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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지음, 윤진 옮김 / 엘리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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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에 세네갈 다카르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는 생루아의 군사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바칼로레아를 통과, 프랑스로 날아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공부하며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이자 시인인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에 집중한다. 그러다 학위논문을 때려치우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이는 작품 속 화자 디에간 라티르 파이와 매우 비슷하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역대 공쿠르상 수상 작품을 검색하다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사하라 이남 지역 작가가 받은 공쿠르상이란 타이틀도 얻었는 바, 이 “최초의 사하라 이남” 이란 타이틀이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인 T.C. 엘리만의 장면과 겹쳐 보이기도 해서 더 재미있었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은 세네갈 출신의 천재적 작가로 한 시절 파리의 소설판을 뒤흔든 T.C 앨리만의 행적을 추적해가는 과정이다. 적지 않은 독자, 저널리스트, 작가가 이 작품을 문학이 사람의 삶에 어떻게 연관을 맺는가, 하는 측면에서 감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내가 읽어보고 책을 굳이 규정한다면 문학보다는 정치적인 작품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화권과 식민지였던 지역에서 프랑스어로 교육받고, 프랑스어로 문학 작품을 쓰는 인텔리겐치아들의 딜레마에 관한 것이라고 읽었는데, 오독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겠지.
가상의 인물 T.C. 엘리만. 1915년생. 아버지는 프랑스의 세네갈병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하고, 쌍둥이 삼촌과, 형사취수 관습에 의하여 삼촌과 혼인한 어머니와 지내다가, 어머니의 의지에 따라 세네갈 내 프랑스학교를 다녔고, 워낙 출중한 실력으로 학교 신부가 강력하게 권하여 프랑스 파리로 유학해 공부하던 중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를 출간한다. 20대 초반의 세네갈 출신 흑인 작가 엘리만이 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파리로 유학 온 세네갈의 후배 작가(지망생)이며 화자인 디에간 라티르 파이가 보기에 “대성당이자 투기장”이었다. T.C. 엘리만이야말로 진정한 작가이며 일찍이 사용된 적 없는 희귀한 단어를 사용해, 문학의 하늘에 단 한 번 떠오른 별이었다. 진정한 작가는 진정한 독자들 사이에서 목숨 건 논쟁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어서, 진정한 독자는 항상 전쟁중이라고 주장한다. T.C. 엘리만은 고전이 아니라 세 가지 으뜸패를 가진 컬트로 존재하는데, 첫째가 알 수 없는 이니셜로 된 이름이고, 둘째가 단 한 권의 책만 남겼으며, 셋째로는 흔적 없이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의 존재가 사라져버렸다는 거였다.
1938년에 출간한 이 책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어떤 평판을 받았을까? 먼저 세네갈의 교과서에 나온 것을 보자. 이 책은 “아프리카 흑인의 걸작으로 프랑스에서 본 적 없는 책이었다. 그러나 날개를 꺾어버린 암흑 같은 문학적 사건이 터졌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에서도 어김없이 “아프리카 흑인”이 쓴 걸작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흑인 주제에”, “야만적인 식민지 출신의 야만적인 흑인” 주제에 곧잘 쓴 작품이란 의미도 숨어 있었을 지 모른다. 실제로 이 책 한 권을 내고 일체의 모습을 감춘 엘리만에게 평론가들은 “검은 랭보”라는 계관을 씌워 주기도 한다. 그러다 평론가들은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을 뜯어보고, 이 작품이 저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르네상스, 바로크, 낭만을 거쳐 현대문학까지 거의 전 세대에 걸친 걸작에서 결정적인 문장과 스토리와 플롯을 그대로 따온 완벽한 표절작품인 것을 밝혀낸다. 이 소식을 들은 해당 걸작을 생산한 문인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후손들, 작가를 찾을 수 없으니 책을 낸 출판사를 고소해 거액의 보상금과 범칙금을 물려, 출판사는 도산하고, 책 전량을 회수했으며, 모든 재고 역시 폐기해버렸다. 이렇게 1938년 말 이후부터 아무도 T.C. 엘리만의 소식을 듣지 못하게 된다. 이 사건은 이제 흑인 천재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미개한 암흑의 아프리카라는 식민주의적 관점을 더욱 강화할 정도로 지나치게 비관적인 작품의 대표로 꼽히면서 독자와 비평가와 저널리스트와 작가들로부터 잊혀진다.
그러나 거의 무한대의 독서를 한 엘리만은 의도적으로 서구 문명사회가 만들어낸 무수한 걸작들을 콜라쥬 또는 짜깁기해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 다른 의미에서 문화통합적 작업을 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자신이 프랑스 국적의 “백인”이었다면 평론가, 독자들이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차려 그에 걸맞은 평가를 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엘리만은 어떤 변명이나 반박도 없이 그저 무대에서 사라져버렸을 뿐이다. 유럽의 어느 작가와 비교해도 그들의 문화, 문학, 문명에 대한 이해와 습득이 뒤쳐지지 않았던 젊은 흑인을, 짧은 시간 동안 진정한 아프리카산 천재로 떠받들다가 단숨에 “표절”이라는 최악의 구렁으로 던져버린 사람들.
그래도 프랑스 사람들, 재미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쓴 책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에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이라는 공쿠르상과 상금 10유로, 14,800원을 주었으니. “최초의 사하라 이남 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나는 한 명이 더 떠올랐다. 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 아시아 제바르. 제바르는 심지어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일컫는) 마그레브 최초로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생을 마치면서 결국 자신이 작품을 쓰게 해준 프랑스어에 경의를 표했다. 시대가 변해 어떻게 바뀌었을 지 모르지만 제바르를 아카데미 회원으로 올리면서 북아프리카 흑인에게 자리를 줬으니 좀 덜 까불라고 눈짓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니겠지, 설마.
프랑스인들은 애초부터 엘리만을 작가로 보지 않고 미디어를 장식할 현상으로 보았던 거였다. 예외적인 흑인으로, 이념에 대한 전장battlefield으로. 프랑스 평론가, 저널리스트, 작가, 독자들은 아프리카 작가의 글에 대해서, 그들의 글쓰기나 창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데, 이 점은 T.C. 엘리만이나,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나, 아시아 제바르나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여전히.
위에서 1938년 말 이후에 엘리만의 소식을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에 엘리만이 나타나 종종 들르던 카페에서 술 한 잔을 하고는 했다. 이때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근위대 대위가 프랑스 문학, 시와 소설을 매우 좋아하고, 많이 알기도 했는데,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을 출판하고 쫄딱 망한 출판사 제미니에서 근무하다가 호텔 접수원으로 옮긴 직원이 대위에게 엘리만의 책을 소개한 적이 있고, 대위가 우연히 엘리만을 만나 서로 안면을 텄다.
이 내용은 작품 가운데 모두 네 번 나오는 “전기적 요소”라는 제목의 챕터로, T.C 엘리만의 사촌 여동생 ‘시가 D.’가 파리, 암스테르담에서 화자 디에간에게 해준 말과 자료 속,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정보 등을 근거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화자가 아닌) 작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작품 사이 사이에 첨가한 윤활유로 기능한다. 그 결과, 필요한 것보다 조금 과하게 길게 묘사한 느낌이 드는 시가 D.의 은인이자 동성의 연인인 아이티 시인을 통해 엘리만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며 시간이 날 때마다 라틴아메리카 각지를 여행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엘리만이 어떤 이유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에 왔고, 몇 달, 몇 주씩 각지를 돌아다니는지 금방 눈치채게 만든다.
화자는 마지막으로 엘리만을 정리하기 위해 결국 엘리만과 자신의 조국인 세네갈로 돌아온다. 이때 세네갈에서는 시민단체 BMS(“끝까지”라는 뜻의 결사)의 단원이었던 파티마 디오프의 분신자살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큰 규모의 대정부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화자 디에간과 함께 문학 동아리를 형성했던 콩고민주공화국인 무심브와도 콩고로 귀국해 모국 안에서 문학을 도모하기로 하는 등 여러 정치상황이 벌어지지만, 그것 참, 디에간(의 문학적 미래 또는 설계)와 세네갈의 정치현황과, 친구 무심브와의 결단 사이가 좀 서걱거린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서른 살의 작가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문장에 멋을 좀 많이 부린 것 같다. 작품 속에서 독자의 태도 같은 것을 몇 번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렇게 말했다가 아무래도 코피 터지지 싶기도 하다. 작가는 시가 D.의 입을 통해 작품을 “잘못 읽는 것은 죄”라고 하니까. 젊어서 그런지 작가가 좀 살벌하지? 어떻게 오독이 죄니? 독자가 오독하게 만든 작가 잘못 아냐? 뭐 “독자 만세”를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쉽고 편하게 이야기하면 될 것 같은 걸, 굳이 어렵고 화려하게 쓰다보니 독자로 하여금 피곤하게 만든다. 그런 문장이 가끔 나온다면 아이 깜짝이야, 놀래 줄 마음이 있지만 조금 심했다. 베드 씬도 꼭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 필요한 것보다 찐하게 등장하지 않나 싶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바람직하다, 라고 할 수도 있어서 그냥 귓속말로 하고 싶기는 하지만.
작가는 “뒤에 무엇이 남을까? 문학이다. 문학이 남았고, 영원히 문학만이 남을 것이다. 문학이 답이고 문제이고 신앙이고 치욕이고 자부심이고 삶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싶어 하건만 불과 몇 페이지 뒤에는 또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녀도 결코 백인이 될 수 없”으며 엘리만 역시 “식민지화는 피식민자들에게 황폐와 죽음과 혼돈을 심”고 “그보다 더 심한 건, 식민지화가 이루는 가장 악마적인 성공은, 바로 자신들을 파괴하는,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는” 것이라고 두번째 결론을 내리고 싶어한다.
독후감의 앞쪽에서 내가 이 책을 정치적 작품으로 규정하고 싶어한 것은 이 두 가지 결론 가운데 피식민지 경험이 있고 지금도 사실 반식민 상태에 있는 지역의 인텔리겐치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정치적 딜레마가, 문학이라는 다소 형이상학적 논제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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