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고 해밀턴
더글러스 스튜어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76년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출생해 스물네 살 때 뉴욕으로 건너가 패션 디자인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단다.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 잭 스페이드 같은 곳에서 20년 넘게 일했다니 틀린 말은 아니다. 수석 디자이너면 뭐해, 열두 시간 교대근무 하는 데. 스튜어트가 대단한 게, 맞교대 하면서 무슨 시간이 났는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썼으니 소설가로도 이름을 높이게 만든 <셔기 베인>이란다. 이게 영국과 미국의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지만 (32곳의 미국 출판사, 영국 출판사 12군데) 하여튼 결국 미국의 독립 출판사가 책으로 만들어 시장에 나왔고, 2020년에 덜컥 부커상을 받는 바람에 이제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부커상이 그렇다. 무명이었다가 한 방에 스타로 뛸 수 있게 만드는 권위.

  우리나라에서도 <셔기 베인>이 센세이셔널했지 아마? 그래서 한 김 빠지길 기다렸다가 읽겠다고 마음먹었었다가, 날이 가면서 그만 잊고 지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3년 가까이 지났다. 그러다가 인터넷 책방 알라딘의 AI가 나를 위해 이 <먼고 해밀턴>을 추천했다. 나는 무릎을 치며, 아, 이 작가가 <셔기 베인>을 쓴 이지? 기억이 나서 얼른 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한 달을 기다렸다가 읽었고, 모두 5백 페이지 분량인데, 270페이지까지 읽은 다음, 도무지 읽어주지 못해 그냥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만일 2001년 말에 <셔기 베인>을 읽었다면 분명히 내 돈 내 산이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다, 이 책의 독자평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 나 말고 감격에 겨워 읽는 독자가 있을 것일 터, 위안을 삼자, 뭐 이 정도 선에서 마감을 하고, 도서관 “내 서재”의 “관심도서” 목록에서 얼른 <셔기 베인>마저 지워버렸다.


  먼고 해밀턴. 원래 책 제목은 <젊은 먼고> 또는 <어린 먼고>다. 열다섯 살이긴 하지만 애가 좀 늦게 되는 아이라 여전히 어린 아이 수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3. 당연히 알 거 다 알고, 어차피 이왕 해볼 거 할 준비가 완료된 ‘일상 거총’ 상태의 탱탱한 사춘기 소년 생각하지 마시라. 주워듣기로 <셔기 베인>에서도 주인공 셔기가 열다섯 살 난 늦된 아이로 알고 있으며, 그 작품처럼 <먼고 해밀턴> 속에도 자전적 이야기가 적지 않게 들어있다고 하니 스튜어트도 좀 그랬지 않나 싶다.

  거의 모든 포유류가 그렇지만 특히 어린 인간종에게는 끔찍할 만큼 슬픈 본능이 있다. 부모, 특히 어미가 아무리 새끼에게 모질어도 새끼는 어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본성. 스스로 먹고 살 능력이 없는 새끼 시절에 생존을 위해 이런 본성이 특화해 진화했을 것이다. 이러다가 대가리가 커져 자기 혼자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오해하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힘이 세지 않은 엄마한테 박박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기성세대는 이걸 ‘제2의 탄생’이라 주접 떨며 아무쪼록 여드름이 돋기 시작하는 자식 새끼가 큰 탈 없이 사춘기 시절을 지나기 바라는 거고. 근데 그것 마저 지나 이제 성인이 되면 전세 역전이다. 그러니 사춘기 자식을 둔 부모들이여, 미리미리 자식새끼한테 잘 하시라. 나중에 후회 말고.

  우리의 먼고는 그러나 이 시기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엄마 모모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엄마 이름이 모모다. 몸에 털이 많아 모모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모모다.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자기 아이들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것. 그렇게 부르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듣는 거다. 원래 이름은 모린. 지금은 대외적으로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인 AA 클럽에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참석해서 “월목 모린”이라 불린다. 실제로는 책에서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열다섯 살 때 지금은 ‘빅 하하’라고 부르기로 한 해밀턴 군을 만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그래서 임신과 출산을 해서 맏이 하미시, 대외적인 호칭으로 ‘하하’를 낳았고, 이어서 줄줄이 둘째 조디와 막내 먼고를 출산했으니 이 때가 열여덟 살이었다. 동네 논두렁 건달 가운데 대빵이었던 빅 하하는 어울리지 않게 패싸움에 가담을 했다가 칼을 맞아 드런 세상 겨우 스무 해를 살고 숟가락 놨다. 이후 모모는 술에 빠지기 시작해 곧장 깊은 알코올 의존증으로 접어들었다. 술만 취했다 하면, 혹은 몸에서 혈중 알코올 농도가 기대치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많은 의존자들이 그러하듯이 전혀 다른 인격체로 돌변해 집구석에 뭐 제대로 남아남는 것이 없었다. 그럴 때면 어린 조디는 동생 먼고를 데리고 모모가 찾을 수 없는 어두운 공간으로 숨어, 지금 엄마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건 엄마 모모가 아니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인간 ‘태티 보글’이라고, 이렇게 달래면서 열여섯 살이 되었다. 이젠 모모도 함부로 자식들 앞에서 테티 보글로 변신할 수 없다. 힘이 달리니까. 완력도 달리니까. 까불면 오히려 제압당하니까. 그러게 내가 뭐랬어, 잘 하라고 했잖아.

  맏이 하미시는 벌써 열여덟 살. 아빠 빅 하하의 대를 이어 글래스고 빈민가이자 개신교 구역 논두렁 건달의 왕초 자리를 꿰찼다.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완력으로 무지르고 그게 괴롭힘으로 나타나고, 특히 늦된 먼고를 남성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거칠게 “키우려고” 나름대로 열심이다. 열여덟짜리 형이 열다섯 살짜리 동생을 키운다고 고생이 자심하겠지? 읽어보시라. 그것도 고생일 듯하다.


  엄마 모모는 자식들한테 관심이 없다. 혹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아이 셋 달린 홀아비 조키와 열애중이다. 자기 생각엔 서로 죽기 살기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독자가 보기엔 조키 생각으로는 그저 섹스 파트너 아닐까 싶다. 집에 불러 며칠 살다가 싫증나면 쫓아버리고, 며칠 지나 또 아래가 궁금해지면 전화 찍 해서 불러올 수 있는 여자. 문제는 모모가 조키와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는 거. 처음에 말했듯이 내가 책을 다 읽은 게 아니라 단정하지는 못하지 믿지도 마시라. 그리하여 모모는 조키의 집에서 살다가 쫓겨나야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제정신일 수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엄마는 엄마. 모모 역시 맏아들 하미시처럼 먼고가 사내답지 못하다는 것이 고민이다. 그래서 같이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다니는 두 남자, 문신이 촘촘한 젊은 갤러게이트와 쉰 살 이상으로 보이는 세인트 크리스토퍼에게 먼고를 남자답게 대해달라고 함께 2박 3일의 낚시 여행을 떠나게 한다. 이래서 대한민국 천안시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북위 55도 51분에 위치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도 북쪽으로 아무리 5월(6월인가?)이라도 반바지에 점퍼 하나 입혀서 캠핑을 떠난다.

  두 명은 같은 알코올 중독자 모임인 AA 클럽 회원이면서, 발리니 교도소 감방 동기이며, 여전히 하루 종일 맥주와 위스키, 기타 에틸 알코올을 흡수할 수 있는 모든 액체를 섭취하기에 조금의 게으름이 없다. 그리고 치명적으로 둘 다 양성애자이다.

  먼고는 엄마의 무관심과 엄마를 간절하게 원해서 곱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조금의 불편한 상황에 처하기만 해도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일종의 틱 증상을 보인다. 자신도 그것을 알아 얼굴을 긁어대 잘 생긴 모습이기는 하지만 흉터가 많다. 선한 누나 조디 역시 틱 증상이 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히히익, 하며 엽기적으로 웃어버리는 것. 이외에도 아빠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지 유독 나이 많은 남자한테 끌려, 학교 선생과 밀회 끝에 임신하는 바람에, 선생은 교장한테 전화 한 통으로 사표를 가름한 채 도망쳐버리고, 아랫집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중절수술을 받는다.

  이 정도면 내가 도무지 더 이상 읽어주지 못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 듯하다. 더글러스 스튜어트는 이 참담한 광경, 특히 먼고한테 벌어지는 참혹한 장면을 발갛게 묘사해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불과 몇 달 만에 다시는 읽고 싶지 않았던 베스트 셀러 <리틀 라이프>를 다른 버전으로 읽는 일이 생겼던 거다. <셔기 베인>도, <먼고 해밀턴>도 그리고 <리틀 라이프>는 말할 것도 없이 독자 평이 좋다. 굳이 내 독후감을 믿을 필요 없다. 단지 나는 이런 스타일의 작품하고 도무지 맞지 않을 뿐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