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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코츠키의 경우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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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츠카야 깨나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세 보니 이 책이 다섯 번째다. 소비에트 철의 장막이 걷히기를 기다려 작품활동을 시작했던 구 소련의 40년대생 여성 작가들. 이 가운데 한 명. 내 머리 속에는 이렇게 특정한 부류의 주목할 만한 작가군이 있다. 대체로 이 작가들의 책이라면 눈에 띄는 대로 찾아 읽는다. 울리츠카야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거주지를 베를린으로 옮겨버렸다. 이이는 카자흐스탄 북쪽을 면한 바시키르 자치 공화국에서 출생한 유대인 혈통이다. 2차 세계대전을 피해 그곳으로 피난한 가정에서 출생해, 전쟁이 끝나자마자 모스크바로 돌아가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이런 내력이 주인공 파벨 알렉세예비치 쿠코츠키의 수양딸 토마를 성인이 되어 생물학 연구소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생물학박사로 설정하는 데 보탬이 됐을 것이다. 울리츠카야는, 젊은 시절에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권고하면서 수시로 도청과 감시, 밀고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모국어라고 생각하는 러시아어를 떠날 수 없어 끝까지 소비에트에 남아 견뎌낸 인물이다. 그러니 소비에트 해체 전까지 작품을 발표할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 속으로 얼마나 애가 탔을까? 창작은 하되 그것을 내보이지 못하는 심정 말이지.
<쿠코츠키의 경우>는 진짜 빼박 쿠코츠키 가문의 마지막 후예인 파벨 알렉세예비치 쿠코츠키와 그의 아내 엘레나, 엘레나가 데리고 들어온 딸 타냐, 그리고 타냐의 딸 줴냐한테 각 1부부터 4부까지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주인공은 파벨로, 상당히 짧은 분량의 4부를 시작하는 시점에는 이미 고인이 된 후다. 쿠코츠키 가문의 내력을 보자. 이렇게 시작하니까 쿠코츠키 가문이 러시아 역사에 정말 나오는 거 같지? 아니다. 허구일 확률이 백퍼센트다.
하여간 소설에서 말하기를, 러시아 역사상 가장 먼저 등장하는 쿠코츠키는, 1698년 표트르 대제가 해부학 교수 류이쉬에게 약제사의 아들 아브데이 쿠코츠키를 제자로 받으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처음이라 했다. 전해오기를 아브데이의 조부/부친은 표트르 대제 시절 모스크바 교외의 외국인 거주지인 쿠쿠이 지방에 살았다고 하고, 거의 틀림없이 당시 러시아의 유명한 의사들이 거의 대부분 독일 출신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이민 온 의사/약사 집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말부터 파벨 쿠코츠키의 부계 조상들은 대대로 의사를 직업으로 삼아왔다.
파벨의 아버지 알렉세이 가브릴로비치는 전시외과, 즉 군military 의학 의사이자 교수였으며, 러일전쟁 후에 새로운 군 의학의 필요성을 수뇌부에 건의했지만 관료주의의 벽을 뚫지 못해 끝내 개선하지 못한 상태에서 1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이때 화물기차를 이동식 야전병원으로 만들어 우크라이나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지만, 1917년 포병부대의 폭격으로 이동병원, 환자, 간호사들과 함께 폭사하고 만다. 가정에서는 훗날 아들 파벨이 유소년기를 전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할 만큼 다감한 아버지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파벨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인체 해부도를 탐독하는 것이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을 보며 겨우 열 살짜리 소년이 “죽음은 겉으로 살아있는 육신에 덮여 언제나 인간의 몸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궁리하기도 했다. 이런 파벨을 알아본 아버지는 19세기 말 이탈리아 투린에서 사바쉬코프에 의해 출판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목록 A>를 사주기도 하고, 청동으로 만든 50배율 작은 현미경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잠깐 걱정하기를, “파벨이 머리가 너무 비상해 의사가 안 되면 어쩌지? 학자가 될 지도 모르겠어.” 진짜 비상한 두뇌를 가진 이과 학생들은 의사 말고 의과학을 포함한 과학에 종사하는 학자가 되야 맞는 거 아냐? 에휴, 모르겠다. 어찌 됐던 사는 건 부르주아로 사는 게 편하고, 편한 게 좋은 거니까 똑똑한 너희들 맘대로 살아라. 근데 공부하기 힘들잖아. 그러니 의사가 되는 것보다 의사의 배우자가 되는 건 어떻겠어?
파벨은 아버지가 전사한 1917년에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을 했지만 곧바로 혁명을 만나 아버지가 황제의 근위병 대령으로 근무했다는 출신성분 문제로 1918년에 퇴학을 당한다. 그러나 1919년에 아버지의 친구이자 산파학과 산부인과 전공 칼린체프 교수의 청원으로 복학해 모든 열정을 공부에 쏟는다. 공산 소비에트는 1920년에 쿠코츠키 저택을 국가재산으로 귀속시키고 그들 집에 세 가구를 입주해 파벨 모자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살아야 했다. 바로 다음 해인 1921년에 어머니 에바 카지미로브나는 하급관리 출신인 젊은 남자와 재혼을 하는 바람에 파벨이 집을 나왔고, 어머니가 또 아들을 출산한 이후로 모자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변해버렸다. 당연히 어머니는 이렇게 딱 한 번 출연한 이후 작품에서 사라진다.
혈액순환계와 신경계 말단영역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던 혈관, 발생학 학자이자 의사인 젊은 파벨은, 의학과 관련이 없는 당원이 책임자로 부임한 후, 쿠코츠키 가문의 명성을 감안해 학과장으로 임명됐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발생학이면 산부인과에 가깝다. 임신 5개월차 임산부를 관찰하던 중 전이된 화려한 암을 발견한 파벨은 이후 자신에게 “내면투시능력” 특히 악성 종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능력은, 러시아 문학 특유의 신비적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과식을 하거나 섹스 후에는 이 능력이 발현되지 않거나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알고 난 후 개인적인 삶이 조금 더 건조해지고 이성과의 교제도 멀리했다. 미남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젊은 남자가 이런 삶을 산다는 게 여자 동료들 입장에서는 남자로서 결정적 결함이 있다고 쑥덕거릴 좋은 이야기거리가 될 수밖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모스크바에 있던 병원은 시베리아의 작은 B시로 이전한다. 시베리아, 하니까 저 북국의 툰드라 생각하시지? 아니다.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시베리아, 하면 우랄산맥 근처 중앙아시아 지역을 말한다. 작가 울리츠카야가 태어난 곳도 이 시베리아 지역이다. 이곳에서 파벨은 유행가 가사 같은 운명적인 여자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한다. 엘레나 게오르기예브나.
1942년 11월, 병원의 부원장 발렌티나 이바노브나는 상당히 심각한 상태의 엘레나를 수술대 위에 눕히고 복강을 완전히 개방했다.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수술 솜씨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인 파벨을 불러 수술 참관을 시켰다. 파벨의 눈에 완전히 드러난 엘레나의 장기가 오래 전부터 보아온 것처럼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파벨의 내면투시능력이 발현되기 시작해, 맹장이 완전히 파열됐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으며, 고관절이 매우 연약해서 거의 부전탈구 형태로 앞으로 출산하면 위험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지만 출산 경험이 있는 자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아차렸다. 뿐만 아니라 맹장에서 흐른 고름이 장기를 침범해 자궁도 적출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부원장 발렌티나도 당연히 그의 조언에 따라 맹장과 자궁을 적출했고, 수술이 끝나서도 파벨은 두 번이나 군용 페니실린을 훔쳐 엘레나에게 주사를 놔주는 등 특별하게 돌보았다.
엘레나는 B시의 변두리 방 한 칸짜리 낡은 오두막집에서 딸 타냐와 가정부 바실리사와 함께 살고 있었다. 파벨은 이 가족을 자신이 살고 있는 병원의 정원에 있는 별관에 데리고 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아직 유부녀였다. 남편 안톤은 전쟁에 참전했지만 서로 편지 왕래도 없었다. 전쟁 전에도 부부는 본격적인 권태기에 접어들어 무미건조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어쨌든 한 집에 살게 된 파벨과 엘레나는 한 달이 지나고 군사우편 한 통을 받았으니, 안톤 이바노비치의 전사통지서. 통지서에 써 있는 내용에 따르면, 파벨과 엘레나가 처음으로 한 침대에 오른 날, 안톤이 전사했다는 거였다. 잠깐의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지나간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인지라, 이들은 곧 결혼을 했고, 타냐는 양녀로 입양을 했으니 이때 파벨은 43세, 엘레나가 28세. 타냐는 두 살. 파벨이 엘레나와 동침을 했지만 그의 내면투시능력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니, 엘레나는 가히 하늘이 파벨에게 점지해준 짝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시겠지? 엘레나는 자궁이 없는 여인. 파벨에게 쿠코츠키 가문의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운명이고, 능력이 비상한 사람은 특히 말조심을 하지 않는 경우가 소설작품에서 왕왕 있으니, 이들 부부에겐 시작부터 시한폭탄을 안고 있었던 거다. 당연히 언젠가는 터지겠지. 그래도 타냐는 무럭무럭 자라고, 사랑을 하고, 또 아이를 낳아 줴냐를 낳겠지. 줴냐도 역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세월이 가며 앞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라지겠지.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이렇게 사는 이야기.
내가 읽기에는 2부가 힘들었다. 3부로 접어들면 왜 2부 읽기가 힘들었는지 한 순간에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2부를 다시 읽을 수는 없었다. 한 가족의 사는 이야기를 고전적 의미에서 대하소설이라고 한다면 정확하게 대하소설이다. 재미있다. 하지만 권하지 않겠다. 본문만 739쪽에 이르는 분량이 독자에 따라 부담스러울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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