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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복
하인리히 만 지음, 남기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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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만은 1871년에 독일 북부 뤼베크 자유시의 곡물상인이자 시의원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브라질에서 온 마리아 루이사 다 실바 사이의 다섯 아이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독일 혈통이 반, 포르투갈과 원주민 혈통이 각각 반의 반이었다. 맏이 하인리히는 엄마 쪽을 탁해 활달하고 감정적이었던 반면에 동생 토마스는 오리지널 독일 성향으로 무뚝뚝하고, 재미없고, 엄격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형제 상봉한 뒤로 토마스의 아들 클라우스 만을 비롯한 토마스의 자식들마저 아버지보다 다감하고 다정한 하인리히를 더 따랐다고 한다. 작품 성향도 완전히 다르다. 192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이야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읽기 위해서 조금의 인내가 필요한 상징과 아이러니, 심리묘사, 서사, 성서를 기본으로 한 작품을 주로 쓴 반면에, 내가 읽은 하인리히는 (<충복>을 포함해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과 <앙리 4세> 이렇게 세 작품밖에 안 되지만) 기성의 권력에 대한 비판을 해학 섞인 풍자로 엮어낸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형제들이 다 늦게 화해할 때까지 우애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만 형제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첫 발자국을 이 소설 <충복 Der Untertan>이 찍는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쓴 <충복>은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치하의 좌익 진영으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환호를 받는다. 작품 속에서 하인리히 만은 빌헬름 2세 치세의 민족주의와 황제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말로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면서 고용주 (쁘티)부르주아로 살고 있는 변질된 자유주의한테도 서슴없이 손가락질을 날린다. 따라서 책 좀 읽겠다 마음먹은 독자들에게 큰 장벽으로 등장하는 <마의 산>에서 완쾌되지 않은 7년의 요양소 생활을 뿌리치고 1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달려가는 ‘우리의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에서 보듯, 초기에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입장에 섰던 토마스와 뜻을 같이 할 수 없었을 터이다. 훗날 토마스는 자기 친형이 쓴 <충복>을 “국가적 중상모략”이니 “무자비하고 무자비한 유미주의” 작품이니 하고 내놓고 반대의견의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니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형제간 싸움박질 하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지 않게 해야지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냐는 말이지.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 상봉했을 때, 둘 다 반전주의자요, 반 나치, 즉 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굳어졌고, 그래서 화해할 수 있었으니.
하인리히(왼쪽)과 토마스 만
충복忠僕. 주인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내 종. 사전적 의미는 이렇지만 풍자적으로 쓰면 충복보다 충견忠犬, 주인을 진심으로 따르는 개와 비슷하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하인리히 만이 제시한 충복의 전형은 네드치히 시의 제지공장 사장 헤슬링 씨의 맏이이자 외아들인 디데리히. 아버지 헤슬링 씨는 오래된 제지공장에서 수공예지를 만드는 공원 생활을 오래 하다가, 마지막 전쟁으로 불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몸에 포탄 파편이 박힌 상태에서 돌아와, 이제는 늙어 공장 운영을 지속하기 힘든 사장으로부터 제지 기계를 구입해 창업을 했다. 아무리 19세기였다 해도 적수공권에서 시작해 가업을 이루어 유지하기 위해서 치밀한 사업가로 변모해야 했고, 만사가 불여튼튼, 매사 엄격하고 신중한 몸가짐을 일상화해야 했는데 이는 아내와 아들과 두 딸로 이루어진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특히 아들을 훈육하기 위한 최선, 최고의 방법은 회초리였다. 헤슬링 사장 역시 사소한 잘못이라도 외아들 디데리히의 엉덩이에 가차없이 회초리를 날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이한테 제일 무서운 존재로 등극해버렸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이는 공상을 좋아하고, 겁이 많고, 귓병을 자주 앓았다.
엄마 헤슬링 부인은?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자주 회초리를 휘두르는 것을 보고, 음, 아빠가 저리 아이를 훈육하는데 엄마가 가만히 있으면 남들이 나더러 물러 빠진 엄마라고 할 지도 모르지, 분명이 이렇게 생각해, 타당한 일 없이 고의적으로 디데리히를 매질하기에 이르렀다. 디데리히 입장에서 아빠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때리는데 엄마는 심심풀이 하기 위해 때리는 것 같아, 엄마에 대한 존경심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별로 생각이 없는 엄마. 심지어 나중에 디데리히가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닐 때, 아버지가 늙어 숟가락 놓아 장례를 치르러 아들이 오자, 엄마는 아버지가 외아들한테 이런 걸 희망했다고 없는 일을 지어낼 정도다.
“나는 아들 디데리히를 통해서 영생할 것이고, 디데리히는 아버지(사실 주장하는 바는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들이 척 들어보니 거짓말이다. 아버지는 엄마처럼 병적으로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거든. 어떤 집안인지 감이 딱 잡힌다. 이런 부모에게 배운 것이 있어서 디데리히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여동생들에게 권력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받아쓰기를 시키고, 일부러 어려운 문제만 내서 동생들을 매우 잔인하게 처벌해놓고, 시간이 가면 눈물을 짜던 동생들한테 마음이 좋지 않아 용서를 빌고는 했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약하다니까. 근데 마음도 상대를 봐 가며 약해지는 모양이다.
김나지움 4학년 시절에 학급에 딱 한 명 있던 유대인 급우 앞에 십자가를 턱 내려놓고, 이 앞에 무릎을 꿇으라 요구했다. 유대인 아이가 십자가 앞에서 조아릴 수는 없는 법, 아이는 완강하게 거절했고, 그러자 자신을 둘러싸고 행악을 방관하는 급우들 다중의 힘을 믿어 유대 아이를 줘 패는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디데리히한테 박수와 지지를 보냈다. 아직 1차 세계대전도 터지기 한참 전인데도 그랬다. 하여간 디데리히는 이 일을 네트치히 시의 기독교인 전체를 대표한 일이라 조잘댔고, 학급에서의 권력이 무한상승 했으며, 유대인 징벌의 책임과 죄의식을 집단이 공유하니 마음도 편해진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당연히 교사들도 이 일을 방관하기만 했다. 당시에 전 유럽이 비슷했다. 이후 디데리히는 새로 전임해 온 담임의 총애를 받아, 명예를 감안해 학급 반장과 비밀 감시자를 겸임했으니, 권력의 맛을 제대로 본 것. 그리고 교사와 교장이라는 학교 내 ‘권력’과 가까워야 한다는 진리를 배운 계기였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베를린대학에 입학한다. 당연히 연애사도 있지만 디데리히의 저급한 인간성이 두드러질 뿐 별것 없으니 연애사는 그냥 넘어가자. 그래도 19세기에 처녀 신세 조져놓고 가세가 기울자 트집을 잡아 아가씨의 아버지한테 모욕을 주어 관계를 끊어버리면 나쁜 인간 맞지? 같은 동네에서 약국 약사를 지망했던 1년 후배 호르눙이 입학하자 “노이토이토니아”라는 클럽에 들어간다. 당연히 처음부터 흔쾌히 들어간 건 아니다. 몇 달간 간을 보다가 앞뒤 사정 보고 들어간 건데, 남자다운 씩씩한 기상과 이상주의를 배우는 걸 목표로 하고, 정식 회원이 되려면 결투를 해야 했다. 진짜 펜싱 칼을 들고. 경기용은 날이 없고 뾰족한 첨단 끝을 동그랗게 만들어 다치지 않게 했지만, 진짜 칼엔 그런 안전장치가 없다. 이때 비벨이라는 이름의, 법학을 전공한다는 것만 가지고 디데리히한테 절대적 존경을 받는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선배가 있어서 기꺼이 결투에 응해주는데, 이때 디데리히는 평생 영광스러운 훈장으로 써먹게 될 뺨에 길게 꿰맨 흉터를 갖게 된다. 이게 당대 독일 대학생한테 큰 유행이었다. 남자를 더 남자답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성형술이라 보면 된다. 게다가 머리에도 상처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으니 운동을 하지 않아 퉁퉁한 비만 스타일의 디데리히한테는 얼마나 좋은 액세서리였는지!
그러나 대학 졸업과 동시에 1년 동안 군대 복무를 해야 했다. 군의관이 디데리히를 척 보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는 조만간 네 배 속에 가득 든 기름 덩어리를 제거할 것이다.” 하여간 입대를 해 신병 훈련소에 가서도 이리저리 뺀질거리다가 네트치히 살 때 어린 시절의 주치의 오이토이펠 원장한테 편지를 보내 자기한테 갑상선종과 구루병 증세가 있다고 증명서를 만들어 보내줄 수 있느냐고 편지를 보낸다. 의사 오이토이펠 선생은 우리 주인공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으며, 훗날 디데리히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자유주의자 당원이자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의 신분으로, 민족주의당 디데리히 헤슬링과는 철천지원수로 만나게 된다. 디데리히는 도저히 군대, 특히 훈련소의 격한 훈련을 견딜 수 없어 노이토이토니아 클럽 회원의 권력층 아버지한테 부탁해 거의 모든 훈련에서 열외 조치를 받고, 그것도 모자라 조기 제대를 한다. 그래도 권력이 좋기는 좋다. 나중에 네트치히 시의 재향군인회 간부까지 되는 걸 보면.
이제 대학도 졸업하고, 아버지도 세상 뜨고, 병역도 마쳤으며, 학위도 따 화학 박사가 되어 금의환향, 네트치히 시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민족주의자당의 실세로 등극한다. 당연히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하게. 처음엔 아버지가 남긴 작은 제지공장의 사장으로 시작한다. 황제를 위한 황제에 의한 황제의 나라를 꿈꾸며 전 세계를 지배할 독일 제국의 영광을 위해 봉사할 마음이지만, 처음부터 잘 나가는 건 아니다. 젊은 디데리히 헤슬링 사장은 작은 네트치히 시에서도 권력 있는 자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치사한 일을 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한다. 이런 것을 전부 다 하인리히 만 특유의 골계와 풍자 속에서 진행한다. 본문만 759페이지로 작은 분량이 아니다. 그걸 거의 다 이렇게 가공한 블랙 유머로 채우면 독자는? 그렇다. 멀미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마지막 결말이 재미있다. 당연히 어떤 장면인지 안 알려드린다. 세상의 찌질한 남자 디데리히 헤슬링의 출세길을 따라가 보시라. 32,800원. 책값이 비싸서 행여 취향에 맞지 않으면 낭패일 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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