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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오스의 바위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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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에 큰 기대를 걸었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읽기도 전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 이번에는 페르시아와 부하라,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광야 대신, 해변을 끼고 곧바로 산맥이 병풍처럼 들어선 레바논의 산악지대, 작가 아민 말루프의 고향이기도 한 크파리야브다를 배경으로 했다. 저 산맥 사이로 아슴푸레 바다가 보이는 산골 동네 크파리야부다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유명한 바위가 많았다. 군함바위, 곰머리 바위, 매복 바위, 장벽 바위, 흡혈귀의 젖가슴 바위라고도 불리는 쌍둥이 바위, 염탐 바위 등. 이 가운데 왕좌 형상을 한 위용이 넘치는 바위가 있었는데, 많은 이들의 엉덩이에 닳고 닳아서 움푹 파이고, 높고 반듯한 등받이와 양쪽에 팔걸이까지 갖추고 있는 바위가 있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타니오스의 바위”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짓궂은 개구쟁이라 하더라도 전설처럼 전해오는 미신 때문에 가까이 가는 아이들이 없었다. 저 오랜 옛날 ‘타니오스 키크’라는 사람이 이 바위에 가서 앉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하게 됐다는 거였다. ‘타니오스’는 사람의 이름이고, ‘키크’는 별명이 분명하다. 예전엔 자주 먹기 힘들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흔하게 식탁에 오르는 키크는, 주성분인 응고시킨 우유와 밀을 걸쭉하게 끓인 시큼한 맛의 스프로 크파리야브다 마을의 오랜 전통 음식이다.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에 자기 이름을 올릴 정도의 인물한테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크파리야브다가 비록 천주교를 믿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이슬람 문화권에 속했음에도 남자에게 여성이 만드는 음식의 별명은 지독하게 수치스러울 수 있음에야.
크파리야브다가 고향인 화자는 바위의 내력 또는 전설을 알기 위하여 고향을 방문한다. 이 지방 역사에 열정적인 전직 교사이며 동시대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96세의 게브라이엘 어르신을 방문해 노인 역시 구전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타니오스의 이야기를 얻어듣는다. 화자는 노인의 이야기에다 지역의 도서관에서 찾은 엘리아스 수도사의 <산악지대 연대기>라는 제목의 오래된 책을 어렵사리 구하고, 같은 시기 산악 지역에서 사흘라인 영국 학교를 만들어 운영하던 제러미 스톨튼 교장의 일지, 편지 등 기타 기록물을 학교 자료실에서 얻어, 이 세가지를 조합하여 그동안 변경지역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던 타니오스 이야기를 되살려낸다.
19세기 초, 그러니까 1820년대의 레바논 산악지역 크파리야브다 마을은 영주 샤이크가 3백여 가구를 다스리고 있었다. 사실 마을의 모든 땅은 샤이크의 소유이며 거주민들은 그를 주인으로 모시는 소작인 정도였겠지만 봉건적 사고방식에 따라 샤이크는 자기 영지 내에서 벌어진 사건, 주민들 간의 갈등 같은 것을 해결하는 판사 역할도 겸했다. 작품에서 ‘가신’이라고 일컫는 주민들은 샤이크를 존경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었으며, 샤이크는 어떤 상황이든지 주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으니, 여지없는 봉건적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샤이크 위로는 산간지역을 통치하는 ‘아미르’가 있으며, 그 위로 트리폴리, 다마스, 사이다, 아크레 지방의 총독인 파샤가 있다. 더 위로는 샤이크조차도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던 군주,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의 술탄이 오랜 세월 레바논 지역까지 통치했다.
나라 밖을 보면, 19세기 들어와 오리엔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유럽의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뚫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시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렸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없었으니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영국을 견제하고 싶어하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권에 속했던 리비아를 실질 통치하기 위하여 공을 들인다. 영국 입장에서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레바논 지역에서 이집트 세력을 축출하기 위하여 전쟁도 불사하려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병력보다 먼저 침투하는 것이 교회와 학교. 영국은 왕국에 충성하는 목사 부부를 카파리야브다의 상위 지역인 사흘라인에 보내 천주교 영향권에 개신교와 영국에 우호적인 엘리트 요원을 확보하려 한다.
작품의 주요 무대인 크파리야브다의 샤이크도 다른 샤이크와 마찬가지로 자기 말에 거역하는 주민한테 귀싸대기를 아끼지 않기도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주민들에게 손해가 가지 않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예를 들면 산악지역 전체를 관장하는 아미르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려 하면 적당한 뇌물을 써서 세금을 깎든지, 일단 지불 기한을 최대로 늦추고 어영부영 납부하지 않는 방향으로 만드는 것이 특기였다. 당시엔 전쟁이 흔해서 징병을 해도, 크파리야브다의 샤이크는 절대로 주민들을 개별 입대시키지 않고 명예로운 자진 입대 형식을 취해 영지 주민들이 단체로 하나의 단위, 소대면 소대, 중대면 중대를 이루어 출전함으로써, 부상병이나 전사자를 전장에 그냥 버리고 온 적도 없고, 가족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는 일도 없었다. 이런 샤이크를 주민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 없어서 하나의 안타까운 결점이 있었으니 여자를 유난히 밝히는 몹쓸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샤이크에 관해 소문이 나기를, 여자란 여자는 모두 탐을 내며(진실), 밤마다 영지의 여자를 농락한다고(과장) 했다. 마을의 영주이니 외부에서 손님도 자주 오고, 그때마다 중동지역 특유의 손님맞이로 음식 깨나 해야 했기 때문에 영주는 마을의 여자들을 성으로 불러와 어떤 어떤 요리를 하라고 할 수 있었고, 이때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눈에 띄면 낮이고 밤이고 처소로 불러들였다.
타니오스의 어머니 라미아는 아름다움을 십자가처럼 지니고 다녔다. 무리 속에 숨에도 후광이 빛나는 듯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2층 객석에 한 남자가 떴을 뿐인데 아예 그 남자가 선 일대 전체가 환하게 빛나는 듯한 것도 봤다.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음에도. 하여튼 타니오스의 어머니 라미아가 그런 족속이었다. 라미아? 스펠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마리아’하고 비슷하다. 크파리야브다는 천주교를 믿는 마을이다. 라미아는 샤이크의 집사, 그것도 충성스러운 집사 게리오스의 아내로 성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다. 게리오스는 집사 말고도 비서, 시종, 서기, 회계사, 친구를 겸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샤이크의 말이나 지시를 어겨본 적이 없다. 그런 라미아가 드디어 샤이크의 눈에 들어온 거다. 샤이크가 라미아에게 키크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어떻게 하다 라미아가 샤이크의 방에 든 것까지는 확실한데, 이후 라미아가 임신을 해서 아홉 달이 지나 타니오스를 낳은 것도 분명하지만 그게 정말 샤이크가 키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가 만든 아이인지, 아니면 남편 게리오스의 아들인지는 책이 끝날 때까지 똑부러지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제 타니오스가 “타니오스 키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아시겠지? 타니오스는 평생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신이 정체성에 관해 얼마나 큰 스트레스에 시달렸을까? 짠하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위에서 오스만 제국과 영국, 이집트와 프랑스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반면에 리비아, 이 가운데 작품의 무대로 국한하면, 크파리야브다 마을과 샤이크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편에 서는 한편, 상위의 아미르는 새로운 실력자인 이집트를 지지한다. 그리하여 당연히 크파리야브다를 박해하기 시작했고, 전에 샤이크의 집사를 하다가 재산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후 양잠업으로 돈을 벌어 귀향한 루코즈와 연합해 샤이크를 압박한다. 어머니가 키크를 만들러 간 김에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타니오스가 점점 자라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루코즈와 좋은 관계를 맺어 그를 지지하게 되었는데, 이때 루코즈의 외동딸 아스마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처음엔 루코즈도 타니오스를 사위감으로 생각했지만, 얘기가 길어지니 결론만 말해서 나중엔 안면몰수하고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때 아버지 게리오스가 혼인문제를 가운데서 틀어버린 천주교 총대주교를 나중에 ‘매복바위’라고 불릴 바위 뒤에 숨어 지나가던 총대주교를 총으로 쏴 죽여버린다.
타니오스와 아버지 게리오스는 이 일로 레바논을 탈출해서 키프로스로 몸을 숨기는데, 총대주교가 암살당한 건 역사적 사실이라고 작가의 덧붙이는 말에 쓰여 있다. 게리오스라고 하는 샤이크의 집사가 쐈는지, 아니면 열강 싸움에 레바논 지역간 다툼의 와중에 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총대주교가 암살당한 것만 사실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순전히 상상으로 지어낸 것만은 아닌 픽션”이라 한다.
이렇게 <타니오스의 바위>는 열강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레바논의 근대사를 깔고 청춘의 사랑이야기를 보태면서 당시의 사회를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에 소개한 스토리는 작품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재미있고 유익한 작품이다.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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