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의 수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3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종현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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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스물다섯 편을 실은 작품집. 투르게네프가 1818년 러시아 중부 오룔 지방의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1836년까지 모스크바 대학과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1838년에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했다. 이때 나이가 스무 살. 베를린에서 스탄케비치, 바쿠닌 등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교류가 있었고 1841년에 귀국했으니까 스물세 살이었다. 내가 왜 시기를 따지는가 하면, 투르게네프가 이 책을 낸 시점이 1852년이고, 단편집의 첫 작품인 <호리와 칼리니치>를 발표한 때가 1847년, 작가가 스물아홉 살이었는데, 책의 뒤편에 23번으로 실린 <산송장>의 등장인물 과거 어머니 집에서 일하던 어여뻤던 하녀 루케리야가 생을 접는 시점이 스물여덟 혹은 아홉이고, 화자보다 여섯 살이 더 많다고 했으니 이 시점에서 투르게네프의 나이가 스물둘이나 셋이어야 하지만 이때 그는 베를린에 체류중이었거나 막 러시아에 도착해, 책에 나오는 것처럼 고향 오룔에서 늘 사냥이나 다니는/다녔던 룸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쪼잔하게 이런 극히 사소한 일 가지고 시비하는 거 아니다. 작품의 무대가 작가의 고향인 오룔 지방의 스파스코예 마을을 중심으로 주로 이 근동에서 사냥을 다니며, 물론 근동이라고 해도 우리 기준으로 근동이 아니라 땅 넓은 러시아 식 근동이라 보통 한 100베르스타, 그러니까 110킬로미터 정도 떨어졌으면 이웃으로 생각하는 근동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작가가 경험했거나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정말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맞나, 궁금했을 뿐이다. 당연히 작가는 소설, 픽션, 즉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으니 그렇거나 아니거나는 독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투르게네프의 바이오그래피를 보면 아버지가 방탕과 도박으로 타락한 육군 대령 출신인 반면, 어머니는 수많은 농노를 거느린 전제군주적 대지주여서 그런지, 작품집에 등장하는 많은 지주들이 군 장교 출신의 무능력한 남자 지주거나, 폭군 비슷한 옹고집 스타일의 지독한 권위의식에 절은 여지주인 경우가 많다. 아무리 투르게네프가 19세기 러시아 국민 가운데 천 분의 일에 해당하는 귀족 부르주아 대지주의 아들로 훌륭한 교육과 복지를 누렸더라도 이런 부모, 방탕과 도덕적으로 타락한 아버지에 전제군주적 어머니하고 살았으면 내상은 많이 입었을 거 같기는 하다. 농노 계급과 비교하면 배부른 엄살이라 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귀천과 관계없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잖아? 게다가 베를린에서 교류한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작품 속 루시 백성들은 지주와 마름과 관리인과 경찰 등의 공무원에게 끝없이 수탈을 당하는 참혹한 상황을 수시로 당한다. 사실이 그랬으니 일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작품(들)의 화자 ‘나’이며 독자가 투르게네프 본인이라 생각하는 인물은 19세기 현재, 1840년을 조금 지난 시기의 루시 백성들이 당하는 모습을 독자에게 알리기만 하지 뭐 하나 똑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긴 여기서 한 발작만 더 나가면 당시의 로마노프 왕조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겠지만. 실제로 이 책이 아니더라도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생의 대부분을 유럽 여러 나라에서 보내다 1883년에 예순넷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숨을 거둔다. 그런데 평소에 투르게네프를 좋아하지 않았거나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살던 도스토옙스키, 그의 <악령>에 나오는 투르게네프의 대역(또는 빗댄 인물)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를 감안하면, 정부의 탄압도 있었겠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훨씬 숙성한 서유럽으로 “스스로” 도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투르게네프 비호감이던 내 생각일 뿐이다. 괜히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왜 투르게네프 비호감분자였느냐 하면,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루진>에서 잘 생기기만 했지 하는 일마다 배배 꼬이고 능력도 없는 러시아 인물 루진이 난데없이 프랑스 혁명 당시 바리케이트 위에서 폼나게 샤브르를 휘두르며 혁명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참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투르게네프인 <첫사랑>은 워낙 소싯적에 읽어 아무 기억도 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은 왜 유명작품인지 잘 모르겠던 차에 <루진>은 참 난데없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작품집 《사냥꾼의 수기》를 읽어보니 사람들이 투르게네프, 투르게네프 하는 게 이해가 가더라고. 진보적 러시아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늘 독한 착취에 시달려 거칠어진 가운데도 루시의 농민들은 늘 신을 공경하고, 순박하고, 남을 가여이 여기는 선량한 반면, 귀족이나 부르주아 지주들 가운데 선한 인간들은 오직 가문이 쫄딱 망해 거덜이 난 족속뿐이다. 농민과 천민, 하인, 그리고 몰락한 지주를 향한 화자의 시선 역시 선량한 건 당연한데 그거야 뭐 작품이 원래 화자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니 누가 자기 자신한테 독한 인간, 악한 인간이라 하겠어? 다 그런 것이지. 이렇게 뻔한 결론은 19세기에는 당연한 거겠지만 거기까지 끌고 가는 방식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조금은 촌스럽다고 해도, 여전히 섬세하고, 무엇보다 “수려하다.” 또한 곳곳에 숨어있는 반어나 위트도 반짝이는데, 이건 여태 내가 투르게네프를 졸면서 읽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새롭게 발견한 작가의 다른 면모였다. 예를 들어 15번 작품 <타티야나 보리소브나와 그 조카>에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 그리 부자가 아닌 여지주 타티야나 보리소브나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지주 마님들이 흔히 앓는 병에도 거의 전염되지 않아서 그녀를 바라보노라면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렇다. 일년 내내 벽촌에만 사는 여성이 남의 험담도 하지 않고, 징징거리지도 않고,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한다든가 하며 지나치게 격식을 따지지도 않고, 쉬이 흥분하지도 않고, 갑갑해하지도 않고, 호기심에서 호들갑떨지도 않는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다!”  (p.335)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면 감흥이 별로 없을 수 있지만 위에 따온 문장은 당시 러시아의 시골 귀족, 비단 여지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숱한 별 볼일 없는 남자 지주들도 포함해 대부분의 지주, 이 가운데서 사실은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며 잔뜩 폼만 잡았던 소지주들을 은근히 흉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지. 가난한 남자 지주 가운데 그나마 심성이 바르고 불의에 대하여 타협을 모르는 인간은 이렇게 그려 놓는다. 21번 작품 <체르톱하노프와 네도퓨스킨>의 서론 부분이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빨갛고 뾰족한 들창코에 기다란 콧수염은 붉은색인데 머리는 금발인 왜소한 체구의 사내를 머릿속에 그려보시라. (중략) 얼굴, 시선, 목소리,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이 낯선 사내의 모든 것에는 광기어린 대담함과 어디서도 보지 못한 터무니없는 오만함이 숨쉬고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푸른색 눈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여기저기 산만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흘겨보기도 했다.” (p.494)


  맞다. 19세기 중엽의 소설답게 위 두 인물처럼 심성이 올바른 작은 지주들은 거의 언제나 불행한 방향으로만 죽자사자 질주한다. 안 그러면 안 되냐고? 당연히 안 되지. 악당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건 옛이야기나 희극에서 나오는 것이고, 저 멀리 희랍시대부터 제대로 된 비극은 거의 언제나 선한 사람의 끝이 좋지 않은 것이었거든. 안티고네도, 코딜리아도, 데스데모나도 다 그렇잖은가 말이지.

  단편소설 스물다섯 편 거의 전부에 일종의 전형이 있다. 먼저 시기가 나온다. 구체적으로 몇 월이라고 밝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계절에 따른 숲과 강변과 습지와 목초지, 농지, 벌판의 광경을 위에서 말한 섬세한 시각으로 그린 다음에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피관찰자 혹은 이야기를 담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의 외모를 묘사하고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낸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소설을 될 만한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그리하여 투르게네프의 사냥꾼 시리즈 25편은 모두 “교과서적인” 단편으로 꼽을 만해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본문만 64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분량과 관계없이 술술 잘 읽히는 미덕도 가지고 있다. 책의 제목이 《사냥꾼의 수기》, 여기서 말하는 “사냥꾼”은 표트르 페트로비치라는 이름의 화자 ‘나’이지만 투르게네프 자신이라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다. 이이가 거의 대부분 사냥꾼 복장을 하고, 총을 들고, 개와 충실한 사냥 전용 하인 예르몰라이와 함께 일대를 누비며 만나는 사람들의 일화로 꾸며져 있다. 거대한 대륙의 나라 러시아답게 광활한 풍광이 일품이며 참 다양한 족속들을 구경하는 것도 별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투르게네프를 읽었다,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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