열네 살 먹어 사춘기를 맞은 딸 앙투아네트. 평소 부모한테 별 애정은커녕 제대로 된 관심도 못 받은 채 사춘기를 맞아 특유의 반항심과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웬수. 그리하여 2백명을 예상한 큰 규모의 무도회에 한 바탕 거친 바람이 몰아치니, 그건 알려드릴 수 없지.
하지만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마지막 네 번째 읽은 <그날 밤>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스무 살에 만나서 이제 마흔다섯. 서로 사랑했지만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부부. 둘 다 격렬한 성격에 질투심으로 가득했고, 상대방에 대해 체념하거나 부드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니 이들이 어떻게 지냈겠어, 25년 간을. 치열하게 싸우고나서 열정적이고 감미로운 화해로 끝나곤 하는 폭풍우의 연속이었겠지. 세월이 흘러 한 시절 대단한 미인이었던 여자는 화장을 해도 깊은 주름이나 씁쓸한 표정을 가릴 수 없었다. 애지중지했지만 원하지는 않았던 딸을 느지막이 낳은 다음엔 몸도 무거워지고 틀어져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젊어 보였다. 이들은 프랑스에 정착하지 못해 모로코로 떠났고, 건축가였던 남자는 나이가 든 후에야 행운이 따라 이제 거의 부자가 됐다. 그러나 이 순간, 남자는 젊은 애인과 함께 달아나버렸고, 모로코에서 혼자 살 수 없었던 여자는 딸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상트르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선생으로 일하는 동생 곁에서 살기 위해 눈까지 내리는 작은 역에서 내렸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하고,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딸이 화자인 ‘나’이다.
여자의 동생, 그러니까 ‘나’의 이모 알베르트의 집에 도착하니 마을 우체국의 직원인 블랑슈 아주머니, 다른 곳에서 역시 학교 교사를 하고 있으며 알베르트 이모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와 있는 마르셀 아주머니가 맞아 주었다. 12월 23일이었다.
알베르트 이모는 여태 독신이다. 홀로 고독하지만 행복하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 여인 앞에서 자신의 고통, 사랑의 잘못된 결과와 ‘나’일 수밖에 없는 잘못된 과실에 대하여 호소하는 엄마.
결론은? 절대 밝히지 않겠다. 읽어가면서 그렇게 끝나겠지, 기대한 대로 되지만, 정말 그런 결말을 맞을 때, 독자는 복잡한 심정이 될 수도 있다. 멋진 단편이다. 오래 기억에 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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