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까마귀 문예소설 8
츠쯔젠 지음, 동동 외 옮김 / 문예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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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작품. 초고는 2009년에 쓰고 다음 해에 두 번에 걸친 다시 쓰기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츠쯔젠의 단편집 《가장 짧은 낮》을 무척 인상깊게 읽고 얼른 인터넷 검색해 이 책 <백설까마귀>를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다. 단편집에서는 헤이룽장성 전역, 저 다이싱안 지역, 즉 대흥안령 산맥의 밀림부터 만주 벌판 황량한 지평선까지 북쪽 지역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자연풍광을 묘사했다면, <백설까마귀>는 1910년 가을에서 1911년 봄까지 헤이룽장성의 성도인 하얼빈 시에서 실제로 있었던 페스트 대유행 사건에 집중했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중국 북동지역의 페스트 이야기인 줄 몰랐다. 알았으면 읽지 않았을 것 같다. COVID-19를 겪으면서 벌써 여러 작가들이 당시의 경험을 작품 속에 쓴 바 있어서 지금까지 읽은 것만 가지고도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 이사벨 아옌데의 <비올레타>, 등. 이 중에 <인간에 대하여> 한 권으로 COVID-19 이야기가 충분했듯이, 1910년대 페스트에 대해서는 이미 알베르 까뮈가 <페스트>라는 노골적인 제목으로 끝내 버렸지 않나 싶었던 거다. 그렇지만 어쩌랴, 이미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책이 도착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작품을 쓴 시기가 2010년, 중국 동북부에 페스트가 창궐하고 딱 백 년이 흐른 시기이며, COVID-19가 후베이성 우한에서 발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펜데믹에 대한 중국적 변명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이 아닌 우리가 이 책을 읽기 전에 감안해야 할 것이 있다. 츠쯔젠이 중국의 국가 1급 작가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문화적 검열을 펼치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이며, 미국과 더불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포함해서 세계 원톱 급 애국심을 거의 세뇌 수준으로 고취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국가라는 거. 이런 나라의 국가 1급 작가라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던 청조에 대한 비판은 자유스럽게 표현하겠지만, 중국인의 우수성과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수도 있는 장면은 이이의 글에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사실 이건 중국 작가에 국한한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작가들 가운데 작품 속에서 자국민이 국제적인 수모를 당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인간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츠쯔젠이 다행인 것이, 《가장 짧은 낮》에 실린 단편소설 열여섯 편이 모두 명품이었던 것처럼 짧은 이야기를 맛나게 쓰는 작가라서,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페스트, 한 가지 주제를 스물두 개의 소제목을 달아 단편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각 챕터를 구성하고 썼다는 점이다. 펜데믹, 그것도 20세기 초반에 실제로 있었던 페스트이지만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와 일본이 철도공사를 완성하고, 러시아는 자기들 철길에서부터 (출판사 오식이겠지만) 15,000km 이내의 탄광에 독점적인 채굴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타 청말의 골수를 빼먹기 위해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모두 집결해 있는 도시였다. 그리하여 다른 곳보다 이 먼 변방일지라도 하얼빈에서는 서구 과학과 의학이 선진적으로 유입되어 그나마 나은 편이었음에도 하얼빈 푸자뎬 지역에서 살고 있던 2만 명의 중국인 가운데 7천여 명이 죽었으니 세 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셈이다. 물론 러시아, 프랑스, 일본인들도 죽음의 신을 피해가지는 못했지만 외국인의 피해는 작가의 눈을 적극적으로 끌지는 못한다. 이런 큰 비극에도 역시 츠쯔젠이라서, 이이는 작품 전반을 큰 비통과 곡소리, 참혹, 이기심 같은 것으로 채우지 않는다. 아무리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늘 슬픔과 난관과 호곡과 인내만 있는 건 아니라서 촌철 같은 유머와 풍자와 눈썹 같은 즐거움의 순간도 있는 법인데, 이걸 놓치지 않았다.


  작품은 1910년 가을,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날 시작한다. 하얼빈 시 푸자뎬. 중국인 밀집 지역이다. 당시 하얼빈은 인구가 막 10만 명을 넘긴 상태였다. 러시아에 의하여 중동철도가 놓이고, 이후 철도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인력이 대폭 유입되어 러시아 사람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철도 노동자나 기타 잡일을 찾아 유입된 중국인 유민이 푸자뎬 지역에 모여 육체노동과 작은 가게를 열어 살았다. 푸자뎬에는 큰 느릅나무가 서 있었고, 가을을 맞아 나무는 엄청난 가산을 탕진한 몰락한 부자처럼 민둥민둥하고 이파리도 몇 개 남지 않았으나 물기가 많지 않은 가지가 아래로 축 쳐져 있었으니 가지마다 새까만 까마귀들이 빽빽하게 앉아있었다.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왕춘션(王春申)이 어두컴컴한 녘에 새까만 말이 끄는 마차를 몰고 돌아온다. 싼푸캉三鋪炕 여인숙의 주인이다. 중국인은 돈 있고 권세가 있다면 세명의 처와 여섯명의 첩을 거느리는 삼처육첩을 특권으로 여기는데, 하얼빈의 빈민가에 초가를 짓고 여인숙을 연 왕춘션은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처 우펀吳芬과 첩 진란金蘭을 두었다. 우펀과 결혼해 오손도손 살기 바랐지만 아이 둘을 연달아 유산한 후로 그만 아기를 들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니, 시어미가 날이면 날마다 모질게 손주 타령을 하는 바람에 그걸 견디지 못해 첩 진란을 들였다. 그런데 이 진란으로 말할 거 같으면 이름만 어여쁘지 푸자뎬에서 추녀로 이름이 높았다. 츠쯔젠은 진란을 사시, 들창코, 돼지 주둥이에 뻐드렁니, 땅딸하고 뚱뚱한 곰보이며 숫처녀라고 묘사했다. 너무 못생겨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뜻일까? 그래도 결혼을 했으니 진란은 임신을 했고, 아들 지바오繼寶, 딸 지잉繼英을 생산했다. 근데 문제는 왕춘셴이 진란과 첫날밤을 치루지 않았는데 아들도 낳고, 딸도 낳았다는 거. 진짜 아이의 아비는 아마도 노점하는 맹인 장씨 아니면 쓰레기 줍는 사마귀 이씨로 짐작할 뿐이었다.

  모친이 죽자마자 왕춘셴은 은기와 집을 팔고 통파가同發街의 초가 판자집을 구입해 여인숙을 시작했다. 큰 방 둘, 작은 방 하나를 구비해 한 번에 스무 명 정도 숙박이 가능하단다. 왕춘셴은 물 기르고, 땔 나무를 장만하고, 음식물 구매와 배표 예매를 대행했다. 우펀은 불 피우고, 정소하고, 이불 세탁하고 장부정리 일을 맡았고, 진란은 부뚜막에서 하는 거친 작업을 했지만 잘 먹을 수 있어 만족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됐는데, 그러면 뭐해, 남편이 두 여자 가까이에 오지 않는 것을. 한참 나이에 밤이면 밤마다 바늘로 허벅지만 찌르고 있을 수 없던 우펀이 드디어 출장 온 말장수의 배 밑에서 발견되었고, 그래도 남편이란 작자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 것을 알고는, 자신 한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남자를 물색하기 시작해 하일라르에서 ‘칼 기술자’ 즉 아편 자르는 일을 하다가 당국이 아편을 금지시키자 만주에서 가죽제품 장사로 업종을 변경한 바인巴音을 아예 집에 들어 앉힌다.

  이것을 본 진란도 기죽기 싫어 남자를 물색하지만 워낙 출중하게 눈에 띄는 외모라 남자들이 기겁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한 남자가 들어왔으니 자금성 환관출신 디이셩. 허벅지 사이가 훤히 비었지만 놀랄만큼 민감한 손과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서 손만 댔다 하면 진란은 하룻밤에 대여섯 번도 넘게 죽어 넘어갔다고 하니, 그래, 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대처하는 법이 맞다. 바인과 디이셩을 들인 형님과 아우는 이후부터 죽이 맞아 그나마 잘 살았다나? 그런데 여인숙 주인 왕춘셴은 정나미가 똑 떨어져 늙은 말과 병든 말을 관청에서 도태시키는 출청出靑 일을 시작했고, 작업 중에 키가 크고 위풍당당한 대단한 말이 출청 대상에 오른 것을 보고 자신이 그 말을 사서 한 번도 매어 놓은 적이 없을 만큼 아꼈으며, 집에서 나와 마구간에서 지내며 마차 사업을 시작했는데, 마치 자기 자신이 여인숙에서 출청당한 거 같은 기분이었단다.


  당시 하얼빈은 제일 작은 중국인 지역인 푸자뎬 말고 부두 구역과 신도시 구역이 있어서 주로 러시아를 비롯한 외국인이 거주했다. 부두 구역에 디팡꾸이라는 여성이 살고 있었는데 이이가 자금성 환관출신 디이셩은 친동생이다. 집이 하도 가난해서 아들 이셩은 환관으로 보내고, 팡꾸이만 데리고 살다가 빌어먹겠다고 프랑스 선교사한테 넘어가 크리스천으로 개종을 했다. 그러다 하필이면 의화단 사건이 벌어져, 단원들이 예수교 믿는 팡꾸이네 집에 불을 싸지르는 바람에 부모와 막내 여동생이 타죽어 버렸다. 팡꾸이는 길에서 만난 장얼랑한테 겁탈을 당한 후 그의 기름가게에서 함께 살다가 장얼랑이 사고로 죽는다. 정식 혼인을 하지 않아 형네 집에 들어온 장얼랑의 동생이 디팡꾸이를 쫓아내는 바람에 고모네 집으로, 거기서 다시 하얼빈으로 흘러 들어가 이름은 근사한 청운서관이라는 기생집에서 향지란香芝蘭이란 기명의 에이스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화무십일홍이라, 4년 전인 1906년에 부두 구역의 시에원에서 곡물장사를 하는 부자 지용허가 청운서관의 마담한테 돈을 주고 향지란을 속신시켜 자신의 삼처로 삼는다. 첫 아내는 오리 먹이로 쓰려고 물고기나 새우를 잡으러 강에 갔다가 빠져 죽었는데 임신 5개월이었고, 둘째는 난산 끝에 드런 세상 마감했다. 그래서 점쟁이한테 가봤더니 삼처는 반드시 천한 여자를 골라야 한다, 해서 들인 것이 기생출신인 디팡꾸이였던 것. 근데 자수성가한 부자가 특히 더 노랭이인 경우가 많아 암만해도 속신시키기 위해 준 돈이 아까웠던 거다. 본전 생각이 하도 커서 아내 디팡꾸이한테 다시, 물론 가끔, 손님을 받으라고 하고 정작 받은 다음엔 들들 괴롭히기를 계속했으니 이게 사람 사는 일이냐는 말이지.

  이 가게에 싼푸캉 여인숙의 객식구이자 처 우펀의 애인인 바인이 들러, 만주의 콩 풍년 소식을 전한다. 지금 유럽에는 식량이 모자라 난리굿인 모양이니 만주에서 싼 가격에 콩을 사 영국에 수출해 큰 돈을 벌어보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질러보는 거다. 겉으로는 거절하는 척했지만 장사꾼의 본능으로 이게 돈이 되는 일인 줄 알아챈 지용허는 흥정을 하기 시작했고, 무작정 가격을 깎기 시작했고,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바인은 흥정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좋은 가격을 일찌감치 제시했다. 여기까지면 좋았을 것을, 지용허가 더 깎아달라고 조르자, 바인은 뿔따구가 나서 얼굴이 붉어지고, 기침을 그치지 않고 하다가, 결국, 돌판 바닥에 피를 토해버린다. 유민들이 사냥한 설치류 마못에서 시작한 페스트라는 재난이 만저우리滿洲里를 거쳐 하얼빈에 처음 도착하는 순간이다.


  독후감의 처음 부분에서 말했듯이 중국인이 본 펜데믹 대항 소설이다. 서양인 의사는 오진을 하고, 러시아와 프랑스 신부는 성당에 페스트 감염자 수 백명 가득 몰아넣은 채 향불을 피우며 하느님께 전원 치유의 기도를 하다 속절없이 죽어가지만, 피해를 무릅쓴 중국인 연대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의술을 배운 중국인 의사를 선두로 효과적으로 페스트에 대항해 결국 재난을 극복하는 과정. 이런 불행 속에서도 사람들 본성 가운데 하나인 자잘한 웃음이 별사탕처럼 박혀 있는 재미있는 소설. 역시 츠쯔젠이라는 탄성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페스트라면 1947년에 이미 나온 알베르 까뮈의 작품 하나가 워낙 독보적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원래 세상 사는 게 다 그렇다. 먼저 손 댄 놈, 입에 댄 놈이 대빵인 거. 대빵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거, 이게 사실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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