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3
츠쯔졘 지음, 김윤진 옮김 / 들녘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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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츠쯔젠. 작품집 《가장 짧은 낮》을 읽고 불과 두 달 만에 세번째 츠쯔젠으로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을 읽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작가. 《가장 짧은 낮》의 독후감을 쓸 때 벌써 <어얼구나…>가 지금 절판이지만 도서관에 있으니 꼭 읽어보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근데 조금 수정. 2011년에 우리나라 초간된 <어얼구나…>는 아직 팔고 있고, 같은 출판사에서 2018년에 중판으로 낸 책이 절판이다. 난 지금도 팔고 있는 초판을 읽었다.

  전에 읽은 두 권의 츠쯔젠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작가의 고향인 헤이룽성을 무대로 한다. 작가가 북부 다싱안링, 대흥안령 산맥에서 출생했으며, 열일곱 살 때까지 살았다고 하니까 어린 시절엔 그곳의 여러 소수민족과도 알고 지냈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자기 또래의 여자 아이들하고 그 시절 특유의 우정을 위해 팔뚝에 연비를 찍었을 지도. 연비? 연비燃臂가 뭔 줄 아시나? 주로 여자 아이들이, 너하고 나하고 죽을 때까지 우리 우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바늘로 팔뚝에 먹물 점을 찍는 일이다. 원래는 중들이 계를 받으면서 팔뚝에 불을 놓아 뜸을 떠 이를 기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변형된 채 민간으로 유입한 풍습이다.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첫 애인 묘옥이 길산을 기념하기 위하여 뒤편 어깨에 길吉자 문신을 새기며 ‘연비’라고 칭했다.

  츠쯔젠이 마흔한 살이던 2005년에 다싱안링 산맥의 소수부족 가운데 하나인 어원커족을 탐방할 기회가 있어, 이 부족의 최근 백년을 작품에 담은 것이 바로 <어얼구나…>이다. 21세기의 다싱안링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개발되어 있어서 산맥을 관통하는 도로가 생기고, 산림은 벌목을 통해 살뜰하게 파괴되었으며, 따라서 산맥 안의 숱한 동식물은 개체수가 말도 못할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백년 전, 백년 전은커녕 오십년 전만 해도 그곳엔 나무빽빽할 삼森이 어울리는 식물군과 삼森 속의 다양한, 포유류까지 아우르는 원시생명체들이 가득한 생명의 보고였겠지만 전쟁이 끝나고, 혁명과 말로만 혁명(문혁)이었던 시절이 지나 개혁개방의 시대가 도래하자마자 소수민족을 포함한 산맥의 생명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열 받지 마시라. 자본주의가 다 그런 거라고? 아닐 걸?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다.


  다싱안링 산맥의 소수부족, 어원커 족의 백년사라고 했으니, 자신들 만의 언어는 있되 문자가 없는 부족의 역사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지난 시절을 이야기해줄 화자, 백년 가까이 산 사람일 터. 아무래도 유전자 자체가 남자보다 오래 살게 디자인된,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90대에 진입한 할머니가 하루 날 잡아 이야기한 내용이다.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 할머니 ‘나’는 ‘우리 부족’ 마지막 추장의 아내이다.

  잠깐 교통정리. 어원커족은 씨족의 이름이다. 씨족은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씨족을 총괄하는 인물이 있는지,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고, 각각의 부족 지도자를 이 책에서 추장이라 칭한다. “옮긴이의 말”에 어얼구나 시내 북쪽으로 약 30킬로미터 거리에 ‘옹기라트’라는 내몽고 부락이 있어서, 이곳에만 몽고족, 다우르족, 오르죤족, 어원커족, 러스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는데, 이들을 전부 각각의 씨족으로 보면 될 듯하다.

  화자 ‘나’의 어머니(어니)는 다마라, 아버지(아마)는 린커. 언니 례나가 있었다. 당연히 ‘나’ 빼고 다 죽었다. 말이 백년 역사이지, 백년 전 제일 좋은/좋았던 시절에 성인 열명 남짓의 작은 부족의 백년 역사이니 무슨 거창한 정치, 경제가 있겠나. 그저 살아온 이야기일 뿐. 그래도 여러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비슷비슷하지만 전부 다르고, 개성 넘치고,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사랑하면서도 증오해온 한 세기가 어찌 중요하지 않으랴. 이들 부족은 네 가정으로 만들어졌다. 화자의 부모인 다마라-린커, 그리고 마리야-하세, 이푸린-쿤더, 나제스카-이완. 린커의 친형이니까 ‘나’의 큰아버지이자 씨족의 무당인 니두, 하세의 아버지 다시.

  다시는 늑대를 맨손으로 때려 죽이고, 다른 늑대, 다시가 때려 죽인 늑대의 새끼한테 한쪽 다리를 잃은 다음부터 사람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마리야와 하세 부부는 부족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워낙 산골이라 해 떨어지면 할 거라고는 아이 만드는 일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나중에 시아버지 다시가 다시 늑대와 리턴매치를 벌여 복수혈전 끝에 드런 세상 하직한 다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낳기는 했지만, 아들이 커서 장가들 때가 되니 마음씨 좋고 얌전하기만 한 엄마 마리야가 그만 악녀 수준으로 변해버린다.

  ‘나’의 큰아버지 니두와 아버지 린커는 다마라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는데, 암만해도 한 끗발이 약한 린커가 선수를 쳐서 옆 부족이었던 다마라의 아버지를 찾아가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래서 추장 린커가 죽을 때까지 형제는 한 자리에 앉아도 서로 못본 척, 없는 척했다. 처녀시절 다마라가 보기에 니두는 통통하니 복스러워 좋았고 린커는 민첩하고 날래서 좋아, 누가 청혼을 해도 승낙할 생각이었으니 니두도 안타깝게 된 거지 뭐.

  이푸린은 ‘나’의 친고모. 아무리 고모라도 변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못된 여자다. 물론 다 사정이 있다. 완전히 야생지역에 살다보니 어린 시절에 좀 크게 다쳐 코가 비뚤어졌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남편 쿤더 젊은 시절에 다른 부족 예쁜이한테 장가가겠다고 난리를 쳐대다가 어쩔 수 없이 이푸린한테 가게 된 것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이 비슷한 사정 있는 사람이 이푸린 한 명이야?

  이완은 남자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부족의 대장장이로 실력이 뛰어나 씨족의 다른 부족 사람들도 온갖 것을 만들어달라고 몰려올 정도다. 길 가다가 팔려오는 러시아 여성 나제스카한테 한 눈에 반해 그녀를 돈 주고 사서 장가들었다. 나제스카는 당연히 노랑머리. 그리고 러시아 정교를 믿어 시도 때도 없이 십자 성호를 긋는다. 아들 지란터, 딸 나라를 낳아 키우다가 일본이 괴뢰국가 만주를 세우고 쳐들어오자 러시아 사람을 골라 죽인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아들, 딸 데리고 어얼구나 강 왼편, 즉 러시아 땅으로 도망간다. 이완은 떠난 사람이 돌아오겠느냐는 신조로 결코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군용 셰퍼드 정도는 꼬리를 들고 뱅뱅 돌려 단박에 제압하는 완력의 소유자. 이런 사람은 끝이 안 좋지? 근데 이 양반 정도면 문화혁명 지난 사람 가운데는 괜찮은 편이지 싶다.


  이 부족은 곰을 숭배한다. 재미있는 것이 곰을 사냥해서 곰 고기를 먹을 때, 곰의 눈알을 파서 나무가지에 올려놓고 먼저 혼을 떠나 보낸다. ‘나’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 린커가 검은 곰을 한 마리 사냥했다. 사냥을 하면 야영지 가운데 불을 피우고 부족원 전부가 모여 고기를 굽고, 삶아 먹었는데 먹기 전에 까마귀처럼 ‘까악까악’ 한동안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래야 곰의 영혼이 지금 곰고기를 먹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까마귀라고 알 터이니.

  부족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순록이다. 이들은 순록을 방목하고, 순록이 먹이를 찾으러 가는 길을 따라 이동하며 우리렁烏力楞이라는 텐트에서 산다. 우리렁은 나무 골조를 세우고 순록 가죽을 둘러 만들고 이때 천장이 뚫린 상태로 두어 우리렁 안에서 피운 불의 연기도 빠지고, 음식 냄새도 빠지게 한다. 당연히 잠을 자면서도 하늘의 별과 달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도시, 이들 눈에 도시지 우리 눈엔 두메산골 마을에 사각형으로 지은 지붕 있는 집은 무슨 상자 혹은 감옥 같아서 도저히 인간이 살 곳이 아니라고 여긴다.

  순록 말고 식량으로도 쓰고, 곡식, 성냥, 총알, 옷감과 교환할 목적으로 사냥을 한다. 주로 친칠라라고 번역한 토끼 또는 설치류, 사슴, 사슴도 사슴 나름인데 말코손바닥사슴부터 시작해 각종 사슴을 망라하고, 담비, 족제비, 스라소니, 살쾡이 등등 가림이 없다. 곰과 늑대도 포함한다. 그러니 어원커 부족이 애니미즘을 떠받드는 것이 당연하다. 동물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에 다 영이 있어 이를 귀하게 여기는 습성은 지금 시각으로 봐도 오히려 신선하다.

  ‘나’의 남동생 루니는 옆 부족 출신 어여쁘고 자그마한 아가씨 니하오와 혼인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씨족 무당인 니두가 세상을 뜨고 만 3년이 지나자 무당의 영이 니하오를 찾아왔다. 그래서 니두를 잇는 무당이 됐다. 무당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의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근데 이제 ‘죽어야 할,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당 입장에서 숨 넘어가는 사람을 살려달라는데 이걸 못 본 척할 도리가 없다. 그래 땅거미가 질 때 시작한 굿이 새벽까지 이어져 결국 니하오 무당이 픽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면, 죽어가는 사람의 배 속에 든 독물이 한꺼번에 왈칵 역류하여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이제 남아 있으면 안 되는 생명 하나를 빼기 위해 생명의 영은 대신 니하오의 자식 하나를 데려간다. 이런 사람 살리는 굿을 하기가 두려워 부들부들 떨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운명을 지닌 무당.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참 애달프다.


  3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화자 ‘나’의 초년, 중년, 노년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야기의 중심은 다마라-‘나’-다지야나-이롄나, 이렇게 여성 4대의 행적을 좇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나’의 딸인 다지야나는 다른 인물보다 아무래도 무게가 덜하고, 손녀 이롄나가 당연히 어원커 씨족의 미래를 의미한다. 중국 최고의 학교라는 베이징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다시 다싱안링 산맥으로 돌아온 이롄나는 실제 어원커 족 인물이자 화가인 류바柳芭를 모델로 했다는데, 베이징대학-헤이룽성 귀환은 작가 츠쯔젠과 같기도 하다.

  이 독후감을 정말 다 읽으셨다면, 혹시 모르겠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연상했는지. 사실 그렇다. 잘 찍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느낌이다. 당연히 츠쯔젠의 담담한 문장으로 감동은 더 하다. 사실 다큐멘터리 팬인 내 입장에서는 많은 장면이 눈에 익다. 특별한 복식과 북을 쥔 채 모닥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굿 장면을 포함해서. 재미를 위하여 읽는 작품은 아니고, 한 부족의 삶, 정말 삶다운 삶을, 이제 우리는 다시는 영유할 수 없는 진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본다, 하는 마음으로 읽는 책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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