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없는 주검 서문문고 104
사르트르 / 서문당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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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사르트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저작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심지어 “사르트르가 20세기 자체”였다는 영광스러운 명성을 누린다는 건 어디서 읽었다. 그러나 인연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도무지 친해지지 않더라는 것. 《무덤 없는 주검》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더러운 손>과 더불어 작년에 사놓고 그저 장식처럼 책장에만 꽂혀 있었다. 어쩌나, 도무지 손이 안 가는 걸. 이번 설 명절 때 내가 다니는 도서관도 나흘 연속 휴관이라 집에 머물면서 백화수복에 명태전 안주해서 떡만둣국 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연휴가 하도 지루해서 엣다 모르겠다, 핑계김에 읽었다. <구토>, <말>, 지난 세기 새파랗게 젊은 시절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것들이 와닿지 않은 건 이미 지난 일이니 굳이 기억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애초에 기대감은 하나 없이 마치 해야 할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첫 장을 열었다는 걸 이야기 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무덤 없는 주검》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사르트르라고 하면 지구행성의 대표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재작년에 읽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레 망다랭>은 내가 읽은 가장 재미있는 실존주의 작품이었다고, 우리나라 작품으로 국한하면 역시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이 제일 인상깊은 실존주의 소설이었다고 믿고 있는데, 이제 사르트르의 <무덤 없는 주검>이 새롭게 가장 설득력 있는 실존주의 희곡이라 주장할 것 같다. “것 같다”라 하는 이유는 사르트르의 다른 극작품을 더 읽을 것이 틀림없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실존주의적 극작품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레 망다랭>, <무덤 없는 주검>, 그리고 <원형의 전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실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에서 발현했다는 거 아닐까.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위로의 실존이 가장 우선하는 환경이 전쟁일 터이니. <무덤 없는 주검>에서 사르트르는 전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와 독일 협력자들의 갈등을 그렸다.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괴뢰정부가 점령한 농촌 지역의 학교 건물. 상부 레지스탕스는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 도시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장이 이끄는 저항군은 도시를 습격했으나 어쩌면 당연하게 작전에 실패하여 열다섯 살 소년 프랑수아와 프랑수아의 누나이자 장의 연인인 뤼시, 서른 살 근방의 대원 소르비에와 앙리, 그리스 출신의 오십 대 카노리가 비시 프랑스측 수비대에게 포로로 잡혀 심문을 당하기 직전이다. 그리스인 카노리는 취조실에 이미 한 번 끌려가 지역 저항군 지도자 장의 소재지를 대라며 일차 고문을 당했다. 카노리는 얻어맞고 기구를 이용해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버텼다. 이들은 모두 장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 고통을 견디다 못하면 결국 애먼 사람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다. 알지도 못하는 정보를 자백하라고 고통을 받는 일은 이들의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포로들은 고문을 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행위가 자신의 인간성을 휘발시키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어린 소년 프랑수아는 고통을 받고 싶지도 않고 거의 틀림없이 고백을 하건 말건 내일 밤에 있을 총살을 당하고도 싶지 않다. 소년은 살고 싶은 나날들이 너무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비시 수비대는 먼저 소르비에를 데려가 폭행한다. 소비에르는 당연히 비명을 질렀으며 녹초가 된 상태로 돌아온다. 조금 후 열리는 감방 문. 다들 수갑을 차고 있는 상태인데 하다못해 포승으로 묶이지 않은 장이 감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인근 마을에 친구가 있어서 친구의 동네에 거주하는 청년이라고 속이고 소재를 확인하는 대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이제 갇힌 자들은 장의 소재를 알게 됐고, 고통/고문을 견딜 확실한 이유를 갖게 된 거다. 장이 들어온 후에도 앙리가 취조실에 끌려가 수비대원들과 언쟁도 하고 두드려 맞아 뼈가 상해 돌아온다. 이를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지휘자 장.

  당연히 장도 자신의 소재를 감추기 위하여 고문당하고 있는 대원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이들 포로들은 장과 이런 저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드디어 장이 말한다.


  “좋아! 좋아! 그대로 계속해. 자네에겐 모든 권리가 있어. 나를 괴롭힐 권리마저 자네에겐 있네. 자넨 앞질러 지불했지. 자네들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어. 마음의 안도감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의 고통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자네는 알고 있나, 내가 자네들보다 더 불행하다는 것을?”


  나는 이 대사가 사르트르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죽고 사는 문제, 차라리 죽음이 축복 같은 고통을 초래하는 고문을 바로 앞에 둔 포로들에 비해 그들의 지도자였던 장의 양심적 고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고 읽었다. 실제로 한 번 고문을 당했던 소르비에는 다시 끌려가 손톱을 뽑아버리겠다고 하니, 이제는 알고 있는 장의 소재를 자백하겠노라 하더니 잠깐 방심하던 수비대의 허를 찔러 창문에서 뛰어내려 두개골이 깨져 즉사하고 만다. 양심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더 불행하다고? 웃기는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도 수시로 이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산다. 소위 말하는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헛소리.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는 책임질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 부분이 내가 느낀 <무덤 없는 주검>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물론 절정은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한 프랑수아 소년이 자신은 고문을 당할 의사도 없고, 그걸 견딜 의지도 없어서 장에 대해 자백하겠다는 의사를 비치고, 이미 끌려가 고문 대신 집단으로 강간을 당해 삶의 의지가 사라진 누나 뤼시의 허락 아래 앙리가 소년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장면이겠지만, 그럼에도 실존 문제는 이 언쟁 장면이 압권이다.

  뒤늦게 장은 아이디어를 내, 가까운 곳에 있는 세르바즈 동굴 옆에서 총을 맞아 죽은 피에르의 주머니에 자신의 신분증을 넣어 무기를 보관하는 동굴 속으로 끌어 놓을 테니 그곳에 있다고 자백하라 권한다. 진즉에 이런 아이디어를 냈더라면 소르비에도, 프랑수아 소년도 죽지 않았을 테지만 사람이란, 삶이란 그런 것이다. 좋은 생각은 절대로 적시에 떠오르지 않는 것. 그리고 정말로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장은 풀려난다. 이제 포로들은 적당한 시기를 골라 가짜 장의 시체가 든 세르바즈 동굴의 위치만 자백하면 적어도 곱게 죽을 수 있게 된 것.


  이번엔 비시 프랑스의 수비대원을 보자. 란드뤼를 대장으로 하고 크로셰, 페르렌, 코르비에, 이렇게 구성된 요원들 모두 프랑스인이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을 고문하는 것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정답은, 아마 그럴 걸? 느끼지 않았을 걸? 사르트르는 이 가운데 단 한 명, 정식 군인이나 레지스탕스 대원들보다 위계가 확실하지 않은 비시 수비대의 대장인 란드뤼 혼자 만일 이들이 자백을 하면 즉결처분을 하지 않고 독일군에 넘겨 소금광산, 염갱鹽坑으로 보내 강제노역을 하게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네 명 가운데 한 명이니 25퍼센트? 아닐 걸. 원래 침략자보다 더 악랄하게 현지인을 괴롭히는 것이 현지에서 침략자들에게 부역하는 인간들이다. 이건 동서와 고금에서 무수하게 증명이 된 것. 다만 이들은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달리 전쟁 전 프랑스에 대하여 대단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가난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적당한 벌이도 하지 못하고 부랑인처럼 떠돌거나 길거리 왈패 출신들. 이들은 의과대학을 다니다 전쟁을 만나 저항군에 들어간 앙리의 팔목 뼈를 부러뜨려 버린다. 그러나 자신들의 세월도 얼마 남지 않은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결국 자기들의 행위에 걸맞은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아직 실감하지는 못한다.

  이들 네 명의 악당들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포로 세 명을 한꺼번에 불러 자백해서 생명을 건지라고 권하고, 대장 란드뤼의 맹세를 들은 포로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그리스 사람 카노리가 그르노불가의 42번째 이정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숲속으로 50미터 쯤 울창한 숲 속에 레지스탕스가 쓸 무기를 보관한 세르바즈 동굴을 알려준다.

  나는 결말 딱 하나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사르트르는 여기에 하나를 보태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 《무덤 없는 주검》은 표제작과 <존경 할만한 창부> 이렇게 두 편이 실려 있다. <존경 할만한 창부>는 미국 남부에 있는 도시의 인종차별에 관한 드라마이다. 성매매를 하는 리치에는 애초에 죄가 없는 흑인을 변호하기로 마음을 먹지만 결국을 사회 분위기와 습관에 굴복하는 이야기라는 정도만 소개한다.

  이 책은 서문문고 104번으로 1974년에 초판, 1997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역자 최성민 전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가 1920년대 중후반에서 30년대 초반에 태어나 오래 전에 작고한 양반이다. 그래서 번역체가 젊은 분들의 경우엔 읽기 어색한 부분이 간혹 눈에 띄겠지만 책값이 정가 5천원, 할인가 4천5백원, 최고의 가성비를 즐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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