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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행복한 이야기들 ㅣ 알마 인코그니타
노먼 에릭슨 파사리부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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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에릭슨 파사리부는 1990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북부 수마트라 섬의 바탁 종족 가운데 가장 큰 토바 바탁 족이며, 커밍 아웃 한 게이다. STAN 국립 재무 대학을 졸업하고 재무 학사 학위를 땄으며, 이 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국가 재무직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거 같은데, 싹 포기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금 명함은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하는 시인, 작가, 역자, 편집자. 시집도 내고 작품집도 내고 그랬다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내게 된 계기는 <대체로 행복한 이야기들>이 2022년에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 최종 심사까지 올라가 미역국을 먹은 일이었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2023년부터 올해까지 하버드 대학 아시아 센터 상주 작가로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만큼 <대체로 행복한 이야기들>이 유명한 작품이라 이건데, 아오, 난 책의 첫 문장부터 지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의 별자리가 물고기 자리라면, 그건 당신이 게이라는 뜻이다.”
하필이면 내 별자리가 물고기 자리인데, 거의 완벽하게 섹스라이프가 끝난 이 시점까지 단 한 번도 게이라고, 하다못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게이 성향을 발견해본 적이 없다. 에잇! 당연히 나는 성소수자의 모든 것은 인정한다. 한 번도 내가 “그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솔직할 지 모른다. 전제는: 나를 유혹하려 하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인용 문장은 파사리부가 아니라 에이미 와인하우스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한다. 에이미 와인하우스 Amy Jade Winehouse는 영국의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로 27세 때인 2011년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었다. 그러니 내가 참자.
근데 지금 내가 쓴 위 문단을 다시 읽어보면, 특히 감탄사 “에잇!”이라든지, “그러니 내가 참자.”라는 말이 암만해도 목에 걸린 잔가시처럼 까슬까슬하다. 문단 속에 벽이 있다. 나는 세상에 “정상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난 정상인이 아니라 이성애자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성애자 그룹에서 이탈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누가 나를 다른 그룹으로 잘못 보는 것도 싫다는 뜻이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다. 이것도 차별일까? 차별일 것도 같다.
서부 자바 교외의 주택단지에 살던 시절에 헌책방을 하던 이모부 덕택에 곱슬머리 김수정의 작품 <아기공룡 둘리>에 흠뻑 빠져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파사리부. 그가 한국 독자들에게 쓰는 소개글을 달았고, 이어서 시인 문보영과 소설가이자 역자로 활약하는 안톤 허의 추천글이 두 꼭지 나온 다음에 이야기를 시작한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 책은 인도네시아에서 게이로 사는 일에 관한 작품이다. 아니, 작품의 모든 이야기가 다 그렇지는 않으니, 그냥 좌절과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자.
열두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읽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안톤 허가 추천의 글에서 말했듯이 시인이, 그것도 현대시인이 쓴 소설이라 그런지 결코 읽기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짧거나, 길지 않은 이야기를 서로 연결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말짱 다른 이야기로 읽기도 께름칙한 기분, 이해하시겠지?
마마 산드라 이야기. 산드라의 외아들이 죽었다. 마마 산드라는 1992년에 포대기에 갓난 아이를 넣고 홀로 자카르타 동쪽 베카시로 이사를 왔다. 이후 줄곧 혼자 아들 바이슨을 키웠다. 낮에 나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해서 이웃인 마마 앤턴, 앤턴의 엄마가 바이슨을 돌보아, 마마 앤턴이 산드라 모자에 대한 정情도 대단했다. 마마 앤턴은 산드라와 수마트라 북부 하리안보호 고향 친구다. 그래서 더 친해질 수 있었겠지. 산드라의 아들 바이슨은 총명한 소년으로 자랐고, 학교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아 자카르타의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함께 유소년 시절을 지낸 앤턴은 지역의 괜찮은 대학에 가고. 신기하지, 바이슨과 앤턴 둘 다 게이였다. 앤턴 집안에서는 할아버지가 손자 어렸을 적부터 눈치채고 아예 처음부터 그런 성향을 인정해 대학 다니면서 숱한 게이들과 어울렸고, 졸업 후에 네덜란드로 날아가 동성 결혼까지 했다. 근데 이게 맞는 말이 아닐 수 있다. 뒤에 나오는 에피소드와 연결할 수 있다는 전제면 그렇다는 말이다. 반면에 바이슨은 어머니한테, 대학 2년 선배인 솔로 지역 출신 청년 세티아와 지난 석 달 동안 데이트를 했다고 커밍아웃을 하니까 산드라가 하염없이 절망하는지라 그걸 보고 자기도 견디지 못해 약을 먹고 자살해버린 거다. 바이슨. 남자답고 강하게 들려 산드라가 붙여준 이름이건만, 바이슨은 북미 들소의 한 종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야생에 대해 배우다가 이를 알게 된 바이슨이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집에 왔고, 이때부터 아이들은 바이슨한테 “바탁의 사생아 바이슨”이라 놀리기 시작했다. 바탁은 작가 파사리부의 부족이라는 거 기억하시지?
바이슨이 죽고나서 산드라는 아들이 늘 먹던 진통제 파나돌을 습관적으로 복용하기 시작했다. 두통이 심해져서. 넉 달 뒤, 산드라는 베트남 꽝남 지역의 마이선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들 바이슨Bison을 평소에 그냥 선Son이라고 불렀는데, 우연히 베트남에 ‘마이선”이라는 관광지가 있다는 걸 알고 당장 결심을 해버렸다. 마침 시청에 근무하는 조카가 있어서 얼른 여권을 만들고, 조카가 만들어준 열 몇 장의 안내 메모를 주머니에 넣고, 평소 바이슨이 쓰던 캐리어에 옷과 신발과 파나돌과 하여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다 집어넣고, 그걸 끌면서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탄다. 말레이시아를 거쳐 하노이에서 내려, 조카가 알려준 대로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가의 저렴하지만 꺠끗한 호텔에 짐을 풀고 첫날은 지쳐 잠이 들었다. 이튿날은 호수가 벤치에 앉아 바이슨을 생각하며 울고, 울고, 울었다. 근처 산 위의 절에 무지하게 큰 거북의 박제가 있다고 해서 구경갔다가 거북을 보고 또 바이슨이 생각나 울고, 울고, 울고불고, 엉엉 울다가 내려왔다. 나흘째 호이안으로 가는 기차를 놓쳤지만 그냥 호텔에 체크아웃을 해버렸다. 호엔끼엠 호수가 벤치에 앉았더니 또 눈물이 난다. 정신을 차려 호이안의 마이선에 대해 베트남 사람에게 물었다. 베트남인을 모른단다. 그래 ‘마이선My Son’을 다시 묻고, 다시 묻고 또다시 물으니, 베트남에서는 그 지역을 ‘마이선’이 아니라 ‘미이센’이라 한단다. 산드라는 미이센이라는 지명을 듣자마자 그곳으로 갈 이유가 사라졌음을 안다. 산드라는 대신 다시 한번 산 위의 사원에 올라 진열창 안의 거북을 가리키면서 “This is my son. This is my son. This is my son, you know?” 묻는다. 산드라의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러내린다.
은퇴한 수녀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평생을 순결, 순종, 청빈하게 살다가 은퇴한 늙은 수녀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비슷한 처지의 수녀들만 기거하는 수녀원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여태 해 온대로 청빈하고 순결하게 기도하며 종교와 수녀원의 계율에 순종한다. 대신, 하고 싶지 않은 노동은 감해준다. 이건 사제도 마찬가지다. 은퇴 신부들도 그들만 모인 수도원 또는 안식처에서 비슷한 생활을 하며 삶의 마감을 기다린다. 아무리 추기경, 주교를 수십 년 했어도 마찬가지다. 드디어 천국의 기쁨을 찾아 가더라도 여태 영혼을 담았던 몸에는 작고 볼품없는 묘지만 주어질 뿐이다.
그러나 툴라 수녀는 얘기가 다르다. 은퇴 수녀들이 모인 수녀원에서 툴라는 가방에 사복을 담은 채 무단 외출을 해, 버스를 타고 30킬로미터를 가, 터미널 화장실에서 사복으로 갈아 입은 후, 시내를 돌아다니다 들어온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잃은 아이 서배스천을 발견하고, 아버지를 찾아준다. 수녀원으로 돌아온 툴라를 기다리는 건 원장수녀. 이제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근데 그게 되나? 툴라는 며칠 후 다시 무단 외출을 감행해 서베스천과 아빠 요하네스가 사는 집에 들르게 되고, 몇 번 그러다 보니까, 서베스천한테 심장병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뭐 이런 이야기. 재미있다. 그나마.
그래서 이 책이 퀴어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실과 절망, 그리고 고독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던 것. 그럼에도 세상은 대체로 행복한 곳이라는 게 작가 노먼 에릭슨 파사리부의 주장이다. 살아보니까 행복은 생각보다 늦게 온다. 그것도 사람을 골라가면서 온다. 나? 나는 지금 대체로 행복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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