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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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하나.

  오나와 티그는 전형적인 중산층 부부였다. 당연히 지금은 아니다. 오나는 글을 쓰고 티그는 연구를 한다. 그런데 또한 “전형적인” 쇼 윈도우 부부이기도 하다. 두 아들을 낳고 키우지만 부부 사이는 언젠가부터 냉랭하기 그지없다. 집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 가정도 가끔 다른 부부, 일 때문에 가까워진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럴 때마다 서양인들이 늘 그렇듯이 괜찮은 와인 한두 병을 들고 오는 부부에게 그럴 듯한 정찬을 대접한다. 손님들이 보기엔 더없이 화목해서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이상처럼 생각하는 홈, 홈, 스위트홈의 정수를 자랑하기 위해 초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오나와 티그 역시 행사가 있으면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부부동반으로 멋진 에스코트 자세를 유지해 행사장에 입장한다. 부부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늘 그윽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눈길은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과 무슨 말을 하는지 별로 상관도 안 하고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오나는 함부로 이혼해주고 싶지 않다. 어쩌면 오나에 대한 지독한 오해인지 모르지만, 오나는 적당하고 안전한 여성 호구를 하나 준비해 티그와 함께 살게 만든 다음, 티그에게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현금을 뽑아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에 오나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일은, 티그와 새로운 여성이 오나가 향유할 수 있는 최선의 주거와 복지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거다. 이래서 오나의 눈에 띈 젊은 여성이 넬. 넬도 인텔리다. 캐나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학 강사나 작은 출판사 편집 일을 기간제 혹은 단기직으로 하다가 훌훌 털고 다른 도시로 떠나는 것이 체질에 맞다고 생각하는. 넬이 편집일을 할 때 오나를 만난다. 오나의 책을 출간하는데 하여튼 작품 속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오나의 책이라기보다 넬의 책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개입을 해서 오나가 흡족해한다. 자기 작품의 편집자로도 그렇고, 가능하다면 남편 티그의 불륜 상대로도. 불륜? 이것도 불륜이라면. 오나가 보기엔 젊고 똑똑한 여자. 솔직한 의견으론 어리고 어리버리한 년.

  결국 티그는 이혼도 하지 못한 채로 조금 떨어진 (“조금”이라고 해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땅이 넓은 나라인 캐나다에서 조금이니까 쉽게 생각하지 마시라) 농촌에서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낡은 집을 얻어 나가는 대가로 자기 소득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아이들 양육비와 생활비로 송금해주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넬이 티그와 합류한다. 넬은 시골에 정착함에 따라 먹을 야채도 직접 재배하고 처음엔 닭으로 시작해서 양, 소, 오리, 거위, 개, 말 같은 가축도 기르게 되고 일상적인 농촌 노동에 익숙해진다. 한편으로는 처음엔 주말에 간혹 방문하던 티그의 두 아들까지 합류해 독자가 읽기엔 나름대로 괜찮은 농촌생활을 꾸려간다. 티그와 두 아들까지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 정도면 아버지의 새 애인으로도 꽤 만족스럽다. 세월이 조금 지나 낡은 농가를 떠나 좀 더 북쪽으로 가서 괜찮은 집으로 이사해 여전히 농촌 생활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식 아내가 되고 아이도 출산한다. 출산을 망설이는 것 같던 나이 든 티그도 정작 아이가 생기니 좋아한다. 이만하면 꽤 괜찮아 보인다. 다만 한 가지. 넬은 남자, 남자의 두 아들, 그리고 매번 삶의 장애가 되는 오나를 바라지하느라 자신의 본업인 교육, 편집 또는 저작활동은 점점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처음엔 작업실이 있었지만 뒤로 가면 작업실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봐서 그렇다.

  티그의 아이들이 다 성장을 하고 넬의 아이들도 점점 커져 이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오나는 이제 가진 것이 거의 없고, 하던 연애도 번번이 실패해 별 볼일 없는 형편이지만 넬-티그 커플이 자기보다 더 넓고 밝은 집에서 사는 꼴을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통해 압력을 넣어 넬이 친정에서 상속받은 현금으로 집을 사게 하고 시세보다 말도 안 되게 적은 금액의 월세로 그 집에 들어가 살다가 그것도 내지 않으려 한다.


  두 번째 이야기.

  넬이 열한 살 때, 넬과 부모, 오빠는 아빠가 곤충 연구를 하는 섬의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 오빠는 여름이 되면 도끼와 망치를 써서 숲 속에 들어가 동료들과 생존하는 법을 배우는 스카우트 캠프로 떠날 것이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멀리 가야 한다. 그런데 엄마의 배가 남산 만하다. 아니, 남산은 아니고 북통 정도다. 출산을 하기엔 많은 나이라서 나이 때문에 아이한테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약간 있기는 하다. 이건 복선이다. 이 아이, 즉 동생이 나중에 독립하고도 몇 년 지난 후에 밝혀지는 바, 정신적으로 분열증 증세가 있다고 돌팔이 신경정신과 전문의한테 진단을 받는다. 다시 다른 의사한테 재진을 받아 약을 바꾸지만 적어도 가볍지 않은 우울증은 확실한 거 같다. 끝까지 약을 끊으면 안 된다고 하고, 어쨌거나 약 덕분에 이후에 동생의 증세는 정상 수준에 도달한다.

  넬은 곧 있을 것이라는 엄마의 출산을 대비하기 위하여 어렸을 때 배운 손뜨개를 열심히 하고 있다. 동생의 배내옷 일습을 짜고 있는 것. 손싸개 두 개, 발목 양말 두 켤레, 레깅스 한 벌, 겉옷 한 벌, 그리고 모자. 만삭의 어머니는 오래 전 트렁크 속에 넣어둔 스목 드레스를 즐겨 입는다. 그걸 입으면 왜 그렇게 가난해 보이는지. 엄마의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점차 몸집이 거대해졌지만 평소엔 민첩하고 과단성 있게 산책을 하거나, 놀라운 속도로 스케이트를 타거나, 발차기를 힘차게 하면서 수영을 즐기거나, 열 받으면 벽에 던져 접시를 부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 늙어 임신을 하면서 엄마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넬은 어머니가 왜 자기 자신을 이렇게 무기력하고 부푼 모습으로 만들었는지, 그래서 왜 나의 미래를 그늘지고 불확실하게 만들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만해도 어머니 자신 역시 뜻밖에 당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1, 2주 후에 아버지가 돌아오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철새들이 울어 10월이 되었다. 넬이 열두 살이 되기 몇 주 전에 여동생 리지가 태어나 ‘나’는 배내옷 모자에 분홍색 끈을 달아 일습으로 동생한테 입힐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잠을 자지 않았다. 밤에도 어머니의 품에서 놓여나기만 하면 날이 새도록 빽빽 울어댔다. 어머니는 아기하고 통하는 무슨 특별 교류장치라도 있는지 리지가 울 때마다 몽유병자처럼 일어나 어르고, 젖이나 물을 먹이거나 하고, 다시 재운 다음에 침대로 돌아갔지만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빽빽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한테만. 넬은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아주 뚱뚱했던 어머니는 이제 너무 여윈 모습으로 변했다. 수면부족으로 수척해지고 눈 밑엔 짙게 검은 그늘이 젔으며 머리카락은 언제나 푸석푸석했다.

  그래도 넬한테는 어김없이 사춘기가 왔다. 하지만 넬의 십대 시절 대부분 엄마는 동생 때문에 늘 혼수상태였다. 엄마한테 넬까지 부담을 주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어찌 한 번이라도 대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귀싸대기 한 대를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아도 봤지만. 하여간 언제나 파김치 상태로 늘어져 있는 어머니 덕분에 넬의 사춘기 시절은 부모한테 더욱 비밀스러웠고, 부모 입장에서는 아주 무난한 십대 시절을 보낸 착한 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세월은 가고 또 간다. 넬과 리지 자매는 멀지 않은 곳에서 살며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이야기하고, 이제 나이 들어 누워 있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한테 함께 들르기로 한다. 뭐 그렇게 사는 것이지.


  《도덕적 혼란》은 이 두 이야기를 주축으로 만들어가는 열한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다. 겉 표지에 “마거릿 애트우드 소설”이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이런 표현은 대개 중단편집일 때 쓰는 걸로 알고 있다. 매우 애매하다.

  연작 장편으로 볼 수도 있다. 연작 장편이라면 위에 적은 두 이야기 사이에 모래밭이 놓여 있어 이야기를 연결하는데 서걱거린다. 어머니와 자매들 이야기의 경우엔 애트우드 특유의 페미니즘 적으로 괜찮은 작품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나와 티그가 끼어들면서 20세기 가정 이야기로 확 바뀌어 버린다. 이야기 자체도 애트우드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거의 “평면적”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밋밋하다. 문장 역시 <도둑 신부>, <고양이 눈>, <눈먼 암살자> 같은 작품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덜 발칙하다. 그렇다고 열한 편의 단편소설로 읽자니 이야기들이 딱 맺어지지 않는다. 물론 이 생각은 애초에 단편을 책 한 권에 실었고, 그걸 읽어서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알고 있어서 그렇게 “딱 맺어지지 않”는 것 같이 생각했겠지만. 그렇다고 애트우드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다. 이 정도 작가의 경험 가지고 자전적 운운도 우스운 거 같고. 그래서 내가 읽은 결론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트우드. 애트우드의 명성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읽기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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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2-16 05: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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