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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 ㅣ 거장의 클래식 1
바이셴융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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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로는 ‘얼자孼子’라고 쓰고 우리말 제목을 ‘서자’라 했다. 역자 김택규는 초고에 한자어 발음대로 “얼자”로 썼을 수도 있지만 결국 “서자”로 쓰고 대신 한자어 ‘孼子’를 첨부하기로 합의했던 거 같다. 제목 짓는 건 거의 언제나 출판사 마음이다. 서자庶子는 사전적 의미로 양반과 양민 사이의 자식과 후손. 서얼庶孼은 서자와 그 자손을 말한다. 그럼 얼자孼子는? 서자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 같은 경우의 얼자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식”이란 의미에 해당한다. 임금에게 인정받지 못해 늘 외로운 신하가 고신孤臣, “어버이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서자(또는 서자 취급을 받는 신세의 자식)이 얼자孼子. 이걸 합해 아 씨, 나만 미워해, 하는 족속들을 일컬어 고신얼자孤臣孼子라고 한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 ‘나’이기도 한 리칭李靑은 석달 열흘 전 몹시도 맑은 오후에 중국 본토에서 연대장을 역임했던 퇴역군인 아버지가 권총을 흔들어대면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났다. 입학하기 쉽지 않은 위더育德 고등학교 야간부 3학년 3반에 다니던 나는 “1970년 5월 3일 밤 11시경 화학실험실에서 실험실 관리원 자오우성趙武勝과 외설행위 중 학교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5일 어린이날에 퇴학당했다. 아버지는 쓰촨성 출신으로 입대하여 일본군과의 창사長沙대첩에 참전해 눈부신 전과를 올려 2등 보정寶鼎훈장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그러나 1949년에 아버지 부대는 후베이성의 다볘산에서 팔로군과 교전할 당시 거의 전멸을 했는데, 이때 포로로 잡혔다. 우여곡절 끝에 타이완으로 탈주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대는 포로가 된 전력 때문에 아버지의 군적을 말소시켜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추천으로 펑산鳳山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자신이 못다한 꿈을 이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자신의 훈장을 ‘나’의 가슴에 달면서 훈장의 소유권까지 모두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이랬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남자와의 외설행위로 퇴학을 당했으니, 고등학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관학교는 아예 꿈도 못 꾸게 되어 꼭지가 돌지 않았겠는가. 하여간 그이의 입장만 감안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어머니는 타오위안挑園 시골 오리농장집 양녀로 있었다. 양부가 심각한 알코올 의존이라 학대를 당하고는 했는데 하루는, 그래봤자 일상다반사이긴 하지만 양부가 던진 낫에 이마를 맞아 양미간에서 피가 철철 흘러 그 길로 도망쳐 1군단 근처의 다방 종업원으로 있었다. 시골 출신 답지 않게 고운 외모 때문에 어머니를 두고 장교 둘이 심각하게 싸워 타이베이로 와서 지금은 옆집에 사는 황아저씨 댁의 임시 가정부로 있다가 아버지와 인연이 된 것. 이때 아버지가 45세, 어머니는 19세. 날씬하고 가는 허리에 풍성하고 검은 머리털, 앳되 보이는 자그마한 여자로 골목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어머니는 아들만 둘 낳았다. ‘나’와 동생. ‘나’는 남방 쓰촨 출신의 아버지를 닮아 피부가 거무스름하고, 동생은 출신이 불분명한 어머니를 닮아 하얀 얼굴에 곱상한 외모. 젊은 어머니는 당연히 아버지 닮은 나를 검둥이, 자신을 닮은 동생을 흰둥이라 부르며 동생을 편애했다. 편애 수준을 넘어 ‘나’를 거의 미워했다. 그렇게 살다가 ‘나’가 여덟 살이던 해 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고, 들리는 말에 따르면 샤오둥바오小東寶 이동 공연단의 트럼펫 주자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고 했고, 사실이 그랬다. 이때 ‘나’의 기억으로 처음 아버지가 권총을 뽑아들고 두 연놈을 쏴 죽여버리겠다고 골목을 활보했었다.
동생은 어머니가 사라진 이후에 ‘나’를 의지하며 사이 좋게 지냈다. 작년 열다섯 번째 생일에 ‘나’가 야마하 버터플라이 하모니카를 선물해주었는데 얼마나 잘 불던지 아무래도 음악에 재능이 대단했던 거 같다. 그런데 백일 전에 아버지한테 집에서 쫓겨났을 때 우연히 하모니카가 ‘나’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어서 이제 ‘나’가 기억하는 유일한 동생의 물건이 됐다. 동생이 말하기를 지금 어머니 황리샤黃麗霞가 남공항의 귀난거리 빈민가 막바지의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해, 작품의 중간 이후에 직접 가볼 생각이다. 가 봤자 좋은 꼴은 못 보겠지만, 몇 달 전에 급성 폐렴으로 어려서 죽은 흰둥이 둘째 아들만큼이야 하려고.
자, 주인공 ‘나’ 리칭, 애칭 아칭阿靑으로 불리는 ‘나’의 팔자를 보자면 그야말로 얼자孼子라 할 만하겠지? 그러나 ‘나’ 뿐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성 동성연애자, 게이들이 다 얼자, 사회에서 미움만 열심히 받으며 사는 얼자 신세이다. 책에서 말하는 얼자는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
타이베이에는 이들이 모이는 해방구가 있다. 바이센융은 이곳을 “왕국”이라 부르지만 마땅하지 않다. 왕국엔 당연히 왕이 있어야 하거늘, 이들한테 사부와 어른은 있을지언정 왕, 귀족은 없다. 그래서 왕국이라기보다 해방구 또는 코뮌이라 칭해 마땅하리라. 노소와 빈부와 학력과 출신의 차별이 없고 모두 사랑으로 동등한 구역을 어찌 왕국이라 하는지. 하여간 그이들의 왕국에는 낮이 없다. 밤새도록 번창하다 날이 새면 자취를 감추는 비합법적 나라. 길이 2백~3백미터, 너비 백미터 남짓한. 타이베이시 관첸거리 신공원 안의 직사각형 연못 주변 은밀하고 불법이며 손바닥 만한 나라. 오랫동안 외부인에게 얘기하기 힘든 놀랍고도 비통한 역사를 간직한 곳. 오직 사랑과 욕망과 갈증을 달래기 위해 집결하는 사랑꾼들의 장소. 이들의 면모를 보자.
궈郭 노인. 왕국의 역사를 간직한 원로 가운데 원로. 장춘로에서 ‘청춘예원’이란 사진관을 운영하며 왕국의 젊은이들의 사진을 수집해 두꺼운 앨범을 만들고 “청춘의 새들”이라 제호를 단 인물. ‘나’ 아칭 역시 사진을 찍었으며 87번에 해당하고, ‘참매’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나’는 집에서 쫓겨난 후 석달 동안 난양거리 신난양극장의 지린내 나는 공중화장실에서 눈빛과 손짓과 발걸음으로 갖가지 신비한 암호를 타전하며 3개월 동안 남창생활을 하다가 어느 비 오는 가을, 왕국의 연못 한 가운데 있는 정자에 몸을 구부리고 덜덜 떨면서 자고 있다가 궈노인에 의하여 구출되어 왕국의 국민으로 받아들여졌다. ‘나’ 이외의 숱한 청춘들이 노인이 내미는 구원을 얻어 어쨌거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양사부라고 불리는 양진하이楊金海. 똥배와 검정바지 속 튼실한 엉덩이 두 짝으로 풍선 세 개를 달고 다니는 왕국의 개국원로. 과거에는 동족을 위해 중산북로에 ‘류타오퉁’이란 술집을 경영했지만 건달들의 방해로 접은 경력이 있다. 특히 젊은 동족을 위해 무한정의 무뚝뚝한 친절을 베푸는 인물.
라오구이老龜. 예순이 넘은 늙은 호색한. 하도 추접해 공원 사람들이 상대도 잘 안 해준다. 목덜미 가득 마른 버짐이 피었으며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점점 찌그러든다.
저우周 사장. 중허향中和鄕에서 염직공장을 경영하는 인물로 ‘나’의 친구인 샤오위小王의 수양아비, 즉 뒷바라지해주며 사랑을 얻는 중늙은이. 일년 넘게 중허향에서 같이 살자고 요구했지만, 일본 화교인 생부를 따라 도쿄로 떠날 일념에 차있는 샤오위는 이이의 요구를 야물딱지게 거절하고 있다.
샤오위는 다른 수양아비도 만들어 관리하고 있는데 작품을 시작할 때는 역시 일본 화교로 타이완에 건강 보조식품 공장을 지으려 온 세이조 제약의 린사마, 중반 이후에는 일본과 홍콩을 잇는 화물선 선장 룽龍선장으로 하여간 일본과 연줄이 닿는 사람들한테 지극한 관심을 쏟는다. 친부 역시 사업차 타이완으로 왔다가 엄마를 만나 샤오위를 만들더니 일본으로 내빼고 소식을 끊은 인간이다.
우민吳敏. 마흔 전후의 무역회사 대표로 주로 플라스틱 장난감을 수출하는 장선생과 오래 동거하다가 별 이유 없이 쫓겨나 크게 상심하는 바람에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다. ‘나’ 아칭과 샤오위가 발견해 병원으로 데려갔으나 보증금이 없다고 수혈을 거부당했다. 그래서 두 명의 친구가 5백cc 씩 1리터의 피를 수혈해주어 생명을 건지고, 상상을 초월하는 입원비, 시술비는 동족은 아니지만 자살한 게이 아들을 둔 장군 출신 귀인 푸 어르신이 지불했다.
푸 어르신은 왕국의 모든 동족한테 우러름을 받는 존재. 일흔이 넘은 나이로 여전히 고아원에서 선천적으로 양 팔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 장애아를 돌보며 여러가지로 왕국의 종족을 위해 가지고 있는 인맥과 돈을 아낌없이 베푸는 살아있는 보살이다. 대륙에서 함께 전투에 나섰던 전우의 아들로 크게 사고를 치고 십년간 미국으로 몸을 피했다가 돌아온 왕쿠이룽과 특별한 애증관계에 있다.
성盛회장. 나이 많고 명성 높은 원로. 지금은 조금 노망이 들고 류머티즘 증상이 심해 젊은 파트너를 찾는 것이 그저 함께 즐거운 얘기나 하며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 마시기 위해서이다. 에버그린 필름의 회장이며 뛰어난 로맨스 영화를 여러 편 제작해 큰 돈을 벌었다. 과거엔 상하이에서 직접 배우로 출연하는 등 한 시절의 스타로 군림했던 적도 있다. 가끔 동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큰 파티를 열어준다.
쥐mouse. 천생 좀도둑. 절대 좀도둑질을 끊지 못하며 훔친 물건들을 보물처럼 아낀다. 극도로 포악한 형 집에서 사나운 형수와 사는 지질이. SM 사이코한테 걸려 작품 시작부터 팔뚝에 담배빵을 당하지만 ‘나’ 아칭과 샤오위, 그리고 우민과 함께 청춘 4인의 친구로 지낸다. 이런 쥐를 장쑤 저장 요리의 대가 루盧 주방장이 열라 쫓아다니는데, 주방장 말씀이 갈비뼈가 도드라져 깨물어 먹는 특별한 맛이 있다나?
그리고 숲 속에 숨어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이웃들도 있다. 양갓집 출신 대학생들이 많고 이외에도 휴가 나온 사병들, 신뻬이에서 온 젊은 깡패들, 어린 점원들, 유명한 의사, 군 법무관, 한 때 잘 나갔던 은막의 스타들 등등. 하여간 얼굴 알려지면 신상에 크게 해로울 인간들이 이 범주에 많이 속한다.
등장인물과 이들이 행위하는 장소, 심지어 극장의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화장실, 좁은 숲덤불 등등, 사회에서 소외받는 장면 같은 것은 이미 여러 작가들이 상세하게 묘사한 바 있어서 특별한 건 없다. 그저 다시 퀴어 소설 한 편을 읽는 느낌. 그러나 바이센융은, 스스로가 장군의 아들이며 게이이고 연인을 따라 오랜 세월 미국에서 보낸 경험이 있어 등장인물 몇 명에게 자신을 투사하기는 했지만, 결코 이런 얼자들을 아들로 둔 남자, 아버지의 입장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대개 퀴어 문학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게이 아들에게는 넘어서야 하지만 난공불락인 성벽, 암담한 골방의 벽으로 기능한다. 바이센융의 시각은 그렇지 않다. ‘나’ 리칭의 아버지, 오랜 시간동안 공부 잘하고 신체 건강한 맏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걸었다가 사실을 알고 권총을 휘두르며 집에서 쫓아내기는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 아파할 것인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의 생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몇 개의 산을 무너뜨릴 지, 딱 이렇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 방법으로 독자에게 말하고 있다.
역자 해설을 읽어보면 작가가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노구를 이끌고 공항까지 나온 아버지가 눈물을 철철 흘렸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한 번도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았지만 늘 아들을 귀하게 여긴 아버지가 몰랐을 리가 없다면서.
사는 게 다 그렇다. 어렵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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