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들 페이지터너스
에마뉘엘 보브 지음, 최정은 옮김 / 빛소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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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8년 러시아계 유대인 아버지와 룩셈부르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는 이이의 삶이 평생 고단했으리라는 것쯤 훤하게 알 수 있다. 스무살이던 1918년 빼빼로 데이 11월 11일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전쟁에 나갔을 확률이 높고, 아무리 프랑스에서 살았다고 해도 1930년대와 40년대 반유대주의가 팽배한 유럽에서 생존하느라 질기게 고생을 했을 터이다. <나의 친구들>은 보브의 데뷔작으로 스물여섯 살이던 1924년에 발간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리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듯하다.

  작품은 1차 세계대전에서 손에 부상을 입어 전쟁 공로 훈장을 받고 지금은 상이군인 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 빅토르 바통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가난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을 “나의 친구들”이라고 했다고 정말 바통의 친구들과의 우정을 쓴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앞뒤를 둘러봐도 의지가지 없으며 편한 대화 상대도 한 명 없는 청년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친구라 여기며 자신도 끊임없이 살고 있음을, 아니면 적어도 살아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상실될 뿐인 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을 그렸다.

  그리하여 첫 페이지를 열면 룸펜 프롤레타리아인 빅토르 바통이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떠 감각하는 것들을 묘사한다. 습기에 얼룩진 벽지 여기저기에 공기가 들어가 들떠 있는 옥탑방에 살고 있는 화자 ‘나’는 우유가게 종업원으로 새벽 일을 마치고 9시에 돌아와 노래하며 청소를 시작하는 옆집 아가씨. 그이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으며, 이유가 남루한 외모의 가난뱅이이기 때문에 외면 받은 걸로 짐작하지만 뭐 그저 그렇다는 거다. 항상 심하게 기침을 해댈 만큼 병색이 완연한 영감님, 늘 바르게 생활하지만 느지막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나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한 같은 층의 노동자 르쿠안 씨 가족 등등.

  집 밖의 친구들. 싸구려 식당 주인이자 과부인 뤼씨 뒤누아, 가난한 사람한테 호의를 베풀다가 뒤통수를 치는 사기꾼 앙리 비야르, 자살하려 마음먹었다가 ‘나’ 빅토르가 주는 푼돈을 받고 술을 마시는 부랑아 뱃사람 느뵈, 자선을 베풀지만 ‘나’의 외로움이 만든 서툰 작은 실수 때문에 호의를 망가뜨리는 신사 라카즈, 싸구려 술집에서 노래하는 삼류 가수 블랑셰. 모든 관계가 허망하게 끝을 만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감탄한 것은 스토리라기 보다 묘사였다. 나는 이 책은 “프롤로그만 읽어도 별점 다섯”이라고 말한다. 그저 평범하게 방 안의 사물을 보는 시각이지만 앞 뒤의 풍경을 연상하며 빅토르와 같은 렌즈를 적용하면 가슴이 쓰윽, 칼날에 베고 만다.


  “햇빛이 드는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먼지가 일순간 빗방울처럼 반짝인다. 그것을 바라보며 일어서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하지만 그런 현기증은 금방 사라진다.

  나는 먼저 양말을 신는다. 양말을 신지 않으면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성냥개비들이 발바닥에 들러붙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손으로 의자를 짚고 바지를 입는다. 구두 밑창을 들여다보며 앞으로 얼마나 더 신을 수 있을지를 계산한다. 그 다음에는 어제 세수할 때 생긴 물때로 눈금처럼 선이 그어진 세숫대야를 크게 벌려 상반신을 깊이 숙인 채로 세수를 한다.

  세수할 때는 멜빵을 어깨에서 풀어 허리 쪽만 고정한 채로 바닥에 벗어 놓는다. 이것이 나의 세면 규칙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세숫대야는 너무 작아서 양손을 담그면 물이 넘치고 만다. 거의 다 닳아 작아진 비누는 더 이상 거품이 나지 않는다.” (14~15쪽)


  가난하고 외롭고, 누구 하나 돌봐주지 않는 청년이니 부실한 영양도 문제일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빅토르는 기립성 저혈압 증상을 느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순간 방안을 배회하는 먼지조차 빗방울처럼 반짝인단다. 이것 말고도 아예 프롤로그를 통째로 다 인용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구질구질하고 궁상맞기 한이 없는 장면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묘사해 나간다. 이것이 큰 부상을 입고 별로 대가 없이 청춘을 소비하고 있는 비자발적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일상이라서 자연스럽다. 맨발로 바닥을 딛으면 성냥개비가 발바닥에 들어붙는다고 하니 틀림없이 어젯밤에 발을 닦지 않고 그냥 잤을 것이다. 온기 없는 방에서 밤을 보냈으면서도 발바닥에 땀이 찰 정도의 결핍에 시달리는 장애인 청년의 살이.

  역자 후기에 최정은은 “에마뉘엘 보브의 디테일한 묘사는 마치 한 편의 영상 브이로그를 보듯이 눈앞에 그려져 문자를 읽는 즐거움을” 준다고 했다. 아, “디테일”은 내가 쓰려고 했던 단어인데 역자가 먼저 써버렸다. 독후감을 쓰면서 이런 아쉬움을 느끼기는 오랜만이다.

  비록 180쪽에 불과한 짧은 작품이지만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어버린 건 참 드문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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