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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알 ㅣ 환상하는 여자들 1
테스 건티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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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에서 출생한 작가. 데뷔작인 <토끼장: Rabbit Hutch>으로 전미도서상 소설 부문National Book Award for Fiction을 수상했다. 이 <토끼장>을 우리말로 옮긴 책이 <우주의 알>이다. “우주의 알”이 뭐냐고? 책에 그냥 지나가는 말로 딱 한 번 나온다. 이걸 출판사 은행나무 편집자가 관심있게 읽었던 모양이다.
테스 건티는 노트르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나처럼 무식한 사람은 이 대목에서 잠깐 의아해한다. 영문학을 공부하려면 차라리 영국에서 하지 왜 하필이면 노트르담에서 했을까? 무식하면 용감한 법. 이러다가 말 길어지면 건티가 프랑스 유학했다고 우길 수 있다. 인디애나주 노트르담이란 커뮤니티에 사립 가톨릭 연구대학을 지어 University of Notre Dame du Lac이라고 했다. 건티는 졸업 후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석사를 했다. 학교를 다니고 글을 쓴 것 말고 다른 커리어는 이력서에 적혀 있지 않으니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조금 받은 거 같다. 뭐 아니면 말고.
지난 시절의 작가를 검색해보면 19xx년 밀라노 시장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유대인 메뉴힌 씨와 바늘 공장의 유대계 생산직원 출신 마그다 메뉴힌 여사의 외동딸로 태어난 마리아 비토리니는, 뭐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데, 위탁가정 출신의 10대 후반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작품 <우주의 알> 또는 <토끼장>에서도 작가의 세부 출생/출신 정보를 알 수 있으면 더 좋을 뻔했으니, 그럴 리 없지만, 테스 건티 역시 위탁가정 출신이었을까? 읽는 내내 조금은 궁금해했던 것도 일리가 있지? 물론 아니겠지. 어느 위탁가정이 뉴욕에서 대학원까지 보낼 수 있었겠냐고.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원제 <토끼장>은 정말 고기나 모피를 활용하려는 목적의 토끼 사육용 hutch 사육통을 일컫는 건 아니다. 사는 데 여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 입주한 작고 낡은 “라라피니에르 저가 아파트”를 위탁가정 출신 십대 후반 아이들이 그렇게 부른다.
이들이 사는 도시. 바카베일.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 오랜 세월의 호시절을 누렸지만 이제 존Zorn 자동차 회사의 운명과 함께 몰락해버린 곳이다. 사람들은 다시 바카베일 활성화 계획을 수립한다. 도시 인근의 채스터티밸리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운 주택단지 건설을 통해 탈공업화 도시에서 스타트업 허브로 전환하려 하지만 그게 어디 쉽게 되는 일인가. 도시의 범죄율은 실업률과 손에 손잡고 급격한 우상향을 보이고 있으며 바로 몇 달 전에 5백분의 1 확률에 불과한 대규모 홍수 피해를 입었다. 결과, 뉴스위크는 연례적으로 발표하는 “죽어가는 미국 도시 톱 10” 가운데 영광의 1위 자리를 바카베일의 이마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니까 도시는 사회적 우울증의 중증 상태에 처해 있으며, 이런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 역시 삶의 활기를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은 건 물론이다. 그리하여 작품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우울 모드. 이 속의 쇠락해가는 토끼장, 아파트 입주민들 구경이나 해보자.
C12호. 60대 벌목꾼이 산다. 직업적 유효기간은 끝났지만 은퇴하자니 경제적, 심리적으로 저축이 부족해 아직 일을 하고 있다. 6년 전에 아내를 잃었는데도 얼마나 아내한테 얻어 터지며 살았는지 여자들이 지구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게 아니라는 증거가 나오면 도무지 분노를 멈출 수 없다. 휴대전화를 통해 “당신의 데이트를 평가하세요” 앱을 깔고 수요일 밤 9시인 지금도 그걸 들여다보고 있다. 자신의 프로필에는 “걍 괜찮음. 실제는 사진보다 뚱뚱함.”이라 썼다.
C10호. 10대 소년이 혼자 산다. 분량이 별로 많지 않고 따라서 중요한 인물도 아니다.
C8호. 호프Hope라는 이름의 웨이트리스 출신 스물다섯 살 산모가 4주 된 젖먹이 아들과 산다. 남편은 하루종일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밤이 깊어야 안전모를 쓴 채로 귀가한다. 호프는 산후 우울증이 좀 있는지 각성제를 투여한 여우가 된 기분이며, 임신, 출산, 산후회복이라는 직접 겪기 전에는 아무도 미리 보여주지 않는 공포영화의 3막을 몸으로 직접 겪는 한편, 아기가 바카베일과 전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안, 총격, 살인, 석유유출, 테러리즘, 산불, 납치, 폭격, 홍수, 이상기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행스럽게 공사판에 나가는 남편이 우리 주변에서 흔하고 흔하게 볼 수 있는 개 막장 잡것이 아니어서 자기도 녹아 떨어지게 피곤할지언정 말로나마 호프를 위안하려 노력한다.
C6호. 아이다와 레지. 둘 다 70대 커플이다. 아이들은 다 분가했고 맏딸 티나의 아들 프랭크는 강도짓을 하면 했지 하필이면 총을 들고 업장에 들어가는 바람에 이번에는 길게 감옥 생활을 해야 한다. 티나는 작품 속에 한 번 등장한다. 노숙인으로. 아무래도 위층에서 쥐덫에 걸린 쥐를 던져버린 거 같다. 아이다는 남편 레지널드한테 쥐덫과 죽은 쥐를 윗집 현관에 두고 오라고 바가지 벅벅 긁는다. 아무래도 옳은 일 같지 않지만 늙어서 마누라한테 얻어 터지는 것보다 서글픈 일이 없는 걸 아는 현명한 레지는 책이 거진 끝날 때쯤 해서 지긋지긋한 마누라의 말을 좇아 쥐꼬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C4호. 3명의 십대 소년, 1명의 십대 소녀가 돈을 합해 입주했다. 소년들은 잭, 말라크, 로드이며 소녀는 블랜딘 왓킨스. 작품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위탁가정 출신으로 만 18세가 다가오자 독립을 위한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거의 대장격인 말라크가 방 네 개짜리 저렴한 ‘라라피니에르 저가 아파트’에 빈 집이 나왔다는 걸 알고 룸메이트를 구하다 마지막 자리를 채울 수 없어 그냥 말로만 블랜딘에게 얘기해본 것인데 블랜딘이 흔쾌하게 그러자고 해 함께 살게 된 거다. 이들은 가장 넓고 깨끗한 방을 블랜딘이 쓰게 하는 데 동의했으며, 독자들이여 다른 맘 먹지 마시라, 룸 메이트 간의 어떠한 육체적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비록 남자 셋 가운데 둘은 여자애를 사랑하고 나머지 하나도 호감을 느끼고 있지만서도.
그런데 문제의 날. 7월 17일 이른 밤. C4호의 바로 아래층인 C2호에 사는 마흔 살의 독신 여성 조앤 코월스키는 청각예민증을 앓고 있어서 멜라토닌 정제를 수도물로 삼키고 큰 소리로 TV 뉴스를 틀어 놓았다. 외로운 여자의 침실용 탁자 위에는 마라스키노 체리가 한 병, 그 옆에 작은 포크가 놓여 있으나 병을 열거나 포크를 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멜라토닌을 먹었음에도 위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급기야 비명소리, 치는 소리, 북소리, 심지어 가능하지 않을 거 같은 발굽소리까지 들린다. 이틀 전에 세탁소에서 만난 탈색한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떠오르면서 아이가 말했던 땀 대신 피 흘리기, 예수, 프러포즈, 손바닥과 가슴과 옆구리의 성흔stigmata 같은 것이 휙 지나간다. 그러다가 조앤은 결국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놀라서 TV를 껐으며, 그 여자 아이의 입/목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비명이 또다시 들려왔으나 조앤은 엄지손톱 주위의 피부를 깨물 뿐이었다. 조앤은 두렵다. 피가 얼어붙는다는 표현이 이렇게도 적절할 수가. 마침내 비명은 멈추었지만 조앤의 손이 닿는 거리 안에 휴대전화나 노트북이 놓여 있지 않다.
사실 이때 C4호에서는 열여덟 살이 된 블랜딘 왓킨스가 육체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7월 17일 21시 43분. 고통은 신비주의자들이 책을 통해 약속한 듯 달콤했으며 영혼이 빛으로 찔리는 느낌이랄까 싶었다. 이것을 신비주의자들은 “심장의 황홀경”, “천사의 공격”이라 불렀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그저 무nothing의 반대라는 것.
블랜딘의 눈엔 눈물이, 그의 손에는 칼. 아니, 제발 그만 둬. 아니, 하지 마. 소년 한 명은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이건 엄청난 조회수를 달성할 거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작품에는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추가되어 블랜딘이 육체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밀접하게 관련을 짓는데, 그건 독후감 분량 때문에 그냥 넘어가야겠다. 하여튼 젊은 작가가 쓴 독특한 문장과 문체로 쓴 엽기발랄한 이야기. 촘촘한 조판으로 해설 없이 470쪽 분량이지만 생각만큼 페이지가 넘어가지는 않을 듯하다. 거부감도 좀 드는 촌스러운 표지는 원서와 같은 모습이니 그런가 하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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