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창비시선 478
신동호 지음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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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강원도 화천 출생에다 1984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데뷔했으면, 아무리 지방신문이라도 만 열여덟 살 때니까, 이거 신동 아냐, 신동? 경복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입석부근> 한 번 내봤다가 덜컥 당선한 황석영 이후에 아주, 아주 가끔 등장하는 영재 말이지. 대개 강원도에서 공부 잘하면 춘천으로 유학해 춘천고등학교 다니고 다시 서울로 가서 명문대학 졸업하는 게 코스인데, 시집 읽어보면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고향에서 역시 대처인 춘천 나와 춘천고등학교 가려고 했는데 때를 잘 만났는지, 못 만났는지 평준화 시대를 맞아 춘천고등학교 대신 강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도 재수 한 번 하고(그럼 재수하면서 신춘문예 먹은 거야?) 서울로 가서 왕십리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추운 대학, 한대 졸업했다. 전형적인 86세대답게 대학 다니며 민주화운동 하다가 남산, 당시 이름으로 안기부 수사실에 끌려 가 매도 좀 맞았고, 마흔여덟 시간동안 잠도 못 자고 그랬던 모양이다. (겸양의 말씀이겠지만) 거물은 아니고 수사관들 말에 의하면 피라미였단다. 대학 졸업하고 뭐 해서 먹고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장가 들어 아이들 낳고 왕십리, 답십리, 미아사거리에서 창문여고 쪽으로 쭉 들어간 장위동 등 주로 강북지역에서 가난한 살림 지지고 볶으면서도 중대 예술대학에서 석사, 모교인 한양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학위는 안 땄지만 박사과정 수료한 것이 2001년. 시집도 내고 산문집도 내고,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나 시절은 고단했으리라. 가난한 시인이라는 건 이렇게 글로 써 놓아야 멋도 있고 폼도 나고, 가오도 잡고 그런 것이지, 정말로 가난한 시인, 그것도 시인 부부라면 하루 종일 쫄쫄 굶고 있다가 출판사에서 전화해 오늘 조촐하게 누구 출판기념 겸해서 회식합니다, 하면 부리나케 버스 타고 가서 허리띠 끌러놓고 내일 먹을 거까지 와구와구 퍼먹는 형편을 뜻한다. 이 궁상맞은 시절도 세월이 가면 다 추억이 되는 법. 시인은 왕십리 시절, 답십리 시절, 장위동, 상계동 시절 모두 아련하게 그때는 그랬지, 이젠 이런 단계까지 왔다. 그러다가 드디어 2017년이 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 당하고 빈 자리를 후보 문재인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그러자마자 신동호는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설비서관으로 스카우트, 임기가 끝날 때까지 꼬박 5년 동안 대통령의 연설문 쓰는 일을 했다. 지금은 한신대학 초빙 특강 교수를 한다는데 요즘 대학엔 “초빙 특강 교수”라는 것도 있나?


  나는 정치적으로 이쪽, 저쪽을 따지는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방면은 시를 읽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걸 먼저 밝히고 시작하자. 우울한 대한민국은 이짝과 저짝이 워낙, 모세가 건넌 홍해바다처럼 짝 갈라져서 이런 인물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여차하면 오해를 살 수 있다. 애초에 외밭에서 짚신 갈아 신지 않겠으니, 허접한 독후감 읽는 분께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라. 그래도 오해하겠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알아서 하시고.

  이 시집은 몇 달 전, 어쩌면 일년 전 쯤에 읽다가 던져둔 거다. 시집 열어보니까 전에 읽으면서 책갈피 꽂아둔 것이 몇 개 보여서 알았다. 그때 이이가 19대 청와대 인사란 것도 몰랐다. 그땐 왜 읽다가 말았을까? 시집은 절대 분량이 적어 읽다가 만 일이 거의 없었음에도.


  어차피 시인 신동호의 약사를 잠깐 짚었으니 그 순서대로 시를 읽어보겠다. 먼저 시인의 아버지. 우습게도 아버지는 <금강전도金剛全圖>에 생몰을 소개한다. “아버지는 여수에서 나셨고 / 춘천에서 숟가락을 놓으셨다” 라고. 그러면 전남이 원적지인가? 그냥 출생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먼저 돌아간 큰아버지가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 파로호 어촌계 소속의 민물 어부로 일하다가 먼저 숟가락 놓으신 후에 지금 작은형이 뒤를 이어 배를 탄다고 하니. 이이가 금강산이니 북한 사람이니, 이 속에 북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건, 아마 문 전 대통령을 따라 북한을 방문했고, 금강산 구경도 했으며, 북한 작가들과 저작권 논의도 해서 그랬을 것이다. 북한강도 그래 빠지지 않고 금강산 발원이란 말을 보탤 수밖에. 맑고 넓고 추운 북한강의 명물 <황쏘가리>에 얽힌 큰아버지 생각. 



  송사리만 할 때 송사리를 잡으러 강에 나갔다가 수면 가까이 올라온 황쏘가리를 보고 숨이 턱 막혔었다.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는 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강의 내밀한 비밀을 알게 된 듯, 나는 어렵게 송사리를 놓아주었다.


  큰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화천 가는 길, 헤드라이트 불 앞에 장수하늘소가 나타났다가 큰 날개를 퍼덕이며 어둠 속으로 유유히 멀어져갔다. 메뚜기나 물방개에서 느끼지 못한 위엄, 모든 생물에게 경이로움이 깃들어 있다는 걸 남겨주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  (1, 2연)



  황쏘가리와 장수하늘소.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서울 변두리에 가면 사슴벌레하고 하늘소는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 장수하늘소는 못 봤다. 그게 어른 손바닥 만하다는데 화천에는 아직도 아주 드물게 있는 거 같다. 얼마 전에 화천에서 죽은 소설가 이외수도 장수하늘소 이야기를 한 적 있는 걸로 안다. 뭍에 장수하늘소가 있으면 물에 있는 것이 황쏘가리. 황쏘가리도 못 봤다. 팔뚝 만하다고 한다. 쏘가리는 요즘엔 양식을 해서 매운탕으로도 먹고, 안심하고 회로도 먹지만 여전히 오지게 비싸다. 하여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고, 정말로 본 적 있는 고향 화천과 큰아버지가 운전한 오토바이의 추억. 시집을 읽으면 과장해서 한 열번은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가 나오고 다섯 번은 큰아버지와 작은형이 등장한다. 시인한테 고향이라니.


  화천 사람이 객지인 춘천과 서울에서 하숙을 했으니 얼마나 고단하고 팍팍했을꼬? 이 가운데 가장 궁상스러운 것이 먹고 사는 문제다.



  라면 한꺼번에 많이 끓이기, 그 실패와 성공의 역사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은 사춘기 소년들에게 제격이다.

  휘청이는 삶은 그때 몸에 밴 것이다.


  정환네 엄마는 도청의 꽤 높은 공무원이었다. 우리는 종종 정환이 돈으로 라면을 사서 끓여 먹었다. 성질 급하고 배고팠던 우리는 매번 물이 끓기도 전에 라면을 모조리 넣어 버렸다. 퉁퉁 불은 그 맛없는 라면 앞에서 툴툴대면서도 서로 먼저 먹겠다고 직진했다. 나는 세상이 끓기도 전에 몸을 던져 번번이 쓰러졌다.


  왕십리, 무학예식장 뒤편 자취방은 재래식 화장실 옆에 있었다. 다섯 식구의 옆방은 가난으로 부산스러웠고, 똥을 참는 버릇은 그때 생긴 것이리라.


  조그만 아이들 셋을 불러 앉혀놓고 라면 두개로 넷이 배불리 먹는 요리를 했다. 잘게 부숴 불리면 엄지만큼 굵어진 라면이 배를 채웠다. 어느 날 말도 않고 삽십만원 보증금에 삼만원 월세방을 떴다.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다.


  세상이 끓을 때까지 아이들이 기다려줄까 생각한다. 그럴 거 같다. 아직도 똥이 잘 안 나오는 건 나뿐일 것이다.


  지금도 가끔 춘천시 교동 언덕 위 우리의 아지트,

  정환네 집으로 간다.   (전문)



  그림 그려지시지? 이런 궁상이라니. 그런데 나는 넷째 연, 아이들 셋을 불러서 라면 두 개를 끓여 먹는 장면에, 이 아이들이 누굴까, 궁금했다. 자기 아이들? 조금 크면 집에서 키우는 개 푸들의 털을 깎다가 바리캉 기름이 없어서 도중에 그만 둔 일 때문에 아빠를 들들 볶는 사춘기 소녀가 되는? 거참 모르겠는 걸. 시인이 결혼을 해서 아이 셋을 두었다면 빨라도 90년대 중후반일 거 같은데 서울에서 어떤 방이 보증금 삼십만원에 월세 삼만원일까? 혹시 고등학교 시절 춘천에서 동네 꼬마들 불러서 끓여준 거 아냐? 시간 배열이 거 좀 수상하다.

  하여튼 왕십리 똥파리 무학예식장 뒤편의 자취방에서 심한 변비로 시달리고 있을 때, 시인은 속칭 ‘달려갔다.’ 혁명을 믿고 혁명을 위해 복무했다는 대가로. <경장更張>, 갑오경장 할 때 경장이란 시에서 노래하기를:



  경장更張



  ‘경장’의 재발견. 마음속에서 잘 떠나질 않는다.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고쳐 맨다는 뜻.


  혁명이란 단어를 오랫동안 품고 살았다. 용맹정진하기엔 미련이 많은, 의지박약형 인간인 내가 혁명을 꿈꾼 건 오직 스무살 뜨거운 가슴속으로 밀고 들어온 ‘광주’ 때문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피 냄새는 늘 두려웠다. 늦었지만 고백한다.


  ‘경장’에 담긴 두가지 의미가 맘에 든다. 거문고를 부숴버리지 않고 줄만 고쳐 맨다는 것, 그 결과가 조화를 부르는 소리라는 것.  (전문)



  원래 그런 거 아냐? 두렵기 때문에 더 용감해지는 거. 잃을 것이 없어서 더 사랑할 수 있는 거. 하긴 워낙 깡다구가 좋은 인간들도 있더라. 정보과 형사가 두다다다닥 두드려 패자 죽자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아, 몰라요, 몰라, 씨발, 하던 선배. 뭐야, 씨발? 아, 아니예요. 아파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요. 취소, 취소. 이러던 양반은 나중에 정당 언저리에 왔다갔다 하더니 공천 한 번 못 받고 찌그러져 살더라.

  근데 내가 이 시집을 읽다가 경천동지할 만큼 놀란 건, 시인이라서 그런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낭만적이고 희망적이고 발랄한 통일관이었다. 신동호가 경애해 마지않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가 여전히 도서관 사서를 하면서 통일 한국, 스페인어로 “깔마 꼬레아”를 여행할 때 필요한 가이드북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시의 제목은 <깔마 꼬레아 여행 가이드북>



  깔마 꼬레아에서 가볼 곳은 세곳이다.

  평화협정 서명한 판문점,

  New Triangle Age를 공표한 금강산,

  바다 위 어디, 하나의 꼬레아 기념탐.

  칼로는 제주도 유채꽃을 추천했지만

  나는 개마고원에서 들쭉을 볼 작정이다.


  입국은 평양 순안공항으로 정한다.

  평부선을 타고 봉동역에 가서

  판문점까지는 자전거를 타면 된다.

  안내서는 인천공항을 추천한다.


  전쟁과 정전, 종전과 평화.

  과거는 팜파스의 소들처럼 느긋하다.

  협정서에 남겨진 서명은 아직 힘차다.

  강대국 사이에서 이뤄낸 반전은

  두고두고 세계의 교과서에 남을 것이다.  (부분)



  이 시 <깔마 꼬레아 여행 가이드북>에 필적할 유일한 시집을 고르라면 딱 떠오르는 거 읎으셔? 나는 우리나라 19대 대통령을 역임한 문재인, 그냥 이렇게 호칭하고 싶은데 그러긴 뒤가 좀 캥기고, 마땅하게 붙일 건 습관적으로 “각하” 정도가 어울릴 것도 같지만 그건 전임 대통령이 싫다고 길길이 뛰실 거 같아서, 하여간 그 양반한테 외람되지만,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썼다고 추정되는 <용비어천가>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나 스스로가 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앞으로 5년 안에 통일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휴전선이 열리는 날, 드디어 그날이 오면, 나는 집을 팔고 회사도 때려치워 퇴직금 들고 묘향산 초입으로 달려가 토종닭 집을 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던 종자다. 나는 닭 모가지 비틀고, 마누라는 카운터 보고, 주방과 홀은 현지 고용할 거라고 마음 단단히 먹었던 인간으로, 신동호의 낭만적이고 우스꽝스러울 만큼 순진한 통일관을 훔쳐보자 혀가 쑥 나와버렸다. 아무리 문정부의 비서를 했다고 하더라도 50대 중반이 이렇게 순진하면, 아이고, 정말로 해먹을 거라고는 시인밖에 없는 사람…… 맞지? 아무리 시인이라도 너무 순진한 중장년은요, 꼴이 우스워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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