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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그린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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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도 제도 산토도밍고 섬의 북쪽에 자리한 아이티 공화국을 배경으로 세 명의 영국인 남성이 펼치는 전형적인 백인 드라마. 그린답게 내놓고 대중소설이다. 대중소설도 얼마든지 좋을 수 있다는 걸 그레이엄 그린만큼 잘 보여주는 작가도 별로 없다. 이이는 세계대전 중에 첩보 부대에서 첩보원, 그러니까 스파이로 활약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 구조 안의 역학관계를 묘사하는 데 특별한 설득력을 가졌다. 다만 영국 백인 출신 작가라서 제삼세계 인물 가운데는 정의로운 사람이 별로 없는 반면 영국인이나 백인들 대부분은 적어도 악의로 똘똘 뭉친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즉 주인공과 주인공 주변인들이 아무리 유색인에 관해 관대하다 해도 이들이 유럽 백인들의 지배를 받은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도 눈에 띈다. 더구나 이 작품은 1966년에 출간했다. 미국에서 흑인 분리법인 짐크로 법이 폐기된 지 겨우 1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다. 반 세기가 흐른 다음 자기 작품에 대해 이처럼 이야기하는 독자가 있다는 걸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지금은 절판 상태인 다니 라페리에르가 쓴 좋은 소설 <남쪽으로>를 보면, 유럽의 유한 여성들이 휴가를 맞아 카리브해의 아이티 섬을 찾는다. 천국 같이 아름다운 해변과 길쭉길쭉하게 잘 생긴 흑인 청년들, 그리고 그들의 몸처럼 긴 생식기를 즐기기 위하여. 그러나 세월은 아름다웠던 옛 시절을 무정하게 지나쳐 지금의 아이티 공화국은 거의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로 꼽힌다. 내가 알기로 아이티의 비극은 1820년대 프랑스가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에 막대한 독립 보상금을 요구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도 위키피디아에서 아이티를 검색해보면 나쁜 방향으로 참 알뜰하게 말아먹었다.

  산토도밍고 섬을 점령한 스페인 군대와 그들이 지니고 온 바이러스는 섬의 토착민인 타이노인의 99%, 그러니까 모두 죽여버렸고 어찌어찌 생존한 극히 일부마저 학살해버렸다. 이후에 노동력이 없어져버리니 다른 서인도제도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아프리카의 기골이 장대한 흑인을 수입해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었으며, 우월한 체격과 체력을 보유한 흑인들은 후에 거꾸로 백인과 백인의 피를 물려받은 물라토를 제거하고 독립을 선포해 완벽한 흑인의 나라를 만들었다. 밖으로는 스페인에 이어 식민지를 경영하던 프랑스에 매년 거액의 보상금을 물어주느라 죽을 맛이었으며 안으로도 어려운 살림 안에서마저 곪아버린 부패 왕국이었던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래도 시계는 멈추지 않아 노베첸토가 찾아오고 7년이 더 흐른 1907년.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판사 집안에 똑똑한 아들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태어난다. 아이는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 1934년에 아이티 대학 의과를 졸업하고 지방에서 의료봉사에 전념하며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공공의료에 관해 배우기도 한다. 귀국한 뒤발리에는 주로 머릿니를 매개로 하는 후진국형 전염병인 발진티푸스를 예방하고, 고질적인 열대병 가운데 하나로 세계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전염병인 말라리아가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말 그대로 “헌신적인” 노력을 해, 아이티 국민들로 하여금 아빠 의사, Papa Doc. 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파파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비”라는 뜻으로 쓰였다니 그야말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던 것. 그러다가 군부에 의해 탄압을 받아 시골에서 은둔생활도 하는 등 고난의 시간을 조금 보낸 후 1957년에 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어떠한 부정도 없이 당당하게 비밀, 경쟁투표에서 72%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오른다.

  거의 모든 경우 거대 악의 근본 문제는 권력이라는 게 내 소신이다. 세상의 모든 자비를 베풀던 파파독은 권력의 단맛을 잠깐 맛보았음에도 단박에 단맛에 도취, 이후 감히 비교의 대상이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야만적인 학정을 시작한다. 과거 도라이 왕들도 쉽게 저지르지 못했을 만행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저지르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아니, 예를 들기에도 잔인할 정도이니 차라리 조금 짬을 내 위키피디아 검색을 해보시기 바란다. 웃기는 거 하나만 이야기해보자. 1961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단다. 이때 투표자 1,320,748 명 가운데 1,320,748 명의 지지를 얻어 1백퍼센트의 득표를 해 당당하게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니, 이거 북한의 김씨 왕조에도 없던 일이다.

  작품 속에는 한 번도 파파독이 직접 원고지 위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파파독 프랑수아 뒤발리에 대통령은, 거의 모든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항상 죽음/암살의 두려움 속에 사느라 대통령궁에서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최후는 언제나 죽지 않기 위해 권력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비극이다. 파파독은 서인도제도의 가장 빈번했던 권력교체 방법인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웠으니 웃지 마시라, 이름하여 “통통 마쿠트.” 국가보안자원민병대. 민담 속 말 안 듣는 아이를 잡아가는 자루를 든 아저씨로 우리나라의 “망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면 딱이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이 부리는 악귀로 여기면 된다. 날씨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다니는 무소불위의 집단. 군대보다 더 막강한 힘과 권세를 자랑했으나 참으로 다양하게 무식한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상세하게 쓰느냐 하면, 작품의 큰 스토리가 영국인 등장인물(들)과 통통 마쿠트로 대변하는 아이티의 공포권력과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코미디언에 대하여. 누가 코미디언인가? 넓게 이야기하자면 전부 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코미디언일 수 있다. 살다보니 “웃기지도 않는”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지구 행성의 모든 이들. 작품에서는 대표적으로 세 명의 백인이 등장한다. 물론 콕 집어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화자 ‘나’ 브라운은 1906년에 몬테카를로에서 영국인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나지만 아버지는 브라운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떠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확실히 영국인은 아니었던 어머니는 어린 브라운을 기숙학교인 예수회성모방문 칼리지에 떠맡겨놓고 사라져 등록금도 치루지 않아 끝까지 학교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한 시절엔 학년에서 가장 유력한 사제 후보생이었으나 어떻게 하다 예상치 못하게 총각 딱지를 떼게 됐고, 이 사실이 알려져 억지로 졸업만 한 후에 영국 각지를 떠돌며 사기 비슷한 행각을 하다 최종적으로 명함에 “라스코빌리에 백작부인”이라 파고 다니는 엄마가 암에 걸려 오늘 내일 할 때 아이티 공화국으로 불러 호텔 “트리아농”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처음엔 호텔이 드라마틱하게 호황을 만나 이게 무슨 대박인가 싶었다. 바로 이 시절이 저 위에서 말한 다니 라페리에르가 쓴 <남쪽에서>의 무대 같은데, 브라운한테는 이 시절이 딱 3년 갔다. 이후 파파독이 정권을 잡고 학정을 시작해 곳곳에서 불법체포와 고문과 학살과 시신 유기가 벌어지는 바람에 여차하면 브라운한테도 목발이라는 기념품이 전달될까 싶어 뉴욕으로 날아가 호텔을 팔아버리려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짱구인가, 그걸 사게. 맨손으로 돌아오게 된 브라운은 네덜란드 왕립 증기선 회사의 화물선인 메데이아 호에서 1948년에 미국의 대통령선거 후보자였던 윌리엄 에이블 스미스 씨 부부와, 인도와 버마전선에서 대 일본 밀림 게릴라 전을 지휘했다고 주장하는 H.J. 존스 자칭 소령과 동승한다.

  순박한 시인이나 지방대학 총장 스타일의 스미스 씨 부부는 아이티의 사회복지부 장관 닥터 필리포의 초청을 받아 포르토프랭스에 채식주의 기념관을 짓는 등 채식주의 활동을 모색하기 위한 방문길이었다. 소설에서도 극히 드문 인자한 미국인 할아버지인 스미스 씨도 지금 말하기는 그렇지만 확실한 코미디언이다. 마음 좋고 선한 코미디언. 그는 당연히 아이티에서 하는 모든 일이 생각과 어긋나는 경험을 당할 팔자라서, 결국 일을 진척시키기도 전에 담당 장관만 거액의 부당 이익이 생기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좌절해 국경을 면한 도미니카로 가버린다.

  존스 소령은 ‘나’ 브라운과 비슷한 성향의 사기꾼이거나 적어도 사기꾼으로 보인다. 이이는 손보다 입과 혀가 앞서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고 자신만만해 결국 브라운에 의해 자기 덧에 걸려버려 어처구니없게도 과거 버마에서 경험한 게릴라전을 아이티에서 재현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버마 밀림은 바닥이 보들보들한 진흙이기라도 하지 아이티는 거의 산악 지형이라 존스 자칭 소령이 가지고 있는 평발로는 그리 쉽지 않을 걸?

  여기에 한 가지 더 흥미진진한 대중소설의 MSG,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우리의 주인공 브라운은 남미 어떤 나라의 대사 부인, 독일 출신인 마르타와 사랑에 빠진다. 대사 부인과? 그렇다. 사랑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를 돋게 하고 궁금증을 유발하고 유난히 재미있는 것이 불륜. 맞지? 수도 포르토프랭스 곳곳에 시퍼런 눈을 검정색 선글래스 뒤에 숨긴 채 도사리고 있는 통통 마쿠트를 피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어 설마 그곳에서 연애 행각을 벌일 것이라 생각지도 못하는 컬럼버스 동상 앞에 차를 세워두고 차 안에서 질펀한 몸의 유희를 벌이는 남녀. 근데 소설 속에서 연애 이야기는 뭐라? 맞다. 이별 이야기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거 보셨어? 이 책에서는? 흐흐,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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