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라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6
메릴린 로빈슨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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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생이면 여든이 넘었다. 1980년에 <하우스키핑>으로 데뷔하고 2004년에 <길리아드>, 2008년에 <홈>을 발간했다. 이 세 권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었을 뿐. 나는 이 세 편의 작품만 읽고 매년 전혀 가망이 없는 노벨 문학상 후보 투표하기에 매릴린 로빈슨한테 한 표를 던졌다. 살만 루슈디가 무슬림 원리주의자에게 테러를 당해 눈 하나를 잃은 해를 빼고는. 그렇게 로빈슨의 작품들은 알게 모르게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십년의 세월이 흘러 작품의 스토리보다는 마음 속에 산산한 잔금으로 남은 유리창처럼 스산하고 쓸쓸한 광경으로. 이이가 2014년에 발표한 <라일라>가 번역해 나왔다는 걸 알자마자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이 책 이후로 2020년에 <잭>이란 작품도 발표한 모양이다. 그것도 얼른 번역 출판했으면 좋겠다. 출판한 해로 따지면 40년 동안 장편소설 다섯 편을 발표했을 뿐인 과작의 작가. 사람의 마음 속에 든, 말하지 못할 불안을 표현하는 방면에서 탁월하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아니지만 책을 읽는 속에서는 쨍, 유리창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는 이야기꾼.

  당신이 매릴린 로빈슨을 처음 읽는다면 이 책을 선택하기 앞서 <길리아드>와 <홈>을 먼저 읽어 두시라고 권하겠다. 이 두 편과 <라일라>의 무대가 아이오와의 작은 농촌 마을 길리아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래된 계약인 구약에 나오는 “길르앗”의 영어식 표기가 길리아드. 지금 찾아보니 “치유의 도시”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그러면 <길리아드>, <홈> 그리고 <라일라>를 치유 3부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사실이 그렇다. 세 작품 다 길리아드에 돌아와, 도착해 지나간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치유의 전제조건은? 아파야 한다. 상당한 상실을 포함해서. 매릴린 로빈슨의 작품을 읽는 일이 금간 유리창을 품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유이리라.


  1930년대 작은 도시의 빈민 가옥. “아이는 어둠 속에서 현관 입구에 있는 계단에 앉아 추위에 떨며 자기 몸을 껴안고 있었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집에 부모가 있는지, 아니면 이 집에 맡겨진 아이인지 아직 모른다. 아이는 극단의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잠들기 바로 직전이다. 잠에 빠지기만 하면 곧바로 편안한 죽음이 아이를 품에 안고 떠나가버릴 것이다. 주로 밤에 도착해 집의 구석 어딘가에서 대충 잠을 자는 대신 집을 청소하는 것으로 집세를 갈음하는 나이든 여인 달Doll. ‘인형’이란 뜻을 가진 doll 맞다. 역자 박산호는 이를 ‘달’이라 표기해 잦은 빈도로 나오는 달moon과 조금 헛갈리게 하지만 읽을 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얼굴에 큰 반점처럼 보이는 색이 바랜 흉터를 가지고 있는 달은 사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날 밤 아이를 구조하고 날이 새기 전에 아이를 숄에 둘둘 말아 품에 안고 길을 나선다. 이 집에 계속 있다가는 무관심한 방치로 인해 며칠 안에 죽을 아이였으나 달이 아이를 맡기로 결심을 한 것. 하지만 달은 집안의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 부모, 또는 부모 가운데 한 명, 아니면 부모로부터 위탁을 받은 보호자한테도. 이렇게 해서 달은 아이 유괴범이 된 것이고, 얼굴에 나타나는 특징 때문에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이젠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달이 처음 향한 곳은 나이든 여자 혼자 있는 집. 그곳에서 여자의 친절을 받아 빵과 우유를 먹이고 몸을 씻긴다. 이가 득실거리는 머리카락을 삭발하고 비누칠을 꼼꼼하게 한 후, 나이든 여인은 아이에게 ‘라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예쁜 이름을 지으면 예쁘게 클지도 모른단다.”

  여자의 집을 나와 유랑농민, 자기 토지도 없고 소작도 얻지 못해 노새가 끄는 마차에 짐을 싣고 농장 일이 있는 곳을 향해 유랑하면서 농사일을 도와 대가를 받아 먹고사는 일행에 끼어든다. 돈과 마르셀 부부와 이들의 딸 멜리, 그리고 아서와 그의 두 아들. 달과 라일라는 이들과 함께 유랑하며 함께 일하고 먹는 생활을 시작한다. 세월이 조금 흐르고 라일라도 훌쩍 커버리자, 달은 아이를 데리고 작은 마을에 정착해 라일라를 학교에 보낸다. 글을 읽고 쓰며, 더하기 빼기와 곱하기는 할 줄 알아야 세상 사는데 편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나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달은, 갑자기 라일라한테 공부는 필요한 만큼 다 했으니 다시 떠나자고 말하고 그날로 즉시 다시 돈과 마르셀 부부를 찾아간다. 라일라는 이때 즈음해서 달이 스타킹 위에 날이 바짝 선 단도를 매달고 다닌다는 걸 알았다.

  돈 일행이 정확하게 말은 안 했지만, 이제 미국에는 대공황이 밀어닥쳐 일감도 없고, 벌판엔 건조한 먼지와 황진Dust Bowl 현상이 극심해 날로 살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이 어느 날 사라졌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다. 자신의 피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채. 스타킹에 숨겨온 단도를 휘둘렀으며, 상대한 남자가 죽었는데, 남자는 라일라의 아버지이든지, 삼촌이든지, 아니면 그들이 부탁한 사람이었다. 늙은 달은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나이 덕분에 관대한 구류상태로 있다가 도망해 넓고 넓은 옥수수 밭에 들어가 행방불명된다. 옥수수밭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시라.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까지 차로 운전해 여덟 시간 이상 달려도 계속 밀밭이 늘어선 곳이 미국이다. 바로 옆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은 악명이 더 높아 그 속에 들어가 길을 잃고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라일라도 달을 찾기 위해 옥수수밭에 들어갔다가 구사일생, 우연의 힘으로 살아 돌아온다.

  이제 돈 일행도 궁핍의 절정을 맞아 가족 단위별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 라일라는 이 와중에 달을 잃고 대도시 세인트루이스로 흘러든다. 한 마을의 상점 여자 주인이 준 주소와 10달러만 들고 간 곳은 세인트루이스의 윤락가였다. 그곳에서 ‘로지’라는 이름의 나이든 매춘부가 된 라일라. 길쭉하게 생기고 큰 손과 백 번도 넘게 햇볕에 탄 얼굴에 농사일로 억센 몸을 갖고 있는 라일라는 전혀 인기있는 매춘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그냥 그곳에서 나와 터미널에서 앉아 있는데 한 여성이 함께 타고 가지 않겠냐고, 혼자 운전해 가기엔 너무 멀리 간다고 해서 그냥 떠났고, 밤새 달려 도착한 주유소에서 내려 또다른 운전자를 만나 한 번 더 이번엔 그리 멀리 가지 않은 곳에서 내려 걸었다. 걷고 또 걷다가 그저 흘깃 본 곳에 버려진 오두막 한 채가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잡았다. 늦봄. 초가을까지는 머물 수 있을 듯. 조금 떨어진 곳에 강이 흘러 몸을 씻을 수 있고, 주변에 농가도 있고 마을도 있어 일을 해주고 돈을 받든지 음식을 얻을 수도 있을 것. 이 마을 이름이 바로 “길리아드.”

  여기까지 읽고 잠깐 정지. 책꽂이를 뒤져 이이의 전작 <길리아드>를 꺼내 들었다. 주인공 존 에임스 목사. 일흔일곱 살의 에임스 목사는 겨우 일곱 살 먹은 유일한 혈육에게 쓰는 편지. 오래 전에 아내가 딸을 낳다가 죽고 조금 후에 딸도 죽어 혼자 외롭게 살던 늙은 목사 앞에 도착한 젊은 여성. 그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아들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아 글로 남기는 아버지. 에임스의 아버지 존 에임스 목사. 할아버지 존 에임스 할아버지. 어려서 죽은 둘째 형 존 에임스. 목사의 가장 친한 친구 보턴. <라일라>에서는 ‘바우턴’으로 표기하는. 그래서 앞에 이 책을 읽기 전에 <길리아드>를 먼저 읽어 보시라 권했던 것. <길리아드>에서 등장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아내가 바로 라일라다. 

  라일라는 오두막에 터를 잡고 농가 일을 해주기도 하고 자비로운 그레이엄 부인의 바느질, 다림질을 해주기도 하고, 목사 사택의 정원을 가꾸기도 하며 적은 돈을 모아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늦어도 겨울이 오기 전 떠날 수 있게 버스비를 모으고 있었다. 자기 정원을 솜씨 좋게 관리하면서 한쪽에다 감자와 콩을 심기도 하는 라일라에게 호감이 가는 목사. 그는 당연히 애정도 있겠지만, 늙은 목사에게 애정이란 단어가 어색하면, 끌림이 있었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성직자의 돌봄에 이끌려 한밤중에 라일라의 오두막 근처까지 가보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야외생활에 익숙한 라일라는 오두막 근처에도 오지 않았건만 목사가 근방에 왔다가 조금 머물다 간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날이 흘러가고, 다시 오두막 근방을 찾은 목사. 이때 라일라는 강에서 큼직한 생선 한 마리 낚았고, 들고 오다가 미끄러뜨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는 도중에, 단 번에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말이 라일라의 입에서 불쑥 쏟아져 나오고 만다.

  “나와 결혼해야 해요.”


  인연이 되려면 된다. 그리하여 당시엔 결혼 적령기를 넘은 여성과 일흔 고개를 앞에 둔 늙은 목사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아내는 그러나 언젠가는 길리아드를 떠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은 어느 날 젊은 남자가 현관을 두드린 다음 즉각 라일라와 함께 집을 나서는 광경을 떠올리지 않기가 쉽지 않다. 두 명은 서로 다른 인생사를 겪으며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얇은 유리 위에, 살짝 언 얼음을 딛고 산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이들이 겪은 상처와 아픔과 아린 기억. 이것을 치유하는 곳, 거기가 길리아드였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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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4-03-1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면 재미없을 거 같은데 작가를 매우 상찬하시어서 매우 궁금합니다. 브라우티건 책 하나 주문하는 김에 길라아드도 주문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4-03-15 15:57   좋아요 0 | URL
옙. 재미 말고 하여간 분위기가 죽이는 작가더라고요.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