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사랑 이야기 거장의 클래식 2
찬쉐 지음, 심지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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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의 신간이 한 번에 두 권 나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이 가운데 <격정세계>는 도서관에서 따로 구입 계획이 있다고 반려됐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신세기 사랑 이야기>만 ‘첫빠따’로 읽었다. 작가의 덧붙이는 말도 없고, 역자 해설도 없이 본문만 506쪽. 작품은 전위적이다. 무수히 상징적이고 메타포가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리며, 전체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이다. 장황한 출판사 책소개에는 욕망, 온천여관, 성접대부, 추파 등을 앞부분에 나열하여 여차하면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신세기라고 했으니, 21세기 현대인의 허리하학적 연애 이야기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그런 거 믿고 책 읽기 시작하면 코피 터진다. 심지어 야한 장면이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예 기대하지 말고 그냥 찬쉐가 풀어가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될 듯하다.


  독후감 쓰기가 난감하다.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건 분명한데 딱 집어서 주인공이라 하기에는 좀 어색한 마흔여덟 살의 유부남 웨이보를 둘러싼 여자들, 그리고 이 여자들의 남자들이 중심이다. 그러나 한 줄기를 이루는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마지막 연인>을 읽을 때처럼 습관적으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가 곧바로 집어치웠다. 처음엔 서른다섯 살 먹은 과부이자 계량기 공장 창고관리인으로 일하는 뉴추이란과 마흔여덟 살로 비누공장 다니는 평사원이지만 지식인인 웨이보의 만남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1년 전쯤 성sex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천여관에 입장한 웨이보가 서비스를 받기 위해 입장하면서 추이란과 옷깃을 스쳤고, 퇴장하면서 불쑥 추이란 생각이 나 여관의 데스크를 통해 정보를 알아내 연인사이를 시작한 커플이다. 48세의 웨이보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아들 둘을 독립시켰고, 아내 샤오위안은 중학교 교원으로 교양 있고 말도 부드럽게 돌려 하는 교양인이다. 지금은 가르치지 않고 교직원으로 학교 업무로 중국 각지에 출장다니는 일이 잦다. 이들은 서로 무심한 단계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라 각자만의 비밀이 따로 있어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성인군자 사이의 교류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내 샤오위안은 밤열차 객실에서 만난 저 시골 현에서 병원 개업하고 있는 양의洋醫 닥터 류와 각별한 관계를 맺는데, 오해하지 마시라, 플라토닉이다, 플라토닉.

  웨이보는 이제 뉴추이란과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다. 그래 오늘 당장 추이란의 집에서 대낮에 만나 뼈와 살을 태우려 했거늘, 그리하여 추이란은 아침부터 목욕재계하고 색조화장까지 싹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웨이보가 오긴 왔는데, 집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해, 이 말 하러 왔어. 이러고 꽁무니를 빼버렸다. 웨이보와 한낮의 엑스터시를 만들기 위해 연차까지 낸 추이란은 혀가 쑥 빠졌다. 그러나 자신은 절대 남자한테 질척대는 여자가 아니라고 믿는 추이란. 웨이보가 괜찮은 남자이긴 하지만 남자가 밥 먹여 주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추이란은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아, 추이란은 온천여관에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온 것이지 매춘을 하기 위한 건 아니다.

  매춘을 위해 이 집에 들락거리면서 추이란과 알고 지내는 두 여성은 룽쓰샹과 진주. 이들은 방직공장에 다니다가 공기중에 한없이 많은 입자로 나풀거리는 먼지를 더 들이마시면 북망산이 두어 걸음일 거 같아 공장을 그만두고 온천여관의 윤락녀가 된다. 이미 삼십대 중반쯤 되는 많은 나이로 업소에 자리를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같은 공장을 다니다가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뛰쳐나가 업소에 터를 잡은 선구자적 윤락녀 아쓰와 몇몇 남자의 후원으로 자리를 잡는다.

  아쓰는 웨이보에게 미스 쓰絲라 불리며 한때 연애도 했으나 관계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등장인물은 이 정도면 됐다. 이들은 전부 어떻게라도 서로 인연이 있고, 없더라도 두어 사람만 거치면 서로 알 수 있는 사이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 글쎄 그걸 좇아가려면 책 읽기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니까. 찬쉐는 달랑 <마지막 연인>과 <황니가>를 읽었을 뿐이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마지막 연인>보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해독解讀하는데 더 어려움이 있었고, 책을 덮은 다음에 분명히 나름대로 읽어냈고 이해도 어느 수준까지는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게 어떤 것인지 설명하자니 앞뒤로 갑갑하다. 확실한 건, 이 작품이 책소개 전면에 나온 것처럼 불륜, 윤락, 자유분방, 특히 허리하학적 자유분방과 별로,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 찬쉐가 쓴 작품이라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으니 나는 당연하다 생각하는데, 혹시나 해서 미리 깔아두는 말 또는 정보다.

  좋다. 작품을 읽은 감상으로서 독후감 대신, 책을 읽으며 든 의문을 한 번 이야기해보자.

  제목이 ‘신세기’라고 했고 출간연도도 2013년이다. 찬쉐는 밀레니엄 이후의 21세기 식 사랑에 관해 쓴 작품인가? 그것 참 모호하다. 이 독후감을 시작할 때 “상징적”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메타포” “전체적으로 초현실주의”라고 했으니 모호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실 사랑이면 사랑이지 21세기 식 사랑이란 것이 특별하게 존재할 만큼 드라마틱한 의식의 변화는 있었던 것 같지 않고, 작품 속에서도 이 시대의 특별한 사랑 방정식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주요 등장인물의 나이도 미스 쓰, 즉 아쓰만 제외하고는 30대 중반 이후의 여성과 40대 후반 이후의 남성이다. 더 이상 “조신한 여성”으로 불리기 원하지 않는 것도 이번 세기 들어 등장한 신여성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등장인물과 작가 찬쉐는 지난 날, 저 멀리 고향이나 시골, 그러니까 “존재의 시원”의 장소나 기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나의 생각이 시원始原하는 곳. 그곳에서 근원적 나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 영향을 주었던 인물. 이런 것들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돈과 시간과 땀을 대가로 찾아 가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다시 돌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이미 사라진 사촌 오빠네 집, 몇 십 년 전에 묻힌 넷째 숙부가 되고, 이렇게 한 번 초현실적으로 방문한 옛 고향 동네 사촌오빠 집과 이미 죽은 넷째 숙부는 작품 속에서 계속 출몰한다. 이건 뉴추이란의 경우이고, 자아의 시원을 발견하지 못한 웨이보는 결국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 하천에서 모래 채취작업에 투입된다. 감옥에 들어가니 참으로 다양하게 시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천지다. 이들은 갖은 방법을 통해, 예를 들어 총을 들고 교도소로 쳐들어왔다가 그 길로 수감되고, 이후에도 별의 별 방법을 써서 교도소에서 출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곳이 그들에겐 가장 편한 시원의 장소이니까. 웨이보도 마찬가지다.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 웨이보는 그것으로 자취를 감춘다.


  시원의 장소는 뒤 돌아보면 벌써 사라지고 만 사촌 오빠네 집일 수도 있고 원하는 사람이 발길을 돌리면 나타나는 자유항의 거대한 슬롯머신 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일 유념해 보아야 할 곳은, 가장 선한 등장인물인 닥터 류의 시원의 장소, 사람이 생기기 전에 미리 준비해 있던 ‘사람을 위한 약초’가 많은 차오산의 동굴. 서양 의술을 전공한 양의이지만 중국 전래 한방의 약초 치료에도 일가견이 있는 닥터 류는, 훗날 웨이보의 아내 샤오위안이 지리 교사로 부임하는 이상향 또는 거의 이상향인 소도시 차오현을 유토피아로 만든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데, 그의 시원의 장소인 차오산의 동굴이 작품의 뒤로 가면 아편 밀매를 하는 건달이자 아쓰의 애인이 특별 통행증을 갖고 횡행하는, 더러운 오수가 흐르는 미로 같은 지하도와 혹시 관련이 있을까? 닥터 류의 차오산 동굴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약초로 차 있는 반면, 아편 판매자의 하수구를 통해서는 사람을 환희와 중독으로 이끄는 아편이 이동하는 장소이다. ‘동굴’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장용학이 쓴 <원형의 전설>에서 마담 빠타플라이 이지야李芝夜의 이복 오라버니 이장李章이 친아버지와 죽음의 담판을 벌이는 고향집 뒷산의 사적 감옥, 동시에 근친상간의 원죄의 동굴을 연상한다. 찬쉐의 동굴 또는 하수도는 분명 실존이나 원죄의 동굴은 아니고, 치유 혹은 아편(이게 무엇을 위한 메타포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의 동굴과 이동 통로일 터인데 그게 도대체 뭘까? 이럴 때 흔한 역자해설이라도 있으면 커닝이라도 할 텐데 그것도 없고, 거 참, 아쉽게 됐다.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얼핏 보면 처음엔 그런 거 같지만 육체적 사랑의 이야기도 아니다. 육체적 사랑을 기대하시면 차라리 <격정세계>를 읽으시라. 근데 신기한 것이 작품이 한 1백 페이지를 넘어가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그야말로 오리무중을 헤매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도 하지, 계속 따라 읽게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대개 이럴 때 책 읽기에 지극한 권태가 생겨 급기야 때려 치우게 되지만 찬쉐가 특별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지금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감을 못 잡아도 기꺼이 따라 읽게 된다는 거. 심지어 지루하지도 않다는 거. 비록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고비만 넘어가면 된다. 확실하게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도 기화한 드라이아이스 흰 연기로 일종의 형태를 만들 듯 비록 애매하지만 독자들 나름대로 한 형상을 더듬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상징, 메타포, 초현실주의를 기껏해야 더듬었을 뿐인데 이 정도로 마치 다 이해한 것처럼 <신세기 사랑 이야기>가 대박이다, 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별점으로 5별을 주지 못하는 이유로 이 정도 변명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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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19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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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19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 토론했는데, 발자크와 찬쉐의 엄청난 간극과 온도차때문에 어질!합니다. ㅋ

Falstaff 2024-04-19 18:43   좋아요 1 | URL
<골짜기의 백합> 재미있잖아요. ㅎㅎㅎ
찬쉐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곧바로 이어 읽으면 나름대로 묘미가 있을 거 같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