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리콘 -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
페트로니우스 지음, 강미경 옮김, 노먼 린지 그림 / 공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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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도서관 개가실에서 발견하고 즉시 관심도서에 올리긴 했지만 어떻게 시간만 무지르기를 한 해, 두 해. 그러다가 일찍이 마음먹은 바가 있어서 세계적인 문학평론가 에리히 아우어바흐가 쓴 불멸의 명저, 라고 일컫는 <미메시스>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는데, 1부 “오디세우스의 흉터”에 이어 2부 “포르투나타”를 무지 재미나게 읽었던 바, 이 ‘포르투나타’라는 여성이 바로 <사티리콘>, 페트로니우스가 쓴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 가운데 2장 “트리말키오의 연회”에 등장하는 부자 트리말키오의 아내였던 거다. <미메시스>가 정말 읽기에 즐거웠던 바, 이 순간, 그 동안 관심도서 목록에 올리기만 해놓고 정작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물론 나 혼자의 생각이었지만, 쪽팔린 바 작지 아니하여, 그날로 개가실에 달려가 대출, 읽게 된 내력이다.

  이 책을 쓴 페트로니우스로 말할 것 같으면, 서기 27년에 태어나 66년에 스스로 팔 정맥을 끊어 생을 접은 네로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화비평가 정도 된다. 헨릭 시엔키에비치가 쓴 <쿠오 바디스>에서 남자 주인공 비니키우스의 외삼촌으로 등장하는데, 시엔키에비치의 묘사를 신뢰한다면, 대단히 직설적이며 죽음과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설파한 강단있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자칭 예술가인 네로조차 자기가 부른 노래, 지은 시, 연주한 기타라가 얼마나 예술적인지 알기 위해 페트로니우스의 감상 여부에 촉각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봐야 그 시대의 페트로니우스 나이가 겨우 서른 여덟, 아홉이었다. 62년에 집정관을 했다니 이때 겨우 35세. 이후 원로원 의원을 겸직하며 황제 네로의 측근으로 이름을 날렸다. 사람이 지위가 높아지면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거늘, 페트로니우스는 천성이 겸손이나 절제하고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친위대장 티겔리누스에 의하여 반역죄로 기소되어 65년에 체포당했다. <쿠오 바디스>에서는 자기가 연 연회 도중 농담 따먹기를 해가면서 의사에게 자기 팔뚝의 정맥을 절단하라고 지시하여 할 말 다 해가며 즐겁게 죽는 모습이 나온다. <쿠오 바디스>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이가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을 썼다고 했고, 우연히 페트로니우스라는 이름을 도서관 개가실에서 발견했으며, 그 책의 제목이 <사티리콘>이었으니, 여태 안 읽지도 않고 머뭇거리기만 한 건 잘못한 거 맞지?


  근데 <사티리콘>을 읽으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김우창, 유종호가 영어판 <사티리콘>에서 번역한 “포르투나타”의 부분이 이 책에서는 그리 도드라지게 재미있게 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을 번역한 강미경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라틴어가 아닌 영어를 번역할 것일 터인데.

  2장에서 <사티리콘>의 주인공 엔콜피우스가 어린 동성 연인 기톤과 함께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트리말키오가 개최하는 연회에 무단으로 슬쩍 들어가서 만찬을 즐긴다. 연회가 무르익자 트리말키오 가문의 사실상의 주인인 아내 포르투나타가 나타나 호기심이 동한 엔콜피우스는 옆에 앉은 남자에게 저 여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이에 답을 하기를:


  (김우창, 유종호 번역)

  트리말키오의 마누라지요. 이름은 포르투나타라구. 돈을 말로 재는 처지라오. 그런데 얼마 전,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마누라가 어떤 여자였는지 아시오?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뭐라고 생각하지 마시오만, 그 여자 손에서 빵도 받아먹기가 역겨웠을 거요. 어쨌든 지금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서 트리말키오의 둘도 없는 어화둥둥 내사랑이 됐단 말이오. 그뿐이오, 그 여자가 대낮에 캄캄한 밤이오, 하면, 트리말키오도 캄캄하지, 하고 받게끔 됐다 그거요. (p.72 <미메시스> 민음사 2023)


  (강미경 번역)

  트리말키오의 안사람입니다. 이름은 포르투나타인데 자루를 기준으로 돈을 세지요. 그건 그렇고 전에는 뭘 했는지 아십니까?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지만 남한테 빵 한 조각 나눠줄 여유도 없는 가난뱅이였지요.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은 천국에서 살고 있으니, 트리말키오에게는 자기 마누라가 전부지요. 사실 환한 대낮에 어둡다고 해도 마누라 말이라면 트리말키오는 곧이 믿을 겁니다. (이 책 p.99 2008)


  뭐 그렇다는 거다. 어느 것이 낫고 못하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 비교하는 건 절대, 절대, 절대 아니다. 하여간 나는 김우창/유종호 번역이 더 익숙하고 재미있었는데, 문장을 읽으며 리듬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할까? 그리하여 <미메시스>를 읽으면서 고전 시대, 고전 중의 고전 시대에도 이런 저잣거리 언어로 소설, 문학을 시도하는 작가가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것을 더 잘 얻을 수 있었을 거 같다.

  전 시대의 작품에서 스토리를 끌어가는 것은 영웅과 신들이었다. 영웅과 신이 아닌 ‘그냥 등장인물’이 하는 일은 작품에 나왔다가 지나가기, 칼 들고 돌격했다가 그냥 죽기,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신하기,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빠져 죽기 같은 것만 맡았다. 근데 페트로니우스가 쓴 인류 최초의 소설에서는 놀랍게도 주인공 엔콜피우스의 직업이 노예와 흡사한 떠돌이 검투사이며 부업으로 도둑질, 사기, 살인에다가 미소년 기톤과 동성애로 얽혀 있다. 틈만 나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는 연회에 몰래 스며들어가기를 원하고, 귀천, 빈부를 따지지 않고 어여쁜 여인이 눈에 띄면 같이 자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그냥 잡놈이다. 주인공 잡놈과 어울리는 무리들도 다 마찬가지다. 비슷한 직업과 비슷한 부업과 비슷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건달이다. 나이든 시인도 하나 있다. 에우몰푸스라고. 에우몰푸스 역시 남색을 밝히며 전력을 다해 사기를 치기 위해 좋은 머리를 팽팽 돌린다.

  엔콜피우스는 기톤, 에우몰푸스와 함께 크로톤이라는 곳에 가서 마지막으로 크게 한 탕 사기를 치기로 작심한다. 작업 중에 젊고 잘생긴 엔콜피우스를 눈여겨 본 절세 미녀가 있으니 이름도 우연히 키르케. 키르케는 하녀 크리시스에게 그를 데려오라 했고, 드디어 사랑의 정원에서 일을 벌이기 시작하니, 이러하다.

  “키르케는 백조 솜털보다 더 부드러운 팔로 나를 휘감아 안고는 풀밭으로 끌고 갔다. 우리는 풀밭에 누워 수없이 키스를 나누며 격렬한 쾌락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갔다. (키르케가 말했다.) 왜 그래요? 내 입이 당신을 불쾌하게라도 하나요?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내 입에서 무슨 냄새라도 나나요? (중략)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온몸이 늘어지면서 사내다움까지 완전히 잃고 말았던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젊고 건장한 엔콜피우스한테 갑자기 발기부전이 덮친 거였다. 좋아, 좋아. 한 번 그럴 수 있지. 증상을 알았으니 고치긴 고쳐야 한다. 이를 돕기 위하여 키르케와 크리시스가 도움을 요청한 이상한 노파들이 모여 처방을 하는데, 알려드리겠다. 이 방면에 문제가 있는 분은 한 번 해보시라고:


  “그녀는 포도주 잔을 가져와 그 위로 내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마다 파와 마늘로 문질러 깨끗이 씻긴 다음 개암나무 열매를 포도주 잔에 던지며 주문을 중얼거린다. (중략) 그런 가운데 독한 포도주가 한 순배 돌았다. (중략) 오이노테아는 가죽으로 만든 남근에다 향유와 후춧가루와 으깬 쐐기풀 씨앗을 뿌려 내 항문에 조금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가학적인 노파는 내 가랑이에도 그것들을 뿌렸다. 그녀는 고추냉이 즙과 쑥을 섞어 거기다 내 물건을 담근 후 쐐기풀 줄기를 가져와 배꼽 아래 부분을 여기저기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제대로 작동만 하면 된다고? 아서라, 아서. 그냥 병원 가서 비아그라 처방전 받는 게 훨씬 편하다. 다만, 불쌍한 남자들아, 약을 먹어서라도 꼭 그걸 해야겠다면 말이다.

  재미는 있지만 많은 부분이 유실된 작품이다. 완성도가 떨어져 읽어보시라고 권하기가 망설여진다. 도서관에 책이 있으면 훑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부록까지 5백쪽이 좀 넘는 분량이기는 하나 화가, 조각가, 판화가, 삽화가, 모형 제작자, 작가로 이름을 낸 노먼 린지가 그린 삽화가 많이 들었 있으며, 편집도 널널해서 후딱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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